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도착하는 사연 중 남친에 대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말하는 사연들을 보면, 남친이란 사람이
- 그냥 냉정하며 싸가지가 없음.
- 자기주장만 하며 말빨로 밀어 붙임.
- 예의와 감성의 영역을 조롱함.
- 자기 편할 때만, 또는 남을 평가할 때만 그런 척 함.
일 때가 많다. 어떤 사연에선 남자가
“종교를 갖는다는 건 정신적으로 나약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난 무교다. 그리고 신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을 가지고 있다. 강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에겐 종교가 필요 없다.”
라는 이야기를 하던데, 그러면서 그는 동시에 타로점과 사주팔자를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연애 중엔 상대가 내 남자니까 멋있고, 다 아는 것 같고, 냉철한 이성과 지성을 발휘하는 것 같아 보이겠지만, 그도 세상을 처음 살아보는 것이며 코 질질 흘리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잊진 말았으면 한다. 상대가 어른인 것처럼 이쪽도 어른이며 그런 둘이 함께 연애를 하고 있는 거라 생각해야지, 상대만 어른으로 여기며 일방적인 상대의 지적질에 혼자 상처 입고 반성만 하거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말들을 전부 수용하려 하다간, 자신이 이상한 여자라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빠질 수 있다.
이게 눈에 보이는 ‘외모’의 영역일 땐 체중 백 킬로 넘는 남자가 오십 몇 킬로의 여친에게 살 좀 빼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당황스런 일이라는 걸 확연히 볼 수 있는데, 정신적 영역으로 오면 ‘가치관의 차이’라는 방패를 들고 공격하거나 궤변을 늘어놓으며 희롱할 수 있기에 문제가 된다. 의존하고 있는 쪽은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듯한 상대의 독설을 이렇다 할 저항도 못한 채 당하기만 하는 일도 벌어지고 말이다.
오늘 사연의 주인공인 A양도 이런 상황에 놓여있다 탈출한 여성 중 하나인데, 구남친이 강적이었던 까닭에 여전히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더불어 연애 중 A양도 금방 전투태세를 갖추던 사람이었던 까닭에 상대는 더욱 강한 공격으로 A양을 유린했는데, 이런 문제들까지 포함해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출발.
1. 서른병에 대한 이야기.
열다섯 살 무렵 중2병을 앓을 수 있는 것처럼, 서른이 되면 서른병을 앓게 되는 경우가 있다. 서른병이란, 서른쯤 되어 어느 정도 자기 진로로 확실하게 정해두었고 또 어디서든 ‘애’취급을 받을 일 없이 의견도 존중받게 되니, 스스로를 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무엇에 대해서든 참견하거나 훈수를 두거나 평가하려는 증세를 말한다. 속담에 비유하자면, 사람 잡는다는 ‘선무당’에 가까워지는 거라 할 수 있겠다.
내 지인 중 하나도 서른 무렵 저 병을 심하게 앓은 적이 있다. L사의 디스플레이 관련 업무를 하는 지인이었는데, 전자제품 얘기만 나오면 그건 자신만의 전문분야인 것처럼 침을 튀어가며 이야기했다. 그가 연구직이었다면 그러려니 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생산직이었고, 그에게 질문을 한 사람은 TV를 좀 싸게 살 수 있는지를 알아보느라 물은 건데 그는 국제 디스플레이시장과 향후 전망에 대해서까지 열변을 토했다. 최첨단 기술과 4K에 대해 듣고 싶은 게 아니라 마트에서 200만원 하는 거 너를 통해서 사면 좀 더 싸게 살 수 있냐고 물은 건데 말이다.
그의 그런 증세는 나날이 더욱 심해져서, 나중엔
- 왜 예전부터 어른들이 신문을 보라고 했는지 알겠다. 신문을 보면 세상 돌아가는 게 보인다.
- 내가 선배에게도 바른 소리 잘 하는 까닭에 날 쉽게 못 본다. 오히려 내 눈치를 본다.
- 여친 가정을 보면 대략 미래의 삶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니다 싶으면 난 딱 자른다.
등의 이야기까지 꺼내놓기도 했다. 지인에겐 미안하지만 난 그때 속으로
‘아니, 얜 대체 자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난 그가 친구 집 집들이 올 때 좋은 차 몰고 와 기분 내면서 선물은 안 사오는 걸 보고 혀를 차기도 했었는데, 여하튼 그는 남들 다 열심히 살고 있으며 각자의 분야에서 성장하는 줄은 모르고 자신만이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다.
저런 지인이야 어쩌다 한 번 보는 거고 또 아니다 싶으면 그냥 안 만나면 그만이지만, 거의 매일 연락하고 많은 시간을 함께해야 하는 연인이 저럴 경우 상황이 끔찍해진다. 내 메일함에도 TV를 같이 보다 여친이 의견을 내면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소리’인 거고 자신이 의견을 내면 ‘경청해야 할 말씀’으로 여기는 사례부터, 남친이 무례한 행동을 해서 여친이 지적하면 ‘그걸 무례하게 생각하는 네가 이상한 거다’라고 말하는 사례까지, 참 많은 서른병 관련 사연이 쌓여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여자의 학력과 스펙이 남자보다 월등히 좋은 경우에도 남자는 훈수를 두며 여친 전공분야에 대해서도 평가를 한다는 점이다. 대화 중 동북아 정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여친은 외교 관련 업무를 하고 있는지라 그것에 대해 대화를 하게 되면, 남자가 “그렇게는 안 될 거야. 예상은 예상일뿐이고 실제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게 아니지.”라며 이야기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라 할 수 있겠다. 이것에 너무 답답한 나머지 연애 중
“진짜 확 한 마디 하고 싶었는데 참았어요. 알아도 제가 더 많이 아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남친은 무슨 자기가 아직 유비를 만나지 못한 제갈공명인줄 알아요.”
라는 뉘앙스의 하소연을 하는 여성대원들도 꽤 있다. 싸움을 피하려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고 대충 넘어가니, 남친은 더욱 기고만장해져 모든 분야에 대해 지적과 훈수를 두려는 일로 이어지는 사례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자신의 남자친구가 서른병을 앓고 있는 것 같을 땐, 그의 지적과 훈수를 들을 때 이쪽은 어떤 마음이 드는지, 그리고 이쪽은 존중해가며 남친의 말을 경청하는데 남친은 왜 말을 잘라가며 단정 짓고 일방적으로 주장만 하는지 등에 대해 참지 말고 꼭 이야기를 하길 권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마찰을 겪어서라도 다듬어져야 하는 부분이지, 계속 상처를 입으면서도 참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아니다.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더 심각해 질 수 있으니, 이쪽도 상대와 똑같이 생각이라는 걸 하며 의견 역시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할 수 있게 만들길 바란다.
2. 아쉽다고 계속 사귀지 말고, 아닌 거면 정리하자.
서른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최악의 증상을 꼽자면,
- 내 말 잘 들으면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은 지적하거나 훈수만 두는 입장에 서서 상대에게 지시만 늘어놓는 건데, 여기에 여친이 항의를 하면
“내가 하는 말을 들어서 너에게 나쁠 것이 없다.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얘기다.”
등의 이야기로 역시나 ‘그걸 못 받아들이는 네가 이상한 것’이라는 분위기를 만들고 만다. A양의 사연에서도 남친이 저것과 똑같은 말을 했는데, 안타깝게도 A양은 저 말에 그저 설득당해 남친의 지적질을 모두 허용하고 말았다.
난 사연을 읽으며 A양이 그에게 “그럼 너는?”이라고 좀 묻기를 바랐다. 그는 A양에게 외모지적, 습관지적, 장난을 장난으로 못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지적, 쓸데없이 정의로움을 추구한다고 지적, 자신을 이해하지 않고 지적한다고 지적, 사고방식이 이상하다고 지적 등을 했는데, 그건 A양이 그에게 “그럼 너는?”이라고 말했을 때 그도 할 말이 없어지는 부분이다.
그리고 사실 그 이전에, 상대가 누군가를 비하하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거나, 보편적인 상식과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자주 한다거나, 그냥 자기 말만 맞다고 우기며 ‘네가 틀린 것’이라는 이야기를 할 뿐이라면, 그런 사람과의 연애는 자존감을 갉아 먹는 일이 될 것이며 어떻게 결혼까지 이어지더라도 늘 교무실에 불려가 혼나는 분위기로 살아야 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딱 봐서
- 지금 이 남자가 하는 말들을 우리 부모님들께서 들으시면 분노하실 것.
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관계에서 로그아웃하길 권한다.
내게 도착한 사연 중에는 남친이 자신의 가치관과 다르다며 여친의 부모님들까지 욕되게 말한 경우도 있고, 열등감과 자격지심 때문인지 일부러 계속 더 전문직인 여친에 대해 폄하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경우도 있다. 그걸 다 듣고 앉아 있다간 세뇌되어 ‘정말 그런가?’하는 생각까지 하게 될 수 있으니, 누가 맞고 틀린지를 알아내려 고민하지 말고 꼭 ‘우리 부모님 앞에서 지금 이 이야기가 나왔다면?’, 또는 ‘내 지인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남친이 이 얘기를 했다면?’이라고 생각하며 판단하길 권한다.
3. 그때그때 표현하기, 심각해지기 전에 부드럽게 말하기.
A양의 문제를 꼽자면,
- 당시에는 그냥 넘어가며, 쌓아둠.(기분 나쁘다고 표현을 안 함)
- 정색하며 말하거나, 따지듯이 말함.
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약 A양이 소개팅에 나가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남자’를 만난다면, 두 시간 가까이 그의 얘기를 예의상 들어주다가,
“근데 저한테 궁금하신 건 없어요?”
라는 이야기를 할 것 같다. 혼자 속으로 실망할 거 다 하고 기분 나쁠 거 나 나빠한 후에 말을 꺼내는 타입이랄까. 실제로 A양은 연애 중 남친에게 저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남친이 장난을 친 것에 기분이 나빠져서는
“오빠가 무심코 하는 이야기에 나는 기분이 나빠지는 일이 자꾸 벌어진다. 어떡할 거냐.”
라고 묻기도 했다. 남친이 동네 꼬마들에게 장난을 쳤을 땐,
“애들한테 왜 그래?”
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문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게, A양의 경우 보통의 경우들보다 좀 더 공격적이다. 회유하거나 타이르는 과정이 생략된 채 혼내는 과정으로 바로 넘어가는 듯 보이며, 갈등이 생겼을 땐 꼭 상대가 사과를 해야만 대화가 마무리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만다. “아 뭐야~ 왜 그래~ 그러지 마.”라며 넘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정색하며 “왜 그러는 건데?”라며 묻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남친과 A양은 결국 치킨게임을 하게 된 거라 생각하면 되겠다. 오만한 사람은 쉽게 부끄러워지는 까닭에 남친은 A양의 정색에 무안함을 느끼며 반격을 하게 된 거고, A양은 상대가 반격하려 애써 만든 궤변과 억지를 보며 상대의 인간성마저 의심하게 된 거다. 물론 그 전에는 상대의 서른병의 증상이 나타나 갈등이 생긴 것이고 말이다.
때문에 난 A양이 결정한 이별에 적극 찬성하며, 상대가 ‘지지 않으려고 했던 말들’에 대해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가 A양에 대해 ‘이상한 여자’인 것처럼 이야기 한 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을 바보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그랬던 거지, 정말 A양이 그래서 그랬던 건 아니다. 다만 A양은 당장의 싸움을 피하기 위해 대충 넘어가면서도 속으로는 분노를 적립하는 버릇이 있으니, 위에서 말한 ‘정색의 문제’와 더불어 그 지점을 수정하려 노력하면 좋을 것 같다.
끝으로 하나 더.
“속으로는 성매매를 하고 싶으면서 여친에게 말하지 않는 남자들도 많은데, 난 솔직히 말하는 거니 그런 남자들보다 나은 거다.”
라고 말하는 남자는, 그냥 계속 가던 길 가라고 보내주는 게 맞다. 그리고 남친의 주장과 달리 친구들과 같이 성매매를 하러 가자고 카톡하는 건 절대 ‘남자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 아니며, 소개팅 하고 사귀기 전 간 거니 양심에 거리낄 게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별로 설득력이 없는 변명일 뿐이다.
이 문제 역시 ‘A양이 보수적이어서’ 벌어진 일은 결코 아니니, 근자감에 쩔어서는 A양에 대한 존중도 없이 지적질만 하며, ‘내가 그러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했으니 된 거다’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남자와의 이별엔 아무 미련도 갖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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