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은씨와 상대의 대화는, 내가 열네 살 때 ‘다이어리 꾸미기’라는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던 앞자리 수지랑 학교에서 쪽지로 주고받던 수준의 대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
수지 - 너 흰색 펜 있어?
무한 - 흰색은 없어.
수지 - 알았어.
저땐 아직 어린 까닭에 이성과 대화를 할 때 경직되어 있었으며, 조금만 둘이 친한 것 같아도 주변에서 놀리거나 이상하게 바라보니 90% 정도는 속으로 생각하거나 상상을 하곤, 나머지 10% 정도만 실제로 대화를 했다.
한 학기 동안 한 마디도 나눈 적 없던 여자애가, 어느 날 갑자기 아주 잠깐 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미향 - 저기, 근데 너 얼굴에 있는 빨간 점 지울 거야?
무한 - 이거? 아니.
미향 - 응.
정도의 대화만을 나누는 식이었다. 학원차에서 둘만 남게 되었을 때 뜬금없는 질문으로 잠깐 말을 섞는다든지, 아니면 두서너 명이 몰려와 질문 하나를 던지곤 답을 들은 뒤 돌아간다든지 했다.
1. 추억 돋아서 좀 더 꺼내는 옛날 얘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고가 생기기도 했다. 내 친구 D군의 경우 당시 다른 학교에 다니던 골프장 집 딸을 좋아했는데, 그는 학원에서 수업할 때 그녀를 바라보고 상상하며 혼자 마음을 키워가다가, 어느 날 쉬는 시간에
D군 - 야, 잠깐만 복도로 나와 봐.
상대 - 왜?
D군 - 할 말 있어 나와 봐봐.
상대 - 난 할 말 없어.
D군 - 그냥 잠깐 나와 봐.
상대 - 싫어.
D군 - (애들이 다 보고 있어서 물러설 순 없고, 그래서 옷깃이라도 잡아끌어 잠깐만 나와 보라는 말을 하며)잠깐만 나와 보라고.
상대 - (뿌리치며)아 재수 없어.
라는 충격과 공포의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 즈음 내 흑역사도 하나 쓰이게 되는데, 그건 친구를 위해 ‘대신 고백’을 해 준 일이다. 그땐 진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친구 대신 내가 부탁하면 모 여학생이 내 친구와 사귀게 될 줄 알았다. 그래서
“부탁 하나만 하자. 내 친구랑 사귀어줘라. 내가 이렇게까지(응?) 부탁하는데 안 되겠냐.”
라는 이야기를 했고, 그 이후 친구와 나는 세트로 ‘이상한 놈’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 다음 해에는 중2병을 앓느라 정신없이 보냈고, 전체적으로 이성을 더 이상 낯설지 않게 생각하며 몇몇은 연애도 시작하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이성과의 교류가 2년 전 ‘놀림의 대상’이었다면, 이때부터는 ‘동경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몇은 동성들과만 어울리긴 했지만, 대부분은 가까운 자리에 앉은 이성과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방과 후나 주말에 따로 만나기도 시작했고 말이다.
2. 세은씨는 대학생인데!
세은씨는 대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열네 살 쯤에 사용하던 방식으로 대화를 한다.
세은 - 너 26일에 바빠?
상대 - 아니 안 바쁜데?
세은 - 그럼 그날 나랑 잠깐 보자.
상대 - 그래 그럼. 몇 시에 봐?
세은 - 그건 너 나은 대로 해줘.
세은씨가 상대와의 카톡을 이런 식으로 밖에 사용하지 않는 걸 보며, 난 솔직히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줘야 좋을지 개념이 잘 서지 않았다. 저렇게 용건만 묻고는 다시 또 물러서는 거 말고 안부를 묻거나, 뭐하냐고 묻거나, 밥은 먹었냐고 묻거나, 주말 잘 보냈냐고 묻거나, 요즘 덥지 않냐고 묻거나 뭐 여러 가지 ‘할 이야기들’이 있을 텐데, 세은씨는 그 모든 걸 생략한 채 딱 저 정도의 대화만 나누고 만다.
어느 날 뜬금없이 말을 걸었을 때의 대화도 보자.
세은 - 너 게임 잘해?
상대 - 무슨 게임?
세은 - 그냥 평소에 하는 거.
상대 - 그냥 즐기는 거지.
세은 - 어떤 거 하는데?
극도로 낯을 가리고만 있다가, 겨우 생각해 낸 한 마디 던져서는 억지로 이어가는 모양새다. 질문을 위한 질문이다보니 상대가 ‘뭐가 궁금한 거야?’라는 식으로 나오면 대충 둘러대고, 대화 자체는 상대가 지루함을 느낄 때까지 질문만 이어지다가 상대가 대화를 끊으려 하면 세은씨가 상처받는 방식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세은씨는 내게
“무슨 애기를 해야 할지가 어려워요. 저는 평소에 여자들끼리만 통하는 주제로 거의 대화를 하고, 그 외에는 그냥 뭐 알바나 학교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얘하고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좀 그래요. 공통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요즘 얘가 술을 안 마신다고 해서 술이나 안주 얘기를 할 수도 없고...”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남자라고 해서 무슨 외계생물체인 건 아니니 ‘동성인 친구들과 하던 얘기’를 해도 된다. 동성인 그 친구들과 늘 ‘여자여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영화 얘기나 음식 얘기, 사회 이슈 얘기, 날씨 얘기, 여행 얘기 등도 할 것 아닌가.
영화 <겟 아웃> 기대 안 하고 봤는데 쩔더라, 뭐 그런 얘기를 하면서 서로가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거고, 영화 얘기에서 미드 얘기로 넘어가면 최고 존엄인 <왕좌의 게임>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꼭 어떤 주제가 없더라도 밥 먹었냐, 뭐 먹었냐, 요즘 먹고 싶은 게 많아져서 큰일이다, 초계탕도 먹고 싶고 피자도 먹고 싶다, 등의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떨어도 된다.
말을 잘 못해도 괜찮고,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나가지 못해도 괜찮다. 그것보다는 ‘사실 관심도 없는 거 묻기’, ‘대화가 끊기면 나에 대한 관심이 없는 걸로 판단해 속상해하기’를 벌이고 있는 게 더 문제이니, 혼자서는 자전거 타러도 못 나가면서 친구에게만 전화해
“오늘 자전거 탈 거야? 바빠? 알았어.”
라며 실망을 덕지덕지 발라 전달하듯 말하는 걸 그만두도록 하자. 가만히 보면, 그게 세은씨가 자전거 타는 걸 좋아해서도 아니고, 상대가 좋아 상대와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며, 그냥 외롭고 심심한 걸 누군가가 해결해주길 바라기 때문에 자꾸 상대에게 기대를 걸게 되는 걸 수 있다.
이렇다 할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꼭 상대여야 하는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진짜 왜 꼭 얘여야 하지?’하며 세은씨 자신도 어리둥절하게 될 수 있으니, 이 관계가 얼른 더 가까워지거나 썸으로 발전하지 않는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다급해하지만은 말길 권한다.
3. 지금 상대에게 세은씨는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까?
충격과 공포의 얘기가 될 수 있겠지만,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토대로 세은씨가 상대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를 추측해 보면
- 술에 쩔어 사는 사람.
- 외롭고 심심하다며 자꾸 놀아달라는 사람.
- 만나러 가서 밥까지 샀는데도, 빨리 집에 간다고 짜증내는 사람.
으로 보였을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세은씨는 그저 상대가 좋아서, 또 나름 계기를 만들어 ‘내 마음’을 전한다고 전하느라 그랬던 건데, 그 결과가 상대에겐 저런 사람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라는 게 놀랍지 않은가?
세은씨 입장에선 평소 용기도 잘 안 나고 무슨 얘기를 할지 몰라 답답하니, 술이 들어가고 난 뒤에야 붕 뜬 기분에 상대에게 연락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아 진짜 미안 ㅜㅜ 내가 어제 또 술 먹고 이상한 소리 했네.”
라는 이야기는 반복해서 듣게 되면, 상대는 반드시 지치게 되며 세은씨의 술주정을 더는 받아주지 않을 생각을 하게 될 수 있다. 지금도 상대는 세은씨가 밤늦게 카톡을 하면
“술마셨니?”
라고부터 묻지 않는가.
그리고 입버릇처럼
“아무도 나랑 안 놀아줘서 누워있어.”
“심심하다. 나랑 놀아줘.”
“나 진짜 완전 심심해 ㅜ”
라는 이야기를 달고 있는 사람에게선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화하고 만나는 시간이 그냥 피 빨리는 시간처럼 느껴질 수 있으며, 궁금하거나 기대되는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세은씨는 진짜 심심하기도 심심했지만 ‘대화할 계기’를 마련할 목적도 있기에 저랬던 것 같은데, 저건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잊지 말길 바란다. 저런 징징거림으로 몇 번쯤은 상대의 관심을 얻는데 성공할지 모르나, 점점 사태는 더욱 나빠지고 말 것이다.
또, 세은씨가 여린 마음이든 모태솔로든 뭐든, 상대가 세은씨를 만나러 그 동네까지 와서는 밥까지 샀는데, 거기다 대고 불평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세은씨와는 또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당장의 서운함에 눈이 멀어 틱틱대지 말고, 크게 보며 상대가 세은씨에게 베푼 게 얼마인지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세은씨는 상대가 사는 머무는 곳 근처로 갈 엄두도 못 내면서, 상대가 뭘 하는 건 왜 그렇게 쉽게 생각하며 거기서 더 하기만을 바라는가. 어쩌면 자신이 더 많이 좋아하고 자신만 매달리는 것 같아 자존심상하고 억울해서 그런 걸 수 있는데, 그래버리면 상대에겐 진상으로 보이게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자.
세은씨는 내게
“지금은 친구보다 못한 사이인 것 같아서요. 어떻게 해야 일단 가끔 연락도 하고 밥도 먹고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는 거죠?”
라고 물었는데, 이대로라면 상대가 세은씨와 친구로 지낼 이유는 전혀 없다. 늘 외롭고 심심해하며 술 마시면 술주정하고, 좋은 마음으로 만나러 가 밥을 사도 짜증을 내는 사람과 친구로 지낼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세은씨는 자신이 상대를 좋아하는데 상대는 그만큼의 마음이 없는 것 같다며 스스로는 스트레를 받고, 때때로 욱하고 올라올 땐 상대에게 화풀이를 하고 만다.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큰 명제는 문장만으론 어떤 의미로 아름다울 수 있지만, 세은씨가 보이고 있는 태도는 전혀 그렇지 않단 얘기다. 정말 상대와 ‘좋은 친구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라면, 오로지 세은씨의 입장에서 자신의 마음과 감정만을 생각하다 결국 상대를 갈구고 마는 현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얘가 초식남인 것 같으니 제가 더 노력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면 이젠 제가 지겨워졌을 테니 그저 잊힐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는 건가요?”
라며 자폭하는 건 그만하고, 상대에게 계란 하나만큼의 도움이든 기쁨이든 즐거움이듯 웃음이든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도록 하자. 그게 되어야 ‘힘이 되기보단 짐만 되는 사람’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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