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하다보니 이게 벌써 10년 전의 일이라는 것에 잠깐 놀랐는데, 아무튼 10년 전 알고 지내던 내 친구 중 하나의 연애방식에 놀란 적이 있다. 그는 나를 포함한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여자친구에게 전화가 오자
“안 받아도 돼.”
라며 무음으로 바꿔놓았고, 이후 2차로 노래방까지 가서 실컷 놀고 난 뒤에는 그제야 여자친구에게 연락해
“내가 친구 만날 때 전화하지 말랬지? 난 분명히 말했는데 네가 어긴 거야.”
라며 완전한 갑질을 하기도 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이거 좀 진짜 나쁜 놈인데?’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 사이에선 오히려 그가 외로움을 많이 타며 자꾸 모일 약속을 잡으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연애에서는 정반대로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여친에게 ‘갑질’을 하고 있다는 게 강한 인상으로 내게 남아있다.
오늘 다룰 세 편의 사연이 모두 저런 ‘을의 연애’를 하고 있는 여성대원들의 사연들인지라 난 저 친구를 떠올리게 되었다. 물론 사연 주인공들의 나이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고 연애 형태도 다 다르긴 하지만, 그녀들의 남친이 ‘아니면 말든가’의 태도를 보이며 얼굴에 조소를 띄고 있다는 것은 거의 같다. 이 대원들의 사연, 하나씩 살펴보자.
1. 친구 많고, 친구 만나면 연락 두절되는 남친.
남친이 친구들 만나 정말 건전하게 놀고 안 놀고를 떠나서,
“내가 친구 만날 때는 좀 가만히 있어라. 너도 그냥 너 할 거 하면 되는데 왜 못살게 구냐. 난 네가 닦달해서 더 연락 안 했던 거다. 그만 말해라. 싫은 소리 할 거면 그냥 연락을 하지 마라.”
따위의 이야기를 한다면, 이 연애는 지속할 이유가 없는 거다. 또, 난 A양과 남친의 아래 대화를 보며 이건 반드시 끝나야 하는 연애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A양 – 지금 뭐하는데? 나 8시간 째 연락 기다린 거 몰라?
남친 – 이왕 기다린 거 더 기다려봐.
A양 – 뭐하냐고.
A양 – 전화 받아.
A양 – 받으라고.
(이후 A양이 친구에게 부탁해 친구 전화로 연락했을 때에야 남친과 통화할 수 있었음.)
저건 연인 사이에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싸움이라기보다는 남친의 갑질에 A양이 휘둘리는 것에 더 가깝다. 연락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이왕 기다린 거 더 기다려봐.”라는 이야기를 하는 건 일부러 골탕 먹이는 것 아닌가.
A양 – 연인 사이에 이렇게 의도적으로 연락 씹는 건 예의가 아니지.
남친 – 닦달도 예의가 아닌데?
A양 – 그래서 일부러 연락 씹은 게 잘 한 거라고?
남친 – 네가 닦달을 안 하면 되잖아.
(중략)
A양 – 그럼 헤어지고 편하게 살면 되겠네.
남친 – 아 그러든가.
위와 같이 ‘남친이 친구들을 만나는’ 순간에만 갈등이 생기고 이후에는 둘 사이에 달달한 애정이 보이는 거라면 뭐 어떻게든 바로잡아보려 애쓰는 게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아주 냉정하게 말하자면 평소에도 두 사람 사이엔 ‘농담과 웃음’이 있는 거지 이렇다 할 애정이 있는 건 아니다. A양이 구구절절 남친에게 하소연을 하고 부탁을 해봐야 그건 다 무시되고, 다음 날 그냥 남친이 ‘굿모닝’ 정도로 말을 걸어 A양이 빵빵 터질만한 이야기를 하면 웃고 떠들다가, 다시 또 위와 같은 갈등이 반복될 뿐이다.
난 A양 남친이 A양을 찡찡거리고 집착하게 만들어 놓고는, 아주 연이 끊어지지는 않게 또
“나 기절.(이후 연락 없음)”
“나감.(이후 연락 없음)”
등으로 미끼만 던지는 게 참 괘씸하다. 그는 ‘나도 내 시간이 필요하다’며 만나는 빈도도 한 달에 두 번 정도로 줄였는데, 난 이런 연애를 계속 유지하는 건 시간과 감정과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한다. A양은 남친의 휘두름에 다급해지고 약이 올라 계속 더 매달리려 하는데, 잠시 멈춰 모든 기대와 욕심을 다 내려놓고, 이 연애를 지속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A양은 너무 괴로운 나머지 남친에게
“네가 이러이러한 거라면(애정이 없는 거라면), 그냥 칼 같이 잘라줘.”
라는 하소연까지 하던데, 그는 자신이 완전히 갑이 된 이 관계를 깨뜨릴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A양이 굳게 마음먹고 정리 했으면 한다.
2. 아니 이건 의심할 여지가 많은 게 아니라….
겉으로야 남친이 사과하고 매달리니 그가 ‘을’인 것 같겠지만, 사실 이건 그렇게 보이도록 설계해 놓고는 그가 즐길 것 다 즐기고, 할 거 다 하는 거라고 할 수 있다.
S양은 이게 자신의 첫 연애인 까닭에 ‘남들의 연애도 이런지’를 내게 묻기도 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연애가 케바케라고 해도, 도박과 여자와 거짓말이 이렇게 도처에 널려 있는 연애는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장수하늘소만큼이나 보기 어렵다.
호기심, 충동적 실수 같은 것도 한 번일 때에야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 줄 수 있는 거지, 이건 그냥 혹시나 해서 까보면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지 않는가.
- 남친 폰에 소개팅 어플 깔린 거 걸려서 지웠는데, 얼마 뒤 또 깔려 있음.
- 카지노 간 거 알고 실망할까봐 거짓말 한 거라고 한 번 변명하고, 이후엔 또 카드놀이 한 거 걸려서 실망할까봐 거짓말 한 거라며 변명함.
- 숙박업소 예약 어플을 보니 지난 주 지지난 주에 예약했던 기록이 나옴. 알고 지내던 여자와 충동적으로 실수한 거라고 함.
- 주머니에 있는 영수증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서 누가 봐도 여자와 데이트하고 영화 본 영수증이 나옴. 친구 영수증이 딸려온 것 같다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함.
혹시나 해서 열어보면 역시나인 상황이 반복되는 것으로 인해 S양이 그에 대한 신뢰를 잃은 건, 절대 ‘의심’이 아니다. 그는 S양에게
“너는 내 편이 아닌 것 같다. 증거가 있어야만 나를 믿으려고 해서 내 편이 아니고, 내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게 너무 힘들다.”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 모든 핑계를 다 ‘친구’에게 미뤄 놓고는 그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확인시켜달라고 했더니 ‘믿음’을 요구하는 건 그냥 우스운 일 아닌가.
그가 현재 S양에게 하고 있는 말들 역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날 못 믿어서 너무 힘들다. 그런데 너 때문에 힘든 것보다, 너를 못 본다는 것이 더 힘들다. 그러니 헤어지진 말자.”
S양은 저런 말을 듣고도 그저 ‘서로 헤어지는 것이 너무 힘들어 우리는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인가?’라는 낭만적인 해석만을 하고 있던데, 이건 S양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S양이 철저히 당하고 있는 거다. 그가 줄 생각 없는 믿음을 내가 주거나 S양이 스스로 만들어 가질 수도 없거니와, 매번 저런 식으로 S양에게 매달리는 듯 말하면 S양이 마음을 열고 다시 만나주기에 그가 또 밑밥을 깔고 있는 것일 뿐이니, 더 어마무시한 일을 목격하기 전에 이쯤에서 정리하길 권해주고 싶다.
3. 젠틀함은 모두 연기였으며, 결혼 할 가능성은 없다.
난 M양이, 소제목으로 쓴 저 두 가지를 떠올리며 이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봤으면 한다. 그가 처음에 보여준 젠틀함은 이제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으며, 지금은 위협과 으름장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난 그가 원래 좋은 사람인데 S양과의 관계에서 오해가 생기거나 해서 이렇게 변한 게 아니라, 처음 보여준 그의 모습이 ‘연기’였고 이제야 본색이 드러난 거라는 걸 M양이 좀 깨달았으면 한다.
M양은
“사귀기전 대화 나눈 날, 그가 자신은 연인에게 최대한 디테일하게 말해주도록 노력한다고 했던 말과 사귀게 된 날 술 취해서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본인이 저에게 좋은 남자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겠다고 했던 말이 너무 진정으로 느껴졌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바로 그런 이야기들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으며 지금은 정말 그가 그런 얘기를 했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다. 현재 그는
“(여자관계 복잡한 친구 얘기를 하며)남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나 이혼까지 한 사람이다.(이혼까지 했는데 못할 게 뭐 있겠냐는 의미로)”
“내 폰 보여 달라면 보여주는데, 보면 우리 오래 못 간다.”
따위의 이야기를 할 뿐이니 말이다.
이제 유흥이나 여자 같은 건 지겨워서 그런 데에는 다 초월한 것처럼 말하지만, 어느 날 새벽에 바텐더1, 또 어느 날 새벽엔 바텐더2에게 연락이 오는 남자. 현실이 이렇다는 걸 M양도 명확하게 봐야지,
“근데 그가 잘해줄 땐, 또 제게 잘해주거든요.”
라는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그때 베푸는 그의 호의와 친절은 선심 한 번 쓰는 걸로 해석해야지,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인데 술과 유혹에 약해 흔들리는 거라고만 해석하면 곤란하다.
“전 웬만하면 이 사람이 원하는 대로 호구 짓까지 자처하며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저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게 아무 것도 없네요.”
M양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이런 사람이라면 나도 결혼해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때문에 이후 그의 집에 들어가 빨래와 청소와 요리까지를 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본성이 드러났고, 지금 그는
- 결혼해서 여자는 애 키우는 낙으로, 남자는 친구랑 노는 낙으로 사는 것.
이라는 속내를 드러냈다.
사귄 기간이 전부는 아니지만 여하튼 그는 사귄 지 100일도 되지 않아 저렇게 변한 건데, 이런 사람과의 결혼을 꿈꿔선 안 되는 거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M양은 ‘상대를 변하게 만들어서 나만 바라보게 할 수 있다면’이라는 희망을 놓지 못하기도 하고, 동시에 머리로는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알기에
“그래도 전 이 사람이 아직 좋은데,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고민하는 순간에도 세월은 흐르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를 만난 이후 M양의 생활은 엉망이 되고 하고 있던 사업도 완전히 문을 닫을 위기에 놓였는데, 상대의 말 대로 ‘1년은 만나보고’라며 계속 가다간, M양은 폐허에 유기된 처지에 놓일 수 있다. 자신은 하나도 아쉬울 게 없다는 듯, ‘네가 못 믿으면 헤어지는 거다’라며 위협을 할 뿐인 사람과의 미래를 혼자서만 꿈꾸지 말고, 더 늦기 전에 거기서 나오길 바란다.
자, 오늘 준비한 얘기는 여기까지다. 요즘 들어 너무 우울한 사연들이 많아 매뉴얼을 읽기 버겁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다음 주부터는 좀 밝고 경쾌하며 풋풋한 사연들을 위주로 매뉴얼을 발행해볼까 싶다. 즐거운 주말 기쁨으로 가득 채워 보내시고, 우린 월요일에 다시 만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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