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의 주인공인 C양은 이미
“제가 말한 것들은(앞서 다른 남자들과 남친을 비교한 것),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그런 게 아니에요. 팩트예요. 이게 중요해요. 그래서 ‘더 멋지고 더 재미있는 사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누가 봐도 킹카다 싶으면, 그 분 여자친구 분이 막 부럽더라고요.”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남친의 한계를 정해놓고는 그게 ‘팩트’인 이유에 대해 열심히 할 정도면, C양의 마음은 이별 쪽으로 8할 이상 기운 것 같다. 이런 와중에 C양은
“그런데 왜 못 헤어지고 있냐고요? 지금의 남친 같은 남자 또 못 만날 걸 저도 알거든요. 정말 제게 다정하고 헌신적이에요. 저를 이만큼 사랑해주는 남자 또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 지금의 남친 하나만 만나면 다른 사람 안 만나본 것에 대해 저 역시 평생 후회를 할 것 같고….”
라며 내게 조언을 구하고 있는데, 난 어느 선택을 하든 C양에겐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가 남으리라 생각한다. 남친과 계속 그냥 길게 만나볼 걸 하는 후회가 들 수 있고, 또는 진작 헤어지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볼 걸 하는 후회가 들 수도 있다.
더군다나 C양은 남친에 대한 극단적인 장점과 단점만 사연 신청서에 적었는데, 그것만 보고는 내가 C양의 남친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때문에 이번 매뉴얼에선, C양이 이런 고민을 하게 된 이유와 이별을 선택하기 전 되돌아봐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출발해 보자.
1. 연애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연애.
남친이라는 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껴서 시작한 게 아니라, 연애가 하고 싶었는데 마침 ‘사귈 수 있는 사람’으로써 그가 옆에 존재했기에 사귄 것이, C양이 이 고민을 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C양은
“솔직히 그때는 제게 약간의 정복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연락하던 이성들 모두에게 최선을 다했거든요. 제가 여자로서 매력이 있는지 없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라고 내게 말했는데, 그런 생각을 가진 채로도 C양은 2년 가까이 연애를 해왔다. 딱 그 정도의 마음으로 시작한 연애이기에 C양은 계속해서 남친의 부족함과 그에 대한 불만을 느꼈지만,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접어둔 채 ‘불만 하나하나 지적하기’를 했을 뿐이고, 남친은 그걸 또 다 받아주며 C양에게 맞추려 했기에 연애가 지속된 것이다.
C양이 남친에게 교정을 요구했던 것들은
- 행동에 대한 불만.
- 생활습관에 대한 불만.
- 말투에 대한 불만.
- 대화주제에 대한 불만.
- 스타일에 대한 불만.
- 스킨십에 대한 불만.
등으로, 사실 저걸 다 고치느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훨씬 쉽고 빠른 일일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C양 남친은 ‘을’의 입장에서 전부 수용하며 C양을 만났고, C양 역시 남친을 보면 사랑이나 설렘보다 미움이 먼저 느껴지는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그렇게까지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친을 보며 애정이 약간 생기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이 연애에 정말 그냥 이게 전부인 것 같다면, 난 C양이 이별을 택하는 것에 찬성하고 싶다. 그건 이 연애가 지속될 수 있는 기한은 ‘남친이 맞춰주는 그 날까지’일 가능성이 높으며, ‘내게 다 맞춰준다’는 것을 제외하곤 C양이 느끼는 남친의 매력이 없기에 근본적인 불만족이 충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래버리면 남친은 끝도 없이 C양의 요구를 들어주며 맞춰가야 하고, C양은 남친이 C양을 업고 다닌다 해도 그냥 싫을 수 있기에, 이쯤에서 헤어지는 것이 둘 모두에게 나은 선택이 될 거라 난 생각한다.
2. 솔직한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답.
C양이 ‘댓글로 비난 받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이기적인 것 같지만 아무튼 고민되는 부분들을 여과 없이 적어 보낸다’고 했기에 나도 거기에 맞춰 솔직히 이야기를 좀 할까 한다.
우선, H양이 남친의 호의와 애정과 헌신을 받고 있는 건, H양이라서가 아니라 현재 H양의 남친이 ‘그 사람’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보통 헌신을 받는 쪽에서는
- 지금 만나는 사람과 헤어질 경우, 다른 사람에게도 이 정도의 헌신은 기본으로 받으면서 ‘플러스 알파’까지 얻게 될 것.
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뒤늦게야 그게 오로지 ‘나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라서’ 가능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돌아가려 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그때는 이미 상대에게 이쪽에 대한 배신감도 생긴데다 이별을 통해 연애에 대한 환상도 좀 깨진 상태라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는 시구를 읊게 되기도 한다.
또, C양은
“막말로 남친이 지금 제 주위 남자들만큼만 되어도 이런 욕심은 안들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 주위 남자들이 막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평범하지만 매너와 센스 좀 좋은 그런 남자들이거든요.”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런 ‘다른 남자들의 장점’으로 보이는 모습들이, ‘아는 사이로 지낼 때에만 볼 수 있는 모습’이라는 걸 깨닫거나, ‘뭐뭐값 한다’는 걸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을 겪으며 배우게 될 수 있다.
이성의 매너나 위트, 그리고 패션센스 같은 것이, 오로지 ‘내 여자친구에게만 제공되기 위해’서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을 모두 갖춘 반짝반짝한 사람을 골라 사귀기만 하면 되는 거라면 나도 참 말하기가 편할 텐데, 그런 것들은 대개 만인에게 제공되기 위해 길러지거나 그간의 경험을 통해 습득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C양에게 남친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가온다면, 그게 무조건 원헌드레드퍼센트 C양의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의 정복욕이나 C양에게서 보이는 틈새 때문일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해뒀으면 한다.
물론 C양이 바라는 대로 ‘남친보다 더 괜찮은 남자’를 절대 못 만나게 될 거란 건 아니지만, 그게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고 쉬운 일은 아니란 얘기다. 지금이야 C양이 속된말로 ‘배부른’ 상황에 처해있으니 남친만 바뀌면 더 행복해 질 거라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남친을 바꿨는데 그가 C양과 사귄 건 C양이 현남친을 사귈 때처럼 정복욕과 호기심, 그리고 당장 사귀자고 하면 사귈 가능성이 높다는 것 때문이며, 이후 그가 몇 달 사귀다 ‘더 나은 여자’를 만나야겠다며 헤어지자고 하면 C양은 무너지지 않겠는가.
이게, 지금 C양이 생각하는 것처럼
- ‘헌신’을 포기하고 ‘매너와 센스’를 택한다.
정도로 같은 차종의 승용차에 옵션 빼거나 추가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소형차에서 외발자전거로 갈아타게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누군가에 대한 판단은 반드시 어느 정도 겪어 본 뒤 하길 권한다. 오늘 당장 C양에게 갈비 먹으러 가자고 하고 가서는 갈비 굽고 잘라준다고 배려심 많고 젠틀하며 헌신할 것이 보장된 사람인 게 아니라는 걸, 꼭 기억해 두길 권한다.
3. C양이 내 여동생이라면 해주고 싶은 말들.
시인 나태주의 <풀꽃>이란 시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라는 시구가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보다’는 당연히 ‘Look at’이거나 ‘Watch’일 텐데, C양의 경우엔 C양의 ‘보다’가 ‘See’에 가깝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냥 감각기관인 눈을 통해 시선이 닿은 곳을 바라보는 것. 때문에 백 번을 보아도 나중에 거기 무엇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없는 것. C양이 자신의 연애와 연인을 바라보는 모습이 대략 그렇다.
이번 연애를 끝내고 새로운 사람과 사귀는 것으로 C양이 ‘See’ 대신 ‘Watch’를 할 수 있는 거라면, 난 머뭇거릴 것도 없이 C양에게 새로운 연애를 권하겠다. 하지만 C양이 현재 연애에 임하고 있는 태도, 그리고 새로운 연애를 하게 될 때 누리게 될 즐거움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운이 좋아 새로운 상대 역시 C양에게 헌신한다 해도 그가 익숙해질 때쯤 C양은 권태를 느끼며 다시 ‘다른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할 가능성이 높다.
C양이 한 말들을 보자.
“저는 누군가와 자주 웃고 떠들지 않으면 삶이 우울해집니다.”
“(남친과는)한 사람하고만 너무 많은 시간을 노는 데 보내서인지 허무했습니다.”
“결혼상대로 괜찮은 사람을 너무 일찍 만났다는 말 있잖아요.”
C양은 자신의 삶에 대해 심심하다거나, 외롭다거나, 우울하다는 생각을 가진 채 외부의 무언가가 즐거움을 주길 바란다. 그러면서 외부에서 오는 즐거움에 내성이 생길 경우, 다시 또 ‘새로운 즐거움’을 갈망하게 되고 말이다.
이러한 C양의 태도를 ‘거주’에 비유하자면, C양은 자신이 살 집을 정해 그곳에 이사한 후 집을 꾸며가며 애정을 갖는 게 아니라, 누가 초대한 곳에 가서 그곳이 지겨워질 때까지 머무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주민’이 아닌 ‘여행객’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며, 지루함이나 권태가 느껴지면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고 만다.
또, C양은 지금 그저 ‘결혼상대로 괜찮은 사람을 너무 일찍 만난 것 같다’는 뉘앙스의 말을 편하게 하고 있지만, 난 솔직히 이대로라면 C양과 현남친의 연애가 길게 갈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둘 중 한 사람만 일방적으로 맞춰가야 하는 관계에선, 맞춰가던 쪽이 지치게 되는 게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결혼으로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거라면 ‘결혼상대로 괜찮은 사람’과 결혼만 하면 될 일이겠지만, 그렇게 결혼했다 훗날 상대에게 ‘반드시 이혼해야 할 사람’으로 분류되는 일도 현실에선 벌어지고 있다는 걸 기억해뒀으면 한다. 현재 내 주위에도 결혼해서 4년을 살았고 애도 있는데,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 나도 내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다’며 이혼을 준비하는 지인이 있다.
난 그의 아내에게 지금은 더 이상 ‘갑’의 입장에서 위협하는 게 안 먹힌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자신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지만 어떻게 해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할 수 있는지를 몰라 계속 헛발질만 반복하고 있다. 그녀는 잠시 지는 척 하다가 결국 폭발해선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고 말 뿐인데, 안 해봐서 모른 채 살면 이런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연애중임에도 불구하고 데이트 정도만 즐길 뿐 ‘우리’로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오래 만난다 해도 결국 상대는 ‘너’일 뿐이고, 이쪽은 ‘나’의 입장에서 이 연애를 지속하는 것에 손익을 따지거나 내가 만족할 수 있는가 아닌가만 생각해보게 된다. 그저 그만큼의 의미밖에 두질 않기에 집중하기도 어렵고, 집중하기 어려우니 결과 역시 만족스럽지 못하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니 내가 상대를 덜 좋아해서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고,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또 그저 그만큼의 의미밖에 두질 않는 일이 반복되고 만다.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절대 헤어지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며, 그 연애에서 밝은 비전보다는 암울한 미래만 보일 뿐이라면 돌아 나오는 게 맞다. 하지만 연애란 상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맛보기만 하는 게 아니며, 이쪽에서 별 노력도 하지 않았다면 그 연애가 그저 그런 건 이쪽에게도 절반의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팔짱낀 채 ‘되면 한다’의 마음으로 연애를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닌지, 그러다 결국 결과가 좋지 않자 ‘되는 사람’을 찾겠다며 다시 새로운 사람을 찾는 건 아닌지, 이 부분도 한 번 곰곰이 생각해봤으면 한다.
난 연초부터 노로바이러스 감염으로 의심되는 증상 때문에 며칠 방바닥을 뒹굴었다. 느낌은 설사인데 모양은 설사가 아니기도 했고(응?), 또 몸은 아픈데 열은 나지 않아 그저 체했거나 위염을 앓게 된 줄 알았다. 며칠간 간헐적으로 누군가 배를 쥐어짜는 것 같은 복통을 견뎌내고 나니 이제 좀 멀쩡해졌는데, 지인이 노로바이러스 판정을 받았다고 해서 검색해보니 내가 겪은 증상과 동일했다. 이게 굉장히 더러우면서 짜증나게 아픈 바이러스니, 노멀로그 독자 분들은 조심히 피해가시길 기도하겠다. 앓느라 인사가 많이 늦어버렸지만,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 공감과 추천, 댓글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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