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의 주인공인 P씨에게, 문제를 먼저 하나 내볼까 한다.
- 지금 P씨가 연락 중인 여자 분이 키우는 강아지 종류와 이름은?
두 사람은 분명 저것에 대해 대화를 나눴지만, 아마 P씨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카톡을 다시 확인하면 종류와 이름을 알아낼 수 있겠지만, 어느 종의 강아지 이름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지 않았기에 각각의 정확한 이름은 댈 수 없을 것이다.
저게 P씨의 첫 번째 문제다. P씨는 나이도 꽤 있는 까닭에 누군가와 대화하는 걸 어려워하진 않는데, 실제로는 상대에 대한 별 관심이 없이 ‘질문을 위한 질문’을 반복해 대화를 이어가는 까닭에 제대로 알게 되는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다. 두 사람은 ‘쉴 때 뭘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는데, 난 P씨가 상대가 쉴 때 주로 뭘 한다고 했는지도 잘 기억 못하리라 생각한다. 그건 다음 질문인
“그럼 언제 쉬세요? 주말에도 일하시는 거예요?”
라는 질문을 위한 포석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1. ‘직원구함’의 느낌.
보통의 썸남썸녀가 상대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을 기반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하는 것과 달리, P씨는 상대가 자신의 여자친구로서 적절한 사람인지를 평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 대 사람으로 친해지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상대가 ‘여자친구’라는 직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인지 면접 보는 느낌이랄까.
상대에게 묻는 질문들 역시
“일하고 계신데 방해된 건 아닌가요? 카톡하기 괜찮아요?”
“쉬실 때 뭐 하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안 불편하시면 한 번 얼굴 뵙고 얘기 나눠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등으로 엄청난 거리감이 느껴지며, 상대에게 바라는 것 역시
“저 같은 경우 가족 같이 지내는 친구들이 있다 보니 친구들과 연인의 관계 또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친구들과)같이 여행도 자주 가는 편이고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같이 어울리는 편이라 그런 걸 함께 즐길 수 있는 분이라면 좋겠단 생각을 자주 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
물론 그 정도의 희망사항을 갖는다고 크게 문제될 건 없으며 상대와 꼭 세상에서 가장 친해져야만 연애나 결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상대와 내가 살 마음의 방을 함께 꾸미는 대신 그걸 혼자 다 꾸며 놓고는 거기에 상대가 앉을 의자 하나 정도를 놓아줄 뿐이라면, 남은 반평생을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겠다며 들어올 사람을 구하는 건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일반적으로 연애의 태동기에 볼 수 있는 건 ‘구인’이 아닌 ‘구애’다. 하지만 P씨는 전자에만 집중할 뿐이었고, 그러다 보니 서울 올라가면 보자고 말만 꺼내 놓고는 정확한 날짜도 잡지 않았다. 언제든 한 시간이면 그녀가 사는 곳 근처까지 가서 볼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안 한 것이다. 난 P씨가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면, 카톡대화 하다 P씨가
“사실 한 시간 정도면 서울 가긴 하는데, 아무래도 평일에는 안 가게 되더라고요.”
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녀가 ‘이건 뭐야? 오늘이라도 올 수 있지만 귀찮아서 안 온다는 거잖아?’라는 표정을 짓는 걸 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2. 논리적? 이성적?
P씨의 경우, 서로의 조건과 사정에 대해서는 이미 계산을 다 끝내고 답까지 구해 놨지만, 인간적인 친밀함을 맺는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답답해하는 지점 역시, 지금의 상대와 친해지는 방법이 아닌
“이분과 잘 되지 않더라도 앞으로 누군가를 만날 때 주의해야 할 점등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라는 지점일 뿐이다. 게다가 결정사의 매칭으로 만난 상대에 대해서도
“저 말고도 여러 명과 매칭을 하셨겠죠. 그 중 또 여러 명과 대화를 하고 계실 수 있고요.”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계산적인 거다. 확실한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곳에 마음 많이 할애하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먼저 뭔가를 베풀고 호감을 표현하기보다는 ‘되면 한다’의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래버리면, P씨가 상대와 하려는 건 ‘연애’가 아닌 ‘거래’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난 얼마 전 노멀로그에 달린 한 독자 분의
“저희 어머니 아버지, 딱 저런 마음으로 결혼하셨는데 잘 사시더이다. 죽고 못 사는 건 아니지만 당신 정도면 같이 사는 데 나쁘지 않겠다. 그 정도 마음이셨는데 그래도 애도 둘씩이나 낳고...평화로운 결혼생활을 유지하셨죠.
그런데 그러려면 두 분 다 성향이 맞아야 하고, 무엇보다 엄청나게 강한 책임감이 있어야 해요. 저희 아버지는 저희 어머니를 그렇게까지 엄청나게 사랑해서 죽고 못 사는 사랑꾼은 아니지만, 내 가정에 대한 책임감 하나는 확실하신 분이셨어요. 그래서 어머니 돌아가시는 날까지 밤을 새서 간호하고, 20대 청년백수 남매 먹여살리시며 취준비용 대 주시는...물론 그래도 전형적인 옛날 할아버지라서 말씀은 조금 투박하게 하시더이다.”
라는 댓글 때문에 좀 마음에 걸리긴 하는데, 그래도 저 댓글에 나오는 관계는 최소한 ‘동업’이지, 들러리를 구하는 형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P씨가 상대를 여러 카드 중 하나로 생각하며 그저 만지작거리다 수틀리면 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면, 그걸 상대도 결코 모르진 않을 거란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3. 대화하는 게 불편하고 감도 잘 안 잡힙니다.
그건, 앞서 말했듯 P씨가 이 관계에 별로 마음을 할애하고 있지 않으며, 상대에 대해 이렇다 할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P씨는 얼른 상대와 만나본 후 스파크가 튀는지 안 튀는지를 알아보려 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두 사람의 대화는 빙빙 돌며 안부나 좀 묻다가 직거래 약속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대화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P씨가 스스로도 아무 흥미를 못 느끼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상대는 반드시 지루해 진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만약 P씨와 내가 대화를 하게 된다면 P씨는 내게 십중팔구
“글 쓰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라는 질문을 할 것 같은데, 저런 질문을 받는 사람 입장에선 질문이 좀 막연하기도 한 데다, 어차피 대답 역시 막연하게 해야 하는 까닭에 대화를 했다는 느낌이 들질 않을 수 있다. 그냥 의무적으로 묻고, 역시나 그냥 의무적으로 대답해야 하는 일의 반복이지 않은가.
P씨와 내가 오늘 만나 대화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마 서로의 집이 어딘지, 전공이 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서 태어나 어디서 살았는지, 군복무를 어디서 했는지, 혹시 어제 이러이러한 뉴스를 봤는지, 커피는 마시는지, 밥은 먹었는지 등에 대해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이성과의 대화도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나누면 되니, ‘또 뭘 물어봐야 하나?’를 떠올리려 노력하기보단 방금 나온 대화에서 연관된 질문을 하며 부담 없이 이야기를 나눠보길 권한다.
그리고 카톡으로만 띄엄띄엄 이야기를 나눌 게 아니라, 전화통화도 해보고, 또 만날 생각이 있는 거면 추진력을 발휘해 얼른 약속을 잡아야 한다. 수박 겉핥기식의 이야기를 반복하다
“근데 우리 얼굴도 못 봤는데 깊은 얘기하는 거 좀 어색하지 않아요?”
라며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면, 내가 상대라고 해도 “아, 네…. 뭐, 좀….”이라는 말 말고는 대답할 게 없을 것 같다. 오래 전부터 매뉴얼을 통해 이야기 해오고 있듯,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친척 여동생에게 내가 아는 한국의 장소들과 음식들을 소개해 준다는 생각으로 상대를 대하면, 보다 편하게 만나고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오늘 준비한 얘기는 여기까지다. 이제 또 하룻밤만 자면 불금이니, 불금맞이 준비 잘 하시길 바란다. 다들 즐거운 목요일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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