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에 발행한 [같은 모임, 호감 가는 그녀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읽고는 용기를 내 상대에게 연락했다가, 무거운 패배감에 사로잡힌 남성대원들의 사연이 줄을 잇고 있다. 이맘때쯤이면 대선을 앞두고 정치 얘기하다 싸운 커플들이 사연이 밀려들기 마련인데, 그 커플부대원들의 사연보다
- 용기 내 말 걸었지만, 상대가 내게 관심 없어 보여서 상처 받은 사연
들이 훨씬 많다.
그 대원들이 보낸 사연을 읽다 보면 난
‘아니, 연락만 겨우 한 번 해보고 여기서 포기하는 건가?’
‘뭐야? 대화도 제대로 안 해놓고 뭘 확인했다는 거지?’
‘그저 연락 한 번 했다고 상대가 다가오며 사귀게 되는 게 아니잖아!’
라는 생각과 함께 가슴이 먹먹하고 손발이 떨려오게 되는데, 여하튼 이걸 사연 하나하나 매뉴얼로 발행하긴 어려우니 오늘은 세트로 모아서 살펴보자. 출발!
1. 블랙아웃 대화법
이거 내가 전에도 한 번 얘기했는데,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내 경우만 해도
독자 – 무한님 안녕하세요.
무한 – 네 안녕하세요.
(잠시 후)
독자 – 바쁘신가 봐요. 말이 없으시네요.
무한 – 네?
라는 상황이 생겨서 참 답답할 때가 있는데, 말을 걸었으면 안부를 묻든, 용건을 말하든, 아니면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이끌든 해야지,
‘내가 말을 걸었으니, 내게 관심이 있는 상대라면 이것저것 물으며 대화하려 하겠지?’
하고 있으면 곤란하다. 한 남성대원의 대화를 보자.
남자 – 연휴인데 어디 안 가세요?
여자 – 저 출근해요. ㅎㅎ
(이후 대화 없음)
모태솔로든 여린마음동호회원이든 간에, 저렇게 말을 걸었으면 대화를 더 이끌어가는 게 일반적이며 상식적인 것 아닌가. 그런데 저런 식으로 ‘질문-대답’을 듣고는 이후 아무 말도 안 하는 사례가 실제로 존재하기에 내가 담배를 못 끊고 있다. 심지어 어느 대원은 자신의 질문에 상대가
“아뇨.”
라는 단답만 한 걸 보니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듯하다며 여기서 포기하겠다고 하소연을 하던데, 겨우 그거 하나 두고 낙담해선 패배감 짙은 이야기들만 늘어놓으면 내가 도와줄 방법이 없다.
물론 상대에게 투표했냐고 물었을 때
“아뇨 이제 막 하러 가려고요. 투표 하셨어요? 누구 뽑으실 거예요? ㅎㅎ”
등의 ‘부드럽고 편한 대답’이 돌아오면 참 좋긴 하겠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다정다감하며 수다스럽지는 않을 수 있음을 기억하자. 상대가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에만 익숙해서, 낯을 가려서, 또는 갑작스런 연락에 철벽을 치는 습관이 먼저 작동해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으니, 그걸 전부
- 내게 관심이 없어서 연락하지 말라는 눈치를 주는 것
으로 해석하진 말았으면 한다. 눈치도 한 두세 번은 대화를 나눠본 후 봐야하는 거지, 딱 한 마디 던져 놓고는 거기에 대한 대답 하나로 모든 걸 판단해선 안 된다. 포기는 두 밤 더 자고 일어나서 해도 괜찮으니, 예측과 짐작만을 기반으로 너무 쉽게 판단해 주저앉진 말자.
2. 자체종결형 대화법
이것 역시 매뉴얼을 통해 지겨울 정도로 여러 번 얘기했던 대화법이다.
“이번 주 00에 가신다고 했죠? 잘 다녀오시고 주말 잘 보내세요.”
“00에 왔는데 이러이러하네요. 그리고 오늘 비온다니까 우산 챙기세요~”
카톡이나 문자 대화라는 게 편지를 보내는 건 아니니까, 모든 이야기를 한 번에 몰아서 다 전달하려 하진 말자. 종종
“저는 카톡을 메일 보내듯이 사용하는데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 대원들이 있긴 한데, 메신저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는 개인의 자유이며 난 그 방식을 존중하긴 하지만, 썸이나 연애로 이어지는 경우를 보면 그들의 카톡대화 중 99.82% 이상이 ‘실시간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얘길 해주고 싶다.
또한 ‘이후 운이 좋아 썸이나 연애로 발전한 경우’를 생각해 보더라도, 그런 사이가 되었다고 지금의 낯설고 어색하고 별로 안 친해서 한 번에 할 말을 패키지로 보내는 모습이 확 바뀌는 건 아니다. 때문에 어쩌다 썸까지 이어지더라도 할 말을 찾지 못해 데면데면하게 대하거나, 그냥 서로가 무슨 거래처 사람 대하듯 웃으며 듣기 좋은 얘기만 늘어놓다가 흐지부지한 사이가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화가 한 두세 층까지 깊게 내려가지 못하고, 시작되었다 싶으면
“네~ 뭐뭐 잘 하세요~”
“네~ 잘 다녀오시고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네~ 푹 쉬시고 그때 봬요~”
라는 문장으로 급히 종결되어, 겨우 계단 한두 개 내려간 정도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아직 낯선 상대에게 말을 거는 부담, 말을 걸었다가 상대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괜히 머쓱해질 것 같은 두려움, 혹시 메시지를 보냈다가 답이 없거나 늦게 와서 겪게 될 불안 등을 생각하면 한 번에 몰아서 보내고 끝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버리면 앞서 말한 것처럼 늘 수박 겉핥기식 대화만 할 수 있으며, 더불어 ‘습관적 끝인사’를 꼭 얼른 해야 한다는 강박에 그런 메시지를 보내, 상대로서도 같이 끝인사를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쪽이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 보길 권한다.
3. 함흥차사 대화법
이건 소제목 1번에서 이야기 한 ‘블랙아웃 대화법’의 변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말을 걸고는 상대가 대답을 하면 그걸 확인도 안 한다든지, 한참 이따가 ‘다른 질문’을 다시 던지는 걸로만 대화를 이어가는 걸 말한다. 예시를 보자.
[가형]
남자 – 사전투표 하셨어요?
여자 – 아뇨 ㅎ 선거 날 하려고요.
(한참 후)
남자 – 그렇군요.
[나형]
남자 – 사전투표 하셨어요?
여자 – 아뇨 ㅎ 선거 날 하려고요.
(한참 후)
남자 – 그렇군요. 점심 드셨어요?
여자 – 네 방금 먹고 왔어요. ㅎㅎ 식사 하셨어요?
(한참 후)
남자 – 이제 끝났네요. 퇴근 안 하세요?
여자 – 집에 가는 중이에요 ㅎ
(이후 한참동안 또 대화 없음)
가끔 내가 이런 사연을 받다가 충격과 공포에 빠지는 건, 저런 대화법을 써놓고는 내게
“매뉴얼에서 읽은 ‘가랑비 작전’을 쓰는 중입니다. 한 세 달 정도 이렇게 서서히 스며들 생각인데, 그쯤 되면 고백해도 될까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저건 ‘가랑비 작전’이 아니라, ‘물웅덩이 작전’이라고 보는 게 맞다. 처음 한두 번 만나는 얕은 물웅덩이 정도야 상대가 피하지 않겠지만, 계속 그런 식의 물웅덩이가 나타나면 상대가 결국 발걸음을 돌리거나 물웅덩이를 피하게 될 거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부팅했다 종료했다 부팅했다 종료만 하는 듯한 그런 행위는 즉각 그만두길 바란다.
4. 윈도우즈 도움말식 대화법
내가 6일에 발행한 매뉴얼에 분명
- 그녀가 알고 있을만한 것 중 답하기 어렵지 않은 걸 묻고…(생략).
라고 적지 않았는가. 아무리 상대와 좀 긴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상대가 알고 있을 만한 것’ 그리고 ‘답하기 어렵지 않은 것’을 물어야지, 상대가 난감해 하는데도 ‘질문을 위한 질문’을 해가면서 결국 피곤하게 만들면 안 된다.
남자 – 안녕하세요. **에서 일하신다고 했죠?
남자 – 뭐 좀 여쭤 봐도 될까요?
여자 – 네네!
남자 - **에 취업하려는 후배가 있거든요.
남자 – 홈피에 있는 공고문을 보면 이러이러하다던데
남자 – 거기에서 말한 이러이러한 조건을 월등이 충족해야 하나요?
여자 – 월등히요?
남자 – 만약 700이상이라고 하면 750정도가 아니라
남자 – 800이 넘어야 안정선은 아닌가 하는 거예요.
여자 – 아 네.
남자 – 물론 그 후배가 무슨 커트라인만 보고 거기 맞춰 공부할 건 아닌데
남자 – 그래도 대충의 선을 알고 있는 게
남자 –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부담감이 덜어지잖아요.
여자 – 그렇죠. 아마 800정도면 안정선일 거예요.
남자 – 하지만 그게 절대적인 게 아니니까
남자 – 이번 지원자 중 800넘는 사람이 많다면 변할 수 있겠죠.
여자 – 그렇죠.
남자 – 대충 합격선이 어느 정도 점수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남자 – 차라리 얼마 이상 몇 점 이러면 좋을 텐데요.
여자 – 네
남자 – 하긴 그래도 800이상 10점 준다고 하면
남자 – 동점자들이 많을 경우 다른 부분에서 감정되어 떨어질 수 있겠네요.
여자 – 그렇죠.
남자 – 올해 지원하는 사람이 많을까요?
남자 – 지원자들 평균이 어느 정도일지 모르겠네요.
여자 – 그건 아마 회사에서도 모를 것 같아요.
남자 – 그렇겠죠. 잘 알겠습니다.
남자 – 고마워요. 다음에 봬요.
여자 – 네 다음에 뵐게요.
저 대화를 통해 여자가 받은 느낌은 무엇일까? 객관식으로 문제를 낼 테니 맞춰보길 바란다.
① 이 남자 너무 전문적이고 멋있다.
② 대화를 리드하는 것에서 박력이 느껴진다.
③ 후배의 일까지 이렇게 알아봐주는 걸 보니 정말 다정하다.
④ 듣기만 했을 뿐인데 피곤하다.
혹시 프린터가 갑자기 안 될 때 윈도우즈 도움말을 참고해 본 적 있는가? 윈도우즈 도움말은
- [인쇄도움말] 프린터에 전원이 들어오면 용지를 넣고 인쇄 버튼을 누릅니다.
- 인쇄가 되지 않았다면 드라이버 설치 여부를 확인합니다.
- 드라이버 설치 후에도 인쇄가 되지 않았다면 도움말 [인쇄도움말]항목을 참고합니다.
- [인쇄도움말] 프린터에 전원이 들어오면 용지를 넣고 인쇄 버튼을 누릅니다.
라는 식의 영원한 뺑뺑이를 돌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끔은 또 네트워크 관리자, 또는 하드웨어 제조사에 문의를 하라는 아주 무책임한 대답을 떠넘기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여하튼 오랜 시간 들여다봐도 결국 피곤만 남을 뿐인 저런 대화는 안 하느니만 못할 수 있다는 걸 기억하자. 팁을 하나 적자면, 일반적으로 상대가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는 ‘상대 자신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게 좋다. 내가 이전 매뉴얼에다 ‘집이나 회사 근처 자주 가는 식당’을 물으라고 힌트까지 적어놨으니, 그걸 잘 응용해 질문하길 바란다.
끝으로 하나 더 얘기하자면,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할지’ 같은 건 평소에도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해봐야 체득할 수 있다. 친구나 지인과 3분 이내의 짧은 대화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방언이 터져 어느 이성과 막 30분씩 대화를 하긴 힘들다.
예컨대 평소 어느 지인이 해외에 나갔다 왔으면, 지인에게 잘 다녀왔냐 물으며 대화를 시작해선, 어디가 좋았냐, 그곳 물가는 어땠냐, 사진 많이 찍었냐, 저 사진에 나온 건 어디냐, 숙소는 어땠냐, 음식은 괜찮았냐, 뭐가 제일 맛있었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뭐가 있냐, 나중에 누가 거기 간다면 꼭 준비하라고 하고 싶은 건 뭐가 있냐, 다음에 또 갈 거냐, 불편한 건 뭐였냐 등을 물어가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다. 그래야 나중에 호감 가는 이성을 만나도 그 이성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알 수 있는 거지, 평소
이쪽 – 잘 갔다 옴?
친구 – ㅇㅇ ㅋㅋ
이쪽 – 이따 볼까?
친구 – ㅇㅋ
라는 대화만 하고 있으면 나중에 ‘긴 대화’를 해야 할 때 아무 생각도 안 나기 마련이다. 심한 경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괜히 막 연극하듯 꾸며내
“아침에 출근하는데 이름 모를 나무들에 꽃이 활짝 피었더라고요. 꽃을 볼 때 느껴지던 감정을 소희씨께도 보여드리고 싶어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 꽃처럼 활짝 핀 하루 보내세요.”
라는 메시지로 상대를 얼어붙게 만들 수도 있고 말이다. 본인은 그게 사랑을 해서 시인이 되는 거라 생각하겠지만 상대에겐 그냥 확 쉰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 평소에도 지인과 10분 이상의 대화를 나눠보길 권한다. 지인에게도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대원들이 종종 있는데, 진짜 상대라는 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자연히 되묻는 게 많아지고 리액션도 저절로 되며 대화가 풍성해지기 마련이다. 관심을 가진 채, 대화하며 패턴을 발견해 가길 바란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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