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이 보낸 신청서를 읽으며, 난 김양이 ‘프로’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전에도 짝사랑은 해봤지만, 이렇게까지 ‘맞는’느낌은 아니었습니다.”
프로가 확실하다. 짝사랑 아마추어들은 상대를 신격화해서는 종교로 삼는 특징이 있지만, 프로들은 다르다. 프로의 짝사랑은 확실한 근거가 있다. 그게 전부 심증일 뿐이며 흔히들 말하는 도끼병이라는 게 문제긴 하지만, 여하튼 그렇다.
은퇴할 나이가 한참 지났음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프로를, 아니 김양을, 이번에는 꼭 은퇴시킬 수 있도록 오늘 함께 도와보자. 출발.
1. ‘총각직원 대하는 아줌마’의 말투를 지우자.
말을 놓을 거면 놓고, 안 놓을 거면 놓지 말자. 애매하게 존대와 경어를 섞어 쓰면, 총각직원 대하는 아줌마의 말투가 될 수 있다. 김양은 나이도 많지 않은데, 이상하게 아래와 같은 말투를 쓴다.
“어디가? ~하러 안 가요?”
“그게 거기서 해요? 다른 데서 하는 거 아녀?”
“아냐 ㅎㅎㅎ 오늘 재미있었어요.”
“본인은 준비 다 했어요?”
뭐 그냥 애매한 사이라 애매한 말투를 사용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저래버리면 이도저도 아닌 대화만 거듭하게 될 수 있다. 편하게 묻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서로 존대하며 진지하게 대화도 할 수 없는 그런 대화 말이다.
저 ‘이도저도 아닌 존칭법’을 사용하는 까닭에, 김양 스스로도 상대의 질문에
“술”
“13일”
“OK~”
“다?”
“내 말이.”
같은 말로만 대꾸를 하게 된다. 그러니 상대도 그것에 맞게 ‘짧은 대답으로 급하게 마무리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고, 둘의 대화는 평균 11줄, 12줄로 끝나게 된다. 말투 뿐만아니라 대화의 내용에도 문제가 있는데, 이건 아래에서 알아보자.
2. 정말 살 것, 정말 할 것을 물어보자.
질문을 위한 질문을 해버리면, 이후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뿐더러, 계속해서 그러면 ‘이 사람은 그냥 말 걸기 위해 물어보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
“이어폰 뭐 써요?”
-> 상대가 대답해 줬지만, 김양은 그냥 물어 본 거라서 대답만 듣고 말았다.
“***배우기 어려워요?”
-> 상대가 대답해 줬지만,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한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게임 할까 하는데, 헬프 치면 도와줘요.”
-> 상대가 그러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게임은 하지 않아 도움을 요청할 일이 없었다.
이렇게 떡밥을 던져 상대의 입질만 관찰할 게 아니라, 상대에게 다가갈 거면 ‘정말 살 것, 정말 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래야 ‘전에 이야기한 그것’에서 가지를 치는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겠는가. 김양은 그것 대신 ‘질문을 위한 질문’을 만들어서 하는 까닭에, 이제 할 말도 별로 남지 않았거니와, 매번 저렇게 ‘관심 있는 척’만 하고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인식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친해지고 싶지만 방법을 잘 모르기에 계속 그런다는 것, 나도 안다. 나 역시 내게 말을 걸고는 싶지만 이렇다 할 주제가 생각하지 않으니, 노멀로그에 올라오는 글들을 핑계 삼아 말을 거는 분들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유성우 이야기를 하면 유성우 보러 갈 곳 추천해 달라고 하고, 물고기 이야기를 하면 물고기 추천해 달라고 하고, 카메라 이야기를 하면 카메라를 추천해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대화만 할 뿐 아무 것도 하거나 사지 않는 분들 말이다.
어떤 마음에서 그러시는 건지 난 잘 알기에 다 이해하지만, 보통의 썸남에게 그래버리면 나중에 ‘대답을 귀찮아하는 모습’을 보게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길 바란다. 안 살 거 아는데 또 늘 그래왔듯 관심 있는 척 하며 뭘 추천해달라고 하면, 성의 없는 대답을 하게 되는 건 필연적인 일이니 말이다.
3. 제가 관심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요?
짝사랑 중인 대원들의 사연을 읽으며 내가 가장 답답할 때가,
“제가 관심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요?”
라는 이야기와 함께, 자신은 이제 진인사대천명의 태도로 하늘의 뜻이나 기다리겠다는 모습을 보일 때다.
이게 뭐랑 똑같은 거냐면, 중고나라에 누가 병아리 부화기를 올려놓았는데, 그걸 보곤
“부화기 팔렸나요? 택배 되나요?”
라고 묻고는, 아직 안 팔렸으며 택배거래 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은 뒤 가만히 있는 거랑 똑같은 거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할 거라는 의지를 밝혀야 일이 진행되는 건데, 그냥
‘저 질문을 했다는 건 내가 구입할 의사가 있다는 것이며, 또 택배로 사고 싶다는 뜻을 밝힌 거니까, 팔려는 사람이 내게 살 것인지를 되물어와야겠지.’
하는 생각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티를 냈으니 모르진 않을 것이다’라는 것 역시, 그냥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안부인사를 한 것이거나, 동료로서 휴가 잘 보냈냐고 물어본 것이거나, 회사 선후배로서 업무에 대한 조언을 구한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의 기준으로는 ‘누구나 물을 수 있는 것’인데, 그들은 자신이 콕 집어서 상대에게 물었으니 이제 자신의 호감은 모두 들통 난 거고 상대의 판정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위와 같은 생각을 지닌 채로, 이제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에 의미부여를 하며
‘저 행동이 바로, 내가 보인 호감에 대한 대답인 듯.’
이라며 짜 맞추어 가기만 하는 까닭에 나는 더욱 답답해진다. 실제의 일은 0.3%도 함유되지 않은 채, 상상력 99.7%를 가지고 만들어낸 사연이 되기 때문이다. 난 이런 대원들에게, 상상력의 동굴에 들어가 홀로 수천 번 의미를 캐내는 것보다, 밖에서 상대를 만나 밥을 한 번 먹는 게 이십만 배는 더 나은 일이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김양에게도 마찬가지다.
4. 관찰자로 접근하면 ‘극성 시청자’가 될 수 있다.
짝사랑 프로들의 또 다른 공통점 중 하나가, 상대를 관찰하며 얕잡아 본다는 점이다. 서두에서 말했듯 짝사랑 아마추어들의 호감이 맹목적이라면, 프로들은
‘쟤는 저렇게만 안 하면 더 좋을 텐데.’
라는 생각까지를 한다. 김양도 역시나 프로인 까닭에, 심남이에 대해
“일도 잘하고 심지도 괜찮아 보이는데, 사람 상대하는 걸 왜 그리 못하는지….”
라는 평을 하고 있다.
누구나 마음속엔 이데아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그것에 빗대어보며 남을 평하는 건 쉽다. 자신은 관객들로 꽉찬 그라운드에 서면 덜덜 떨려 서 있지도 못하면서 국가대표 축구선수의 헛발질에 대해 혀를 찰 수 있고, 보호장구를 차야 겨우 빙판에 설 수 있으면서 김연아의 기술 실수에 대해 연습부족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다. 뭐 이런 부분들이야 시청자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라는 목적도 겸해서 만든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짝사랑하는 상대에 대해 이러고 있으면 정말 곤란하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정 그러고 싶다면, 겨우 그런 평을 받아야 하는 상대에게 어필도 못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길 바란다. 이게 돼야 공평한 거지, 그러진 못하면서 상대에 대해서만 관찰하며 평을 하고 있으면, 그냥 극성 시청자가 될 수 있다. 자신은 완벽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며 상대의 결점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귀여워하거나, 철이 없다고 하거나, 그 단점까지도 자신이 이해하며 좋아해주는 거라 여기는 괴상한 생각을 할 수 있단 얘기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면, 미저리나 스토커의 분류에 들어가게 된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혹시, 예전에 내가 어느 남성대원의 사연을 소개하며 인용했던 대화를 기억하는가?
남자 – 튕기지 말고, 만나 보자.
여자 – 전 사내연애 할 생각 없어요. ㅠㅠ
남자 – 그러니까 회사 밖에서 만나자는 거 아냐 ㅋㅋㅋ
여자 – 제가 뭐라고 저한테 이러세요 ㅠㅠ
남자 – 그러게. 네가 뭐라고 내가 너한테 이러냐 ㅋㅋㅋ
김양은 여린 마음을 지닌 까닭에 저 대화 속 남자처럼 소름끼치는 멘트를 칠 리는 없겠지만, 지금과 같은 태도로 상대를 관찰하며 평을 하다보면, 속으로는 ‘그래, 쟤가 뭐라고 내가 쟤한테 이러냐.’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정리하자. 우선 말투와 호칭을 정리해야 원활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한 주제’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래버리면, 제가 너무 집요하게 캐묻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요?”
라며 걱정하는 대원들이 종종 있는데, 거의 대부분의 경우 절대 캐묻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상대가 받았을 때 불쾌하거나 불편하지 않을 질문이면 괜찮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예컨대 상대가 휴가시즌에 유럽여행을 다녀왔다면, 가기 전 잘 다녀오라고 나눴던 대화에 이어 “가서 사진 많이 찍었어요?”, “어디는 뭐가 유명하다던데 거기도 보고 온 거예요?”정도로 물으면 된다. 이런 질문은 ‘그냥 직장 동료’인 사람도 거리낌 없이 물을 수 있는 것들이니, 걱정하지 말고 묻길 바란다. 이어서 어디가 제일 좋았는지를 물어도 되고, 다시 가고 싶은지, 가서 꼭 해보길 추천할만한 건 뭐가 있는지를 물어도 좋다.
내부적으로 단속해야 할 것들은 따로 요약하지 않아도 무슨 얘긴지 김양이 잘 알 것 같고, 김양과 상대의 경우 현재 상대가 김양이 속해있는 부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비밀완전보장’을 내세우며 부서 이전에 대한 은밀한 정보제공을 구실로 밖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면 상대는 부서 이전을 생각하며 김양과의 친분도 두텁게 하려고 하는 중인데, 이걸 김양이 ‘얘가 날 좋아하나?’라는 도끼병으로 받은 채 상대의 입질만 확인하려 드는 까닭에 가까워지질 않고 있다.
일단 ‘좋은 정보원’이 되면, 회사에서 둘이 눈빛교환만으로도 ‘둘만 아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으니,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보길 권한다. 진작 여기로 들어갔으면 지금쯤
김양 – 통신보안. 미용실 간다고 일찍 나가면서 3번 출구 앞으로.
상대 – OK. 정확히 10분에 일어서겠음.
김양 – 롸져.
라며 놀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습은 내가 도와줄 테니, 상상과 의미부여와 평가는 그만하고 밖에서 만날 약속을 잡길 바란다. 그렇게 약속을 잡아야 뭐가 되어도 되는 거지, 지금처럼 실제로는 하지도 않을 거 뭘 자꾸 추천해달란 이야기만 하다가는 그냥 계속 그 상태일 수 있다. 일부러 발 밟은 뒤에 발 밟아서 미안하니 전어 사겠다고 해도 되니, 저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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