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양의 사연에선, 그간 매뉴얼로 발행했던 대표적인 이별사유들이 보이기에 재회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세 가지 씩이나 포함되어 있기에, 유효기간 지난 상대의 호의와 헌신을 증거로 내밀며
‘내게 그렇게 까지나 잘해주던 사람이니, 뭘 좀만 어떻게 하면 재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건 각주구검의 태도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J양은
‘이렇게 내게 잘해주는 남자를 내가 또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남자를 만나 결혼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재회를 바라는 거라고 했는데, 그렇게 J양에게 잘해주는 남자를 또 만날 순 있다. 다만, J양이 이전의 남자들과도 비슷한 식으로 헤어졌으며 이번 연애 역시 이렇게 끝나고 만 것처럼, 그 ‘다음 남자’와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게 이별할 수 있기에 이 매뉴얼을 준비했다. 출발해 보자.
1. 한 번에 깨진 게 아니라, 금이 간 부분이 점점 벌어진 거다.
난 J양에게, 앞으로 연애하면서는 ‘노력’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길 권해주고 싶다. J양 스스로 자신이 뭔가를 소홀하게 있다고 생각해 노력하겠다는 건 괜찮지만, 그게 오로지 상대에게 의무를 깨우쳐 주듯 말하는 거라면 안 하는 게 낫다.
J양이 한 말을 보자.
“이번 주는 행복하지도 않았고, 연애하는 기분도 안 들었어. 오빠가 좀 더 노력해 줬으면 좋겠어.”
연애라는 게, 무슨 ‘행복 서비스’를 상대로부터 받는 게 아니다. 그리고 불만을 말할 거면 무엇이 내게 어떻게 느껴져서 서운했는지를 말하거나 뭘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를 조심스레 꺼내야지, 그냥 다짜고짜 “더 잘 해. 더더더더.”라고 말하면 상대는
‘왜 나만 그래야하는가? 이 연애에서 나란 사람의 존재는 뭔가? 나는 이 연애를 왜 하고 있는가? 계속 이런 식인 거라면, 내가 이 연애를 지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상대도 분명 저런 생각을 하며 J양의 말에 침묵으로 대꾸했을 텐데, 여하튼 이후의 상황에 대해 J양이 한 이야기를 보자.
“저는 저렇게 말하면 당연히 남자친구가 미안하다, 노력하겠다고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날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고 하더라고요. 자신은 이 연애가 오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서요.”
그래서 J양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저 말에 배신감도 들고, 놀란 마음에 그때 제가 화를 참지 못하고 헤어지는 걸로 알겠다고 대답했어요.”
물론 둘은 그렇게 헤어지는 듯하다가 다시 대화를 나눠 사귀는 걸로 하긴 했지만, 저런 사건들로 인해 축적된 피로와 생각의 변화는 다시 만나기로 했다고 말끔히 사라지는 게 아니다. 이런 소소한 전투의 피로와 더불어 상대가 겪어야 했던 J양 집안의 반대, 그리고 상대에 대한 J양의 태도들이 축적되었기에 훗날 최종 결정이 ‘이별’이 되었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2. 상대를 시험해보는 건, 상대에겐 공포가 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 J양과 남친은 어느 날 아래와 같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남친 – 너 주말에 승연이 만났다고 했잖아? 홍대에서 만난 거지?
J양 – 응. 홍대에서 놀았어.
남친 – 강남에는 안 갔고?
J양 – 응 강남 안 갔는데? 왜?
남친 – 신사역 근처에 간 적 없어?
J양 – 없어. 왜?
남친 – 진짜?
J양 – 안 갔어. 왜?
남친 – 신사역 근처에서 돈 쓴 적도 없고?
J양 – 없어. 왜?
J양의 물음에 남친은
“사실 나 네 카드내역 조회했어. 그런데 신사역에서 돈 쓴 내역이 나오더라. 카드내역서가 잘못되었거나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것 둘 중 하나인데,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네.”
라고 답한다. 만약 저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J양은 등골이 오싹하며 남친이 앞으로 어떤 더한 일도 저지를지 모른다는 공포심까지 생기지 않겠는가? 저 말에 J양이
“포인트랑 지출기록 때문에 엄마랑 나랑 가족카드 쓰고 있어. 그 날은 엄마가 카드 쓰신 것 같고.”
라는 대답을 해서 오해가 풀렸다고 해도, J양에게 말도 하지 않고 카드내역을 조회하고, 이후 조회해서 알게 된 사실을 숨긴 채 J양을 떠봤던 남친의 저 태도가 지워지지 않는 불신으로 남을 것 같지 않은가? 남친이
“그랬구나. 동의 없이 카드내역 조회한 건 미안해.”
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전부 없던 일이 될 순 없는 것이고 말이다.
이런 일이 반대로 일어났던 거다. 나쁘게 말하자면 의심에 눈이 멀어 상대를 사찰하고는 그 기록을 모르는 척하며 상대를 떠본 건데, 이렇게 무너진 신뢰는 회복되기 힘들다. 그것도 상대에게 ‘더더더더’를 외치는 와중에 믿음도 없어 사생활을 몰래 들여다보곤 시험하는 일이 생기면, 상대에게 남는 건 부담과 공포인 까닭에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게 된다. 이쪽에선 그런 확인을 통해 상대를 더 믿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상대에겐 그 일로 인해 이쪽을 더는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3. 충동적이고 급한, 극단적인 선택은 만회하기 힘들다.
연애를 인질로 삼지 말자. 연애를 인질 삼아
“너 나한테 요즘 잘 못하지? 헤어지고 싶어? 헤어질까?”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연애 시작 후 대략 180일까지는 먹힐 수 있지만, 그 이후부터는 그 말에 면역이 생기며 그저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화나도 이별을 말하고, 서운해도 이별을 말하고, 짜증나도 이별을 말하고, 속상해도 이별을 말하려들면, 늘 얘기하듯 이별은 귀가 밝아 자기 얘기하는 걸 듣곤 귀신같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갈등이 생겼을 때, 끝까지 자존심 세우며 ‘받고 더’의 태도를 보이는 걸 삼가야 한다.
‘어쭈?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고? 됐고, 너 오늘 나랑 헤어지는 걸로 알아라.’
라는 식으로 끝장을 내보자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J양이 아닌 다른 커플을 봐도 둘이 재미있게 즐기자고 간 여행에서 어딜 먼저 보느냐를 두고도 싸우다가 한 쪽이 숙소로 돌아가 버리거나 먼저 집으로 돌아와 버리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잠깐의 갈등으로 인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경우 남은 한 쪽은
‘이런 연애, 더는 못하지. 앞으로 계속 사귀어봐야 늘 이런 식일 거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다. 다음 날 기분이 풀려
“자기야 미안해. 어제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 같아. 집엔 잘 온 거야? 난 어제 집에 와서는 블라블라.”
라며 사과를 한다 해도, 내팽개쳐진 순간의 기억과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싸우다 일어나서 집에 와버렸다든가 상대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버스를 타버렸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대원들이 종종 있는데, 그건 절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며 그 일로 인해 둘의 기반엔 분명 실금이라도 가게 되었을 거라 적어두고 싶다.
손편지, 도시락, 티셔츠 선물, 직접 구운 쿠키 뭐 그런 걸 몇 달간 매일매일 상대를 위해 준비했다고 해도, 갈등이 생겼을 때 관계를 발로 차버리며 ‘지금 너 같은 거 보기도 싫으니 꺼져버려’라는 태도를 보이면 전부 다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전자의 일들을 백 번 하는 것보다, 후자의 일을 단 한 번이라도 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함께 연애하고 있는 상대는 J양의 아군이며, 아군에게는 갈구기 보단 가르쳐줘야 하고, 못 하는 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잘 하는 점에 대해 칭찬해줘야 하며, 의견이 엇갈렸다고 해서 수류탄 안전핀 뽑은 채 “던질까? 던진다? 난 몰라. 네가 자초한 거야.”라며 던져버리면 다음 날부터 지극정성으로 상대를 간호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자존심 내려놓고 상대에게 안겨 우는 것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수류탄부터 깐 채 파국으로 몰고 가진 말았으면 한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너무 어렵다면, 갈등이 생겼을 때 딱 하루, 24시간 동안 결정을 보류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J양이 저지르고 마는 문제의 8할은 벌이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건 J양이 읽을 매뉴얼이라 J양이 돌아봐야 하는 문제들을 적어둔 거지, 전부 J양의 잘못이라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걸 적어두도록 하겠다. J양의 남친에게도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건 자신이 유지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호의와 헌신을 베풀려 했으며 애초에 ‘을’을 자처하며 J양을 접대하는 태도로 연애를 했다는 점이다.
가구 사업을 하는 어느 사람이,
“괜찮아. 이거 얼마 안 해. 그냥 가져가. 괜찮아. 남는 나무로 그냥 만들어 줄게. 괜찮아. 어차피 쇼룸에서 먼지만 쌓이던 제품이었어. 괜찮아. 집까지 싫어다 줄게. 괜찮아. 어차피 가는 김인데 가서 조립도 해줄게.”
라며 베풀다가, 점점 지인들이 요구하는 것도 많아지고 공짜로만 가져가려는 게 많아지니 스트레스를 받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럴 경우 자신의 사정을 설명해가며 상대를 이해시켜 조율했어야 하는데, 그저 “괜찮아~ 괜찮아~”만을 반복하니 폐업신고를 하는 그날까지도 지인에게 무료가구 배송까지를 해주게 된 것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남자, 이타적으로 모든 걸 다 맞춰주려는 남자가 무조건 ‘좋은 남자’인 건 아니다. 한 1년 그러다 지치거나 식고 마는 남자보다는 서로가 어긋나려 할 때 조율할 수 있는 남자가 J양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남자이니, 유효기간 지난 상대의 호의와 헌신을 떠올리며 미련을 갖기 보다는 J양의 문제들을 교정하고 새로운 사람과 새 출발을 하길 권한다. 자 그럼, 이 좋은 봄날 슬픔의 늪에만 빠져있지 말고 어서 나와 봄볕을 쬐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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