꼬꼬마 시절, 노트나 교과서 빈 공간에 한 장 한 장 그림을 그려 촤라락- 넘기면, 그림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던 것을 그대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는 영상 역시 그런 방식을 이용해 제공되는 것이며, 영화는 주로 1초에 24장, 방송은 30장에서 60장까지의 정지화면을 이어붙인 것이라 할 수 있다.
1초 동안 24장을 찍어야 현실의 1초가 될 수 있는 영상을, 1분 동안 24장을 찍어 1초로 구성시키면 어떻게 될까? 그 영상은 마치 빨리감기를 한 것처럼 재생될 것이며, 압축된 시간 동안 벌어진 일들이 화면에 담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압축해서 표현하는 촬영 방법을 ‘타임랩스’라고 한다. 그 기법을 사용하면, 식물이 자라 꽃을 피우기까지의 모습, 건물을 짓는 모습, 밤 하늘에 별이 움직이는 모습, 임산부의 임신 초기부터 말기까지 배가 불러오는 모습, 수개월 동안 여행을 다니며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자라는 모습 등을 시간 간격을 두고 찍어 단 몇 초, 또는 몇 분의 영상으로 만들 수 있다.
방송에 나오는 해가 지고 뜨는 모습이라든지,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는 모습 같은 것들도 전부 타임랩스 기법을 사용해 촬영한 영상이다. 그런 영상은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뒤 빨리감기 한 것처럼 편집할 수도 있지만, 후보정이나 감도, 전원에서의 이점, 그리고 무엇보다 가성비와 화질의 이점 때문에 DSLR을 사용해 촬영하곤 한다. DSLR로 동영상을 찍는 게 아니라, 한 장 한 장 찍은 수 백, 수 천, 수 만 장의 사진을 이어 붙여 영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1. 내 타임랩스 이야기.
타임랩스 촬영은 어렵지 않다. 사진을 찍듯 구도와 초점, 그리고 노출을 잘 맞춰 마음에 드는 피사체를 찍으면 된다. 그렇기에 카메라를 처음 만져보는 사람이라고 해도, 5분 정도만 카메라 조작에 대해 배운다면 오늘 밤 멋진 별 일주 타임랩스를 찍을 수 있다.
문제는 촬영 시간인데, 만약 그대가 겨우 1분짜리 밤하늘 타임랩스를 만들 거라 해도 24프레임 기준 1,440장의 사진이 필요하다. 말이 1,440장이지, 별 사진을 찍으려면 한 장당 보통 30초 내외의 노출을 줘야 하니, 1,440장이면 43,200초가 소요된다. 분으로 따지면 720분, 시간으로는 12시간이다. 결과물은 훌륭할 수 있겠지만, 12시간 찍어 1분의 영상을 만드는 건 보통의 인내심으론 하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낮에 찍는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구름의 움직임 같은 건 2초에 한 컷씩을 찍어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으니, 24프레임짜리 1분의 영상을 만드는데 48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아래는 내가 타임랩스 연습 초기에 동네에서 촬영한 영상의 캡쳐사진인데, 5초에 한 장씩 찍어 24초 영상 만드는데 두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필이면 가장 추운 날 나가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는 문제가 있었긴 했는데, 열정이 불타고 있을 때라 견딜 수 있었다.
저런 영상 같은 건 집에서 놀다가도 나가서 찍을 수 있다. 기술 연습이니 이것저것 찍어보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왕 나가서 몇 시간씩 찍을 거면 좀 흐뭇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걸 찍고 싶기에 계속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동네 호수공원에도 가보고,
‘달리’라고 하는 촬영도구를 제작해 시험을 해보기도 한다.
사실 난 별 사진을 찍다가 타임랩스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두 시간 걸려서 간 곳에서 날 새며 네 시간 촬영하고 집에 돌아와 겨우 십 몇 초짜리 영상을 얻으면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래서 영상은 영상대로 두고 이렇게 사진을 합쳐 일주사진을 만들어 보거나,
찍어 온 은하수 사진을 적도의로 찍은 것처럼 흉내내 만들어 보기도 했다.
천체망원경에 붙여 놓은 카메라로 찍은 월식에서는, 이렇게 달 사진만 캡쳐해 한 곳에 모아보기도 했고 말이다.
이 외에 ‘하이퍼 랩스’라고 하는 ‘움직이며 찍는 타임랩스 촬영’도 시도하고 자전거와 자동차에 카메라를 달아 찍는 타임랩스도 찍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며 훗날 괜찮은 작품을 하나 만들어 내려던 내 기대는, 아래에서 소개할 Rob Whitworth(이하 ‘롭’으로 지칭)의 영상을 보며 무너지고 말았다.
2. Rob Whitworth의 타임랩스.
내가 처음 본 롭의 타임랩스는 <Kuala Lumpur DAY-NIGHT>라는 영상이었다.
Kuala Lumpur DAY-NIGHT from Rob Whitworth on Vimeo.
영상을 보고 난 후 검색을 통해 그의 국적이 영국인 것을 확인하곤, 영국을 향해 큰절을 올리며 스승으로 모시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올린 영상을 볼 땐
‘뭐, 이 정도는 내가 저기 갈 수만 있으면 나도 찍을 수 있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롭의 영상을 보면서는
‘이건 어떻게 찍은 거지? 저건 어떻게 한 거지? 이 사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Traffic in Frenetic HCMC, Vietnam from Rob Whitworth on Vimeo.
난 일부러 그의 초기 작품들까지 검색해 봤는데, 초기 작품 중 하나인 <Traffic in Frenetic HCMC, Vietnam>을 보고는,
‘오, 좋았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나도 연구하고 연습하면 따라갈 수 있겠어.’
하는 생각도 했다.
This is Shanghai from Rob Whitworth on Vimeo.
그 후 올라온 <This is Shanghai>를 보곤
‘흠, 이 사람 좀 완전 무서운 사람이군.’
하는 생각을 했다. 저런 건 그저 열심히만 한다고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Danang International Fireworks Competition from Rob Whitworth on Vimeo.
<Danang International Fireworks Competition>를 보고 나서는, 난 롭에 대한 내 정의를 ‘롤모델’에서 ‘따라할 수 없는 전문가’로 바꾸었다. 각 나라에서 타임랩스를 좀 찍는다는 사람들이나 촬영팀들, 그리고 타임랩스 제작 강의를 하는 사람들도 댓글로 극찬을 하는 걸 보며 위안을 삼았을 뿐이다.
물론 나도 따라 해보려고 생에 처음으로 불꽃놀이 사진을 찍으러 다녀오기도 했다.
저 사진을 보곤
“저건 뭔가요? 폭발현장 사진인가요? 사고현장 사진?”
이라고 묻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노출조절에 실패한 내 첫 불꽃놀이 사진이다. 마음 아프니 이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자.
Barcelona GO! from Rob Whitworth on Vimeo.
그 다음 해 <Barcelona GO!>라는 영상이 올라왔고, 난 영상을 본 후 아직 한 편의 타임랩스도 편집해서 발표하진 않았지만 은퇴하기로 했다. 그의 작업물이 ‘로켓 발사체 착륙 시험’이라면, 내 작업물은 ‘페트병으로 만드는 물로켓’처럼 느껴졌다. 저 영상을 본 직후, 내가 편집하던 것들을 싹 다 지워버렸던 기억이 난다.
Dubai Flow Motion from Rob Whitworth on Vimeo.
바르셀로나 영상만으로도 충격과 공포이며 어마무시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어 <Dubai Flow Motion >이 공개되었다. 사실 난 그 전까진 롭의 영상을 다운 받아 프레임 별로 관찰하며 어떻게 만든 것인지 알아내려 하고 있었는데, 두바이 영상을 보면서는 그 짓도 하지 않고 그냥 감상만 했다. 그저 몇 장면을 따라하는 것까지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절감이 들다보니,
‘이 정도면 반칙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대체 끝이 어디라는 거야?’
하는 생각까지 고개를 들었다. 내가 물어봐서 롭이 대답을 해준다고 해도, 따라할 수 없는 컷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외에 몇 가지 영상들이 더 있기는 한데, 그건 그의 계정이나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하시길 권한다. 놀라운 작품들을 더 만나실 수 있다. 롭의 홈페이지 주소는 아래와 같다.
http://www.robwhitworth.co.uk/
아, 북한의 ‘평양’에 가서 촬영한 영상도 있다.
Enter Pyongyang from JT Singh on Vimeo.
영상 후반에는, 북한 여자아이가 카메라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아이고, 촬영하누나!”
하며 물러서는 장면도 나온다. 개인적으론 북한 사람들이 롤러 블레이드를 타며 즐기고 있는 게 좀 충격적이었다.
연출과 촬영과 편집의 실력만으로도 혀를 내두를 정도지만, 그가 밝힌 ‘한 영상을 찍는데 소요된 것들과 사용한 장비’를 보면 입이 벌어진다.
<Barcelona GO!>영상 촬영 소요시간 및 사용 장비
My time in numbers:
- 363 hours work
- 75 Hours Logistics and Travel
- 31 Hours Scouting and Location Finding
- 78 Hours Shooting
- 179 Hours Post Production
- 26014 Camera Raw Files
- 817gb of data
Kit List
- Nikon D800 DSLR
- Nikon D7100 DSLR
- Nikon D7100 DSLR
- Nikon D3200 DSLR
- Nikon 10.5mm f/2.8G ED AF DX Fisheye
- NIkon 10-24mm f/3.5-4.5G ED AF-S DX
- Nikon 16-35 f/4G AF-S VR Zoom Nikkor
- Nikon 28mm AF f/2.8D
- Nikon 50mm f/1.4G AF-S
- Nikon 70-200mm f/2.8G ED AF-S VR II
- Promote Control
영상을 찍어 먹고 사는 사람이니 저 정도는 소요하는 게 당연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남들은 밤하늘이나 꽃, 구름 정도를 찍는 것으로 사용하던 기법을 이 정도로 발전시켰다는 것이 대단한 것 같다. 영상제작을 하는 사람들이 단 댓글을 보면 기법을 알아도 엄두를 내기 힘든 작업들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후편집 과정에서의 ‘노가다’를 감수하면서까지 롭은 어마무시한 것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보통 영상 하나를 만드는데 5개월 정도가 걸리며, 2테라 정도의 사진을 가지고 작업한다고 한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영상이 8개월 전 영상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롭의 또 다른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롭이 일 년에 한두 편씩 기적 같은 작품들을 만들고 있을 때 나는 귀만 파고 있었다니…. 좀 더 부지런히 살아야겠다.
눈 호강하며 즐감하시고, 편안한 주말 보내시길!
▼ 하트 버튼과 좋아요 버튼 클릭으 제게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기타글모음 > 웹유적지성지순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화적 충격의 기록 <떡실신 시리즈, 미첨썰> (63) | 2013.04.13 |
---|---|
웹에서 빛나는 노익장 <조광현, 진영수 할아버지> (85) | 2013.03.30 |
읽으면 사고 싶게 만드는 신들린 입담 <피철철> (92) | 2013.03.23 |
이게 상상력이다! <외계문명과 인류의 비밀> (70) | 2013.03.16 |
겁 많은 소심남의 세상 여행 <그냥 걷기> (531) | 2013.03.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