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폐인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매력이 있을까요? 자신이 참 갑갑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라면, 그 와중에 누군가에게 구애를 하는 건 나 좀 업고 가라는 얘기밖에 안 될 텐데요.
K양의 주변엔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아니, 어쩌면 K양이 언제든 자신을 이해해주고 보듬어 줄 사람들만 남겼는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는 K양에게 차가운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버리면 안 그래도 죽겠는데 더 힘들어 질 수 있으니까, 온순하고 부드럽고 호의적인, 그런 사람들만 남겼을 수도 있어요.
전남친도 그래요. 그는 맺고 끊는 걸 확실하게 하지 않으며, K양과는 친구도 아닌 연인도 아닌 애매한 관계를 지속해왔어요. 연인이 생겨도 그 사람과는 이제 겨우 몇 달 만난 거고, K양과는 6년이 넘는 시간을 알아왔으니까, 집안일이든 자신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든 다 털어 놓을 수 있는 K양을 ‘친구’로 둔 채 계속 연락하고 지내는 걸 수 있어요. 그걸 K양은 가능성이 남아 있는 관계라 생각하며, 혼자 못 버티겠을 때 그에게 구조신호를 보내는 걸 수 있고요.
듣고 싶지 않은 얘기겠지만, K양이 하는 말들은 꿈같은 얘기들이에요. 유효기간이 지난 추억을 붙잡은 채 홀로 기대를 하고 있는 거고, K양이 가능성이라 생각하는 건 모질지 못한 상대의 우유부단함이 남긴 여지일 뿐이에요. K양의 지인들은 K양을 아끼는 양 같은 사람들이라 이런 얘기를 하지 않는데, 킬리만자로의 표범 같은 제가, 오늘 대신 총대를 좀 멜게요.
1. 누굴 기다릴 게 아니라, K양이 움직여야 해요.
제 친구 중에, 우리가 스물세 살 때쯤 같이 어울리던 얘기만 하는 친구가 있어요. 언제나 그 때를 기준으로 “너희들 참 변했다.”는 얘기를 하고, “그때처럼 한 번 다시 뭉쳐야지.”하는 얘기도 해요. 십 년도 더 지난 과거에 그 친구 혼자 머무르면서, 다른 친구들에게 자꾸 다시 그 때로 돌아오라는 얘기만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그럴 수 있는 일이긴 해요. 저도 사실 아직 제가 스물 몇 살인 것 같거든요. 마음속에 꼬꼬마가 살고 있기도 하고, 철없고 한심한 모습도 많은데 이런 상태로도 어른이라고 할 수 있나 뭐 그런 생각도 가끔 해요. 다들 어딘가에서 어른이 되는 방법 같은 걸 배워 잘 살고 있는데, 나만 그걸 못 배운 건가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무엇이 어쨌건 아무튼 살아보는 게 인생인 것 같고, 살아내는 게 어른스러운 일인 것 같아요. 익숙해지고 덤덤해지고 잘 하게 될 때까지 누가 다 가르쳐주거나 예행연습을 충분히 한 뒤에 시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미 시작된 거예요. K양이나 저나 제 친구 같은 경우는, 이미 한참 전에 시작된 거라 할 수 있고요.
이걸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혼자 둥지에 남아
‘예전엔 앞 둥지 옆 둥지에 내 친구들이 많이 있었는데….’
하고 있으면, 스스로의 힘으로 날아 어디까지 갈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누가 둥지 근처로 와 주기만 바라게 될 수 있어요. 누가 먹이를 물어다 주거나 따뜻하게 품어만 주던, 그 시절의 기억에 함몰되어 있게 되는 거죠.
제가 저를 돌아보면, 전 제 하루하루에 이렇다 할 일들도 생기지 않는 날이 오래 지속될 때 주로 둥지 속으로 몸을 숨겼던 것 같아요. 그냥 막연히 과거가 더 좋았던 것 같고, 고만고만한 처지에서 바보스러운 짓을 함께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고, 지인들 마음에 바람이 불어 누구라도 먼저 연락을 좀 해주길 바랐던 것 같아요. ‘내년쯤엔 J군과 H군에게, 예전처럼 같이 낚시를 가자고 해봐야지.’하는 생각은 품기만 하다가, 이미 오륙 년이 흘러버리기도 했고요.
이렇게만 산다면, 뭔가를 바라고 그리워하기만 하다 썩어 없어지겠죠. 일흔쯤 되어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후회가 밀려올 수 있겠지만, 그땐 이도 다 상하고 귀도 잘 안 들릴 나이잖아요. 천 년을 산다고 하면 백년쯤이야 뭐 좀 허송세월해도 괜찮지만, 우리 이제 대략 30년만 더 살아도 노령연금 나올 나이거든요. 살아온 만큼을 더 살지 않아도 나라에서 노인으로 분류하게 될 나이가 된 거라고요. 예순 넘어서도, 스물 몇 살 땐 어땠다는 얘기만 하고 앉아 있을 수 없잖아요.
추억, 우정, 사랑, 연애, 이런 건 일단 잠깐 접어두고 K양 자신의 인생을 생각해 보세요. 저런 요소들은 K양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만나다 잠시 길동무도 되고 목적지까지 같이 걸어가게 되기도 하고 그러는 것들이지, K양은 길에 주저앉아 있을 뿐인데 다른 요인들이 K양을 이끌어주거나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가 주는 게 아니에요. 거기 앉아선 예전에 그 길을 지나쳐 간 사람이 좋았다는 이야기만 하지 마시고, 이젠 K양도 그만 K양의 두 다리로 서서 걸어가야 할 때라는 걸 잊지 마세요.
2. 그에겐 K양에 대한 애정이 없어요.
저도 K양과 상대의 대화를 보며 슬퍼졌어요.
‘이 사람은 정말 K양에 대해 전혀 궁금해 하지 않는구나.’
싶어서요.
그런데 사실 이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과거에 사귄 적 있는 사이라고 해서 상대가 평생 내게 관심을 가지고 궁금해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젠 남남으로 살아도 서로 상관없는 사이인데 내 수다 다 받아주고 위로까지 해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더군다나 그는 현재, 새로운 사람을 만나 연애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그가 훨씬 더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어야 해요. 하지만 그는 앞서 말했듯 맺고 끊는 것을 잘 못하는데다가, 말을 걸면 영혼 없는 리액션이라도 해주거든요. 나중에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일이라고 생각하는지, 자신이 헤어지면 연락하겠다며 K양과의 관계에도 여지를 두고 있고요.
저런 태도를 보이는 남자 때문에 몇 년씩, 기대를 걸었다가, 포기했다가, 또 다시 돌아와 기대를 거는 경우가 많아요. 보통 “몇 살까지 둘 다 솔로이면 그때 만나보자.”라거나 “다른 사람 만나보고, 만나 봐도 아니다 싶으면 그때 다시 만나자.” 따위의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그건 약속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에요. 그냥 보험 들어 놓는 것에 가까우며, “바쁜 것 좀 지나가면 같이 한 잔 하자.”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바쁜 게 끝나도, 만날 마음이 없으면 다른 핑계를 대고 마는 것처럼요.
인정하기 싫어도, 현실을 피하지 말고 보셔야 해요. 상대 옆에는 상대의 연인이 있잖아요. 그가 그 연인과 잘 안 될 것처럼, 또는 그렇게까지 온전히 마음을 쏟고 있는 건 아닌 것처럼 말한 건, 솔로부대에 있으며 퍽퍽한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K양에게 자신의 연애를 자랑하고 싶지 않는 것도 있고, 또 K양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너무 행복한 척 하면 안 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가 그 자리에서 여친과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으면, K양은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을 거잖아요. 그도 그걸 알기에, 그냥 앓는 소리 좀 한 것에 가까워요. 현실을 보세요. 그는 그 여친과 잘 사귀고 있잖아요.
K양은 남친과 지금도 꾸준히 연락을 하는 중이라 생각하겠지만, 둘의 연락은
- K양이 그에게 답이 정해진 이야기를 한 뒤, 그에게서 영혼 없는 대답을 받고 마는 것.
에 가까워요. “나 이러이러한 걸 잃어버렸는데, 혹시 나중에 길거리 지나다니다 비슷한 거 보면 나한테 좀 알려줘. 아니면 그것 좀 사줘. 내가 나중에 돈 줄게.”라는 이야기를 한 뒤, “응.”이라는 대답을 듣는 것일 뿐이잖아요. 이건 대화가 아니에요. 일단 다 받아주기는 하는 상대에게 아무 말이나 걸어 겨우 짧은 대답 하나 듣는 거지. K양 지인들은 온순하고 다정한 사람들이라 이런 K양의 이야기를 듣고도 K양이 아프지 않게 이야기를 해주고 마는데, 저는 몸 쪽 꽉찬 돌직구로 답을 드릴게요. 그에겐 K양에 대한 애정이 없어요.
3. 둘의 연애도, 마냥 행복했던 건 아니었잖아요.
지금 워낙 K양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과거가 마냥 행복했던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이 실제로 어떤 연애를 해왔는지를 돌아보면, 둘의 연애 마지막엔 사실 거의
- 사귀다 다른 사람 만나도 괜찮다. 그러니 그냥 사귀고 있어 보자.
라는 이야기까지 하며 관계에 산소호흡기 달고 있었거든요. 연애 생명만 겨우 유지하며 버텼던 거지, 꾸준히 서로를 보듬어가며 사귀어온 게 아녜요.
당시의 상황에 대해 K양이 했던 말을 보세요.
“의무적으로만 만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사랑이 없이 사귀는 것 같아서 헤어지자고 했었음. 근데 그래도 그냥 계속 연락하고 도서관 같이 하고 밥 같이 먹으며 지냈음. 사귀는 건 아니지만, 사귈 때랑 별 차이 없었음.”
저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거든요.
이걸 그저 그만큼 둘의 인연이 질겨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며, 질긴 인연이니 나중에 뭐 어떻게 잘 될 수도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하시면 안돼요. 지금까지는 그렇게 지내는 게 어쩌다보니 가능했지만, 이제 상대가 진지하게 연애에 임하고 결혼까지 한다면, K양만 지붕 쳐다보게 되는 거거든요.
K양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그 안에서 받아야 할 위로나 토닥임을, 상대가 영혼 없이라도 해주고 있으니 거기서 해결하려 드는 거고,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나 K양의 생활엔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거거든요. 상대가 밀어내는 법 없이 받아는 주니까, 그냥 그렇게 미지근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며 이도저도 아니게 되고 마는 거예요.
목적지까지는 좀 천천히, 쉬엄쉬엄 가도 돼요. 그런데 꿈쩍도 않고 그냥 앉아 있으면 문제가 될 수 있거든요. K양은 지금까지 계속 다른 곳으로 마음만 도피시켜 이렇게 늦어진 건데, 이 시점에 또 몇 년 허송세월 할 수 없잖아요.
상대와 오래 만났으니 그렇게 만나다 당연히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서른 넘어 헤어지고 보니 돌보지 않아 녹슬고 먼지 쌓인 인간관계들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을 뿐이고, 그런 와중에 상대는 나중에라도 다시 잘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여지나 남기고 있으니, 그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어떻게든 좀 잡고 싶을 수 있어요.
하지만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그 희망 하나만 바라보며 목 빼고 기다리고 있다간, 아무도 보상해 줄 수 없는 시간들을 그냥 흘려보낸 것에 대한 책임을, 또 힘겹게 갚아 나가야 하는 시간들이 찾아올 수 있어요. 그러니 이쯤에서 얼른 제 손 잡고 일어나셔요. 10년 전 얘기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가며, 그땐 그랬었다고 그저 누구에게 호소하고 있는 순간에도, 소중한 시간은 가고 있는 거니까요. 그런 건 칠십 넘어 경로당 가서 해도 되니까, 지금은 얼른 일어나 걷자고요. 어두워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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