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난, 다시 고백해도 결과는 똑같을 거라 생각한다. 성호씨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경악하는 방법으로 고백을 하며, 눈치가 많이 부족하고, 말을 꺼냈다가도 결과가 좋지 않을 것 같으면 장난으로 한 말인 듯 태도를 바꾸며, 혼자 선문답 같은 걸 던져 놓고는 상대가 못 알아들으면 밑도 끝도 없이 혼자 실망해 버린다.
총체적 난국인 상황이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를 해야 좋을지 나도 개념이 잘 안 서는데,
- 성호씨의 상상이 만드는 조급증.
- 혼자 기대하고 실망하는 걸 생중계 하는 문제.
-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하고는 상대를 탓하는 문제.
정도를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출발해 보자.
1. 성호씨의 상상이 만드는 조급증.
그러니까 아직 둘이 같이 영화 한 편도 안 봤는데, 이런 상황에서
“진짜 얘랑은 결혼 하고 싶다고 많은 생각을 했고….”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답이 없어질 수 있다. 만나보며 서로에 대해 좀 알고 경험하며 그것에 맞춰 하나씩 풀어 나가야지, 고백도 하기 전에 성호씨 혼자 ‘결혼’까지 생각하며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있으면 기대대로 안 되는 것들이 모두 실망으로 치환될 수 있으며, 성호씨는 얼른 가까워져서 결혼할 거란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현실에선 고백부터 막히니 마음만 급해지게 될 수 있다.
게다가 성호씨는 상대의
-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며,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활발한 성격.
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상대의 이미지를 만들었는데, 이러다 보니 상상과 현실에서의 상대의 차이는 보다 커지고 말았다. 성호씨 상상 속 상대는 성호씨가 “지금 너 만나러 도서관으로 갈까?”라는 이야기를 하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여자였는데, 현실의 상대는
“오지마시라니까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 여자였던 것이다.
이러니 성호씨의 모든 기대는 실망이 되고, 마음은 더욱 더 급해지고 만다. 지난여름만 해도 둘이 아이스크림 먹는 건 일도 아니었는데, 성호씨가 저런 상상에 빠져든 까닭에 이젠 계속 관심과 확인을 구걸하거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한 뒤 그걸 상대가 부정해주길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 모습에 부담을 느낀 상대는 성호씨를 밀어낸 상태고 말이다.
사실 지금, 둘의 관계가 완전히 엉망인 것은 아니다. 여전히 친절하고 상냥한 상대는, 보통의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인내심의 두 배 정도를 발휘해 성호씨를 달래고 있다. 그러면 이제라도 얼른 성호씨가 정신을 차리고 상상을 내려둔 채 현실의 상대와 만나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성호씨는
- 지금 나에게 이 관계는, 친한 오빠동생만도 못한 관계.
라는 생각만 하며 구덩이를 파고 있다. 거기 들어가서 혼자 고립되어 있다가, 상대가 다가와 “오빠, 뭐해요?”라고 말하면, “너 나랑 안 사귈 거잖아. 저리 가.”라고 말하듯 밀어내는 걸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난 성호씨에게, 이 슬프고도 바보스러운 일부터 그만 둬야 한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2. 혼자 기대하고 실망하는 걸 생중계 하는 문제.
결정을 잘 못 내리는 건 우유부단한 것이다. 그런데, 결정을 잘 못 내릴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상대에게 확인만을 구하려 하는 것, 나아가 상대가 확인을 해줘도 반대의 이야기를 꺼내 다시 한 번 상대를 더 떠보려 하는 건 찌질한 것이다.
성호씨가 상대에게 ‘널 보러 도서관으로 가겠다’고 한 날의 대화를 보자.
성호 – 좀 이따 보러 갈게
상대 – 안 되는데요.
성호 – 왜요.
상대 – 저 머리까지 묶고 있어요 지금 ㅋㅋㅋ 극혐
성호 – 쌩얼도 봤는데 뭐 ㅎㅎㅎ
상대 – 왜 오려고 해요
성호 – 보고 싶어서요!
(중략)
상대 – 맘대로 하세요.
성호 – 어떡해야 되지. 진짜 오지 말라 건가….
상대 – 네! 오지 마세요!
성호 – 네.... 안 갈게요 그럼.. ㅠㅠ
(중략)
성호 – 갈 거니까 나오세요.
상대 – 예예 그러세요.
성호 – 진짜 나올 거야?
상대 – 하 진짜 싸우자는 거예요?
(중략)
성호 – 오지 말라는데 내가 가고 싶다고 가는 건 아닌 것 같네
상대 – ㅋㅋㅋㅋ 그럼 그냥 안 오면 되잖아요.
성호 – 그래서 안 가잖아요.
믿기지 않겠지만, 저 대화는 세 시간 넘게 이루어졌다. 카톡대화를 보던 나는 답답해져서, 성호씨가 옆에 있다면 머리를 세게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보러 갈 건지 안 갈 건지를 결정도 못 하는 이런 남자와 연애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상대가 오지 말라고 하면 자긴 계속 갈 거라고 말하고, 그러다 상대가 오라고 하면 내가 오는 거 별로 안 반기는 것 같아서 가지 말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그런 지겨운 대화를 몇 시간 하다가 상대가
“아 진짜 왕 우유부단. 핵 우유부단.”
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거기에 또 팩 토라져서는
“내가 진짜 큰 잘못한 건가... 다음부터는 간다고 말 안 할게...”
라는 이야기를 하는 남자. 성호씨는 저러는 와중에 상대가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성호씨가 꺼낸 부정적인 말을 부정해주면 거기에서 약간의 희망을 보며 즐거웠을지 모르지만, 그러는 동안 상대의 피로는 축적되며 성호씨에 대한 짜증을 키우게 될 뿐이라는 걸 꼭 기억해뒀으면 한다.
3.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하고는 상대를 탓하는 문제.
명료하게 직접 말하기에는 자신이 없기에, 좀 돌려 말할 순 있다. 하지만 돌려 말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혼자만의 의미를 가득 담아 상대는 알아듣지도 못할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건 분명 문제가 된다.
성호씨가 한 말을 보자.
“그 뭐지? 언중유골이니까.”
한문시간도 아닌데 그게 대체 뭘 어쩌라는 얘기인가? 성호씨는 내가 만약 지금 이 글에
“성호씨가 한 고백은 저 마당에 있는 잣나무와 같습니다.”
라며 큰스님처럼 이야기하면, 무슨 얘긴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무슨 소린지 모르니
“잣나무요? 잣될 거란 얘긴가요?”
라는 이야기밖에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성호씨는 특히 자신의 새각을 명확하게 밝혀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대답은 안 하고 괴상하게 상대탓을 한다. 성호씨가 상대에게 한 말을 보자.
“내가 전에도 말했는데…. 난 막 티를 안 낸다고.”
“내가 장난처럼 하는 얘기에 진심이 담겨 있다고 말해줬었는데….”
“캐치를 못하고 날 오해 하네….”
이렇게까지 멀리 빙빙 돌아가선 안 된다. 그리고 아무리 빙빙 돌아가더라도 맞으면 맞다, 아니면 아니다 라는 건 명확하게 밝혀줘야지, 이도저도 아니게 대답해 놓고는 상대의 대답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해선 안 된다. 그건 늘 얘기하지만 성호씨를 정당화하고자 상대를 바보로 만드는 일이며, 나쁘게 보자면 상대를 기만하는 일이기도 하다. 말을 해 놓고도 어떤 건 장난이라며 넘어가고, 어떤 건 장난처럼 말했지만 진심이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면, 상대는 성호씨라는 사람을 결코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성호씨 사연의 하이라이트는, ‘카톡으로 고백’을 하는 부분이었다. 성호씨가 카톡을 편집한 후 보낸 까닭에 알 수 없는 문맥이 있기도 한데, 여하튼 성호씨가 한 고백은 최악이었으며, 이후의 대처 역시 끔찍했다.
상대 – 저 좋아하는 거예요?
성호 – 뭐라는 거지?
상대 – 진심 나 좋아하는 줄 알았잖아요.
성호 – 촉이 좋네.
(중략)
성호 – 좋아하든 아니든 그것도 내 마음인데?
상대 – 네 그러세요~
성호 – 어차피 생각은 안 바뀔 거잖아?
성호 –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는 거 아닌가?
(중략)
성호 – 상대방이 어떤지 확실히 알아야 고백을 하든 말든 하지.
쓸데없는 얘기가 너무 많이 포함된 까닭에 대화문을 그대로 옮기기가 불가능한데, 최대한 덜어내고 또 덜어낸 뒤 옮기면 위와 같다. 열심히 덜어내 봐야 그래도 남는 건 ‘떠보기’밖에 없지만 말이다.
이처럼 고백에 긍정적인 답을 못 들을 것 같을 때 갑자기 상대에게 심술을 부린다든가, ‘확실하게 고백’을 하는 시점과 방법에 대해 상대에게 빙빙 돌려가며 묻고 있으면 방법이 없는 거다. 단호하게 말하자면 이건 절대 조심스럽거나 순수한 게 아니라 그냥 찌질하고 비겁한 것이니, 앞으로 다시는 이런 ‘숨어서 돌 던지고 반응 보는 행동’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성호씨의 어떤 매력을 상대에게 보여줬는가는 접어두고서라도, 위와 같은 문제들이 있었기에 상대는 성호씨를 신뢰할 수 없었으며 알아갈수록 부담만 늘어갔던 것이다. 때문에 난 성호씨가
“거절당한 건 확실한데, 정말 호감도 전혀 없는 걸까요?”
“한 번은 이렇게 됐어도, 시간 지나고 세 번까지 고백해 보려고 하는데요.”
“한 번 더 고백이라도 해보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라며 한 질문들에,
“성호야. 형 봐봐. 형 쳐다 봐. 밥 먹었어? 안 먹었지? 형이랑 밥 먹으러 가자. 국밥 뜨끈하게 한 그릇 먹고, 다시 잘 살아보는 거야. 알았지? 어깨 펴고.”
라는 대답 정도만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성호씨는 세 번은 채워서 고백을 해보겠다고 했는데, 이미 ‘떠보기’를 통해 실질적으론 열 번 이상의 고백을 한 것과 같으니, 그 결과를 부정하지 말고 상대의 선택을 존중했으면 한다. 우긴다고 될 일이 아니니, 이번 경험은 수업료 지불 한 셈 치며 또 한 페이지 넘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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