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사연을 하나 받았다. 계속 궁지로 몰아도 헤어질 생각까진 안 하는 남자와, 그런 남자에게 더더욱 빡침의 증가를 느끼며 고문하다보니 ‘고문기술자’가 된 여자의 사연이다. 이걸 매뉴얼로 발행하려다보니 각색도 어려운데다 ‘뒷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해야 해서, 차라리 그냥 빈번하게 등장하는 비슷한 사례들을 모아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볼 수 있도록’ 소개할까 한다. 출발해 보자.
1. 지금 우리 대화가 정상적으로 느껴져?
‘지금 우리 대화가 정상적으로 느껴져?’라는 말은 의문문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직역하자면
-넌 이미 죽어있다.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
의 의미를 담은 말이라 할 수 있다. 이 고문기술은, 보통 여친쪽에서 1, 2, 3, 4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 놓았는데, 남친이 1, 2정도에 대한 대답만을 했을 때 발동한다. 예컨대
“잠 잘 못자고 출근했다. 지금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어서 짜증이 난다. 저녁에 있는 모임에 갈 기분이 아니다. 그리고 아까 오빠가 내 질문에 ‘넴 ㅎㅎㅎ’이라고 대답한 거 매우 성의 없는 태도라는 것 알고 있나.”
라는 이야기에 남친이 두 가지 정도만 대답을 하면, 여친의
“그게 끝?”
이라는 경계경보가 발령된다. 저 질문 역시 의문문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그 의미는
-주제 당 100자 이상의 성실한 대답을 다시 할 것, 그리고 끝엔 반드시 사과를 포함할 것
이라 할 수 있겠다. 사과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대원들이 가끔 한참 후에야
“저녁 모임은 무슨 모임이야?”
라고만 다시 묻곤 하는데, 그건 이미 늦었기에 폭격을 피할 수 없다. 그럴 경우
“됐어. 오빤 내 카톡 제대로 안 읽지?”
라는 새 공격이 들어올 수 있는데, 여기까지 왔다면 각개격파는 포기하고 그저 주기도문을 외우며 전체를 조망하는 대답을 시도해보길 권한다. ‘무슨 말이야, 난 이렇게 큰 관심을 두고 대화를 하는데! 사랑해’정도로 응대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2. 말하기 싫었던 거 아닌데? 오빠가 안 물어봤잖아.
이건, 여친의 함정에 완벽하게 빠지게 되는 경우다. 대화를 하나 보자.
여친 - 오늘 피곤해서 약속 가기 싫다
남친 - 피곤하면 오늘 그냥 쉬어 ㅋㅋ
(몇 분 후, 여친의 답장 없음에 남친이 뭔가 잘못된 걸 깨닫곤)
남친 - 무슨 약속인데?
여친 - 먹는 약속이지 뭐
남친 - ㅋㅋㅋㅋ 뭐 먹길래 피곤해도 가지 ㅋㅋ
여친 - 몰랑 ㅋㅋ
남친 - 그래 ㅋㅋㅋ
함정에 완벽하게 걸려들었다. ‘몰랑 ㅋㅋ’이 등장했다는 건 이미 신경가스가 살포되었다는 것과 같은데, 그 와중에 방독면도 없이 ‘그래ㅋㅋㅋ’라는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곧 최소 30분 이상의 청문회가 펼쳐질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여친이 2주 전에 그 약속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 있다면 ‘기억 못한 죄’로 인해 징역살이는 피할 수 없고, 얘기한 적 없더라도 곧이어
“뭐가 웃겨서 자꾸 ㅋㅋㅋ야?”
라는 질문에 대답을 잘못할 경우, 소제목 1번에서 말한 “지금 우리 대화가 정상적으로 느껴져?”의 공격을 받게 될 수 있다.
남자의 입장에선 ‘여친이 대답을 제대로 안 하기에 나도 화가 나 저렇게 대화하고 만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여자의 입장에선 ‘약속’이 주제고 ‘피곤함’이 부주제였는데, 남친이 ‘피곤함’에 대한 이야기만 한데다, 뒷북처럼 무슨 약속인지를 묻고, 또 결국은 ‘그래 ㅋㅋㅋ’로 마무리 한 걸 보곤 불이 붙은 거라 할 수 있다.
이쯤되면 자신도 억울하다고 생각한 남자는 “네가 대답을 제대로 안 했잖아.”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에 대한 여친의
“말하기 싫었던 거 아닌데? 오빠가 안 물어봤잖아.”
라는 새 공격이 들어올 것이다. 그럼 남자는 억울해선 복붙까지 해가며 “남친 - ㅋㅋㅋㅋ 뭐 먹길래 피곤해도 가지 ㅋㅋ”라는 증거를 내밀 텐데, 그것엔
“저게 물어본 거야? 혼잣말 한 거지.”
라는 생각지도 못한 반격이 들어올 수 있다. 여기서부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서로 감정의 골만 깊어질 수 있고 말이다.
사실 이런 상황일 때 여친이 화난 이유는 ‘남친은 날 만날 생각이 없어 보임’, ‘네가 만나자고 안 해서 약속 잡아 간다는데 거기에 대한 대답이 날 두 번 죽임’, ‘대충 대답하고는 나중에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것 같음’ 때문이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남자 입장에서 ‘피곤하면 쉬어’라고 답한 건 문제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그게 입장을 바꿔 생각하자면 ‘예비군 가기 싫다’는 이야기에 대해 여친이 ‘그럼 가지 마 ㅋㅋ’라고 대답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이럴 땐 ‘논리적으로 잘잘못 가리기’만 진행할 생각하지 말고, ‘안 만난다고 내팽개쳐 두거나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건 아니다’라는 마음을 여친에게 표현하길 권한다.
3. 고친다고? 전에도 고친다며? 내 잘못 있으면 말해봐.
남자 쪽에선 급하게 진화에 나서겠다며 ‘미안하다’, ‘고치겠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가려 한 것일 수 있지만, 그게 여친에겐
-진심에서 우러나온 듯 보이지 않는 사과
-대충 ‘미안’이라고 한 마디 던지고 끝내려는 태도
-여전히 난 서운하고 답답한데 혼자 털고 가려는 듯한 모습
처럼 느껴질 수 있다. 때문에 남자들에겐 군대 재입대 만큼이나 무서운
“뭐가 미안한데?”
“뭐가 미안한지 모른 채 미안하다고 하면 내가 받아줘야 돼?”
라는 멘트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고 말이다. 난 이럴 경우
“당신께서 저한테 ‘네 죄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 사람 만나고…, 사랑하고….”
라며 분위기를 바꾸기도 하는데, 이건 눈치 없이 사용하거나 두 번 사용했다가는 '넌 또 장난질이냐? 오함마 가져와'라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니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고치겠다고 말을 해도 ‘전에도 고친다며?’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고, 거기다 억울한 마음에 여친의 단점이나 잘못을 살짝 들추려 해도 ‘내 잘못이 있으면 말해봐’라며 ‘넌 이미 죽어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니 괴로울 수 있다. 이럴 때 우물거리거나 동굴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침묵만 지키면 상황은 더 악화되니,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였어도….”
라는 식의 ‘공감을 앞세워 말하기’를 사용하길 권한다. 단, 이게 그저 위기를 모면하려 할 때에만 나오는 단골멘트가 되어서는 안 되며, 진짜 상대의 기분이 어땠을지를 생각하며 이후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뒀으면 한다.
매뉴얼을 이렇게 적어두면 또 왜 남자만 그래야 하냐느니, 여자를 왜 악의 축처럼 묘사해 놨냐느니 하는 이야기가 등장할 수 있는데, 위의 사례들은 내게 도착하는 사연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사고다발지역’이라 할 수 있으며, 서두에서 말했듯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듯 읽으면서’도 읽다가 마음에 와서 닿는 부분이 있다면 생각해 보길 권하는 마음으로 발행했다고 적어두도록 하겠다.
늘 얘기하지만, 저런 다툼에서 승리하는 건 이후 ‘전투에선 이겼지만 전쟁에선 패배하는’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전투가 일어난 그 지역만이 아니라 전체를 보면, 빈번하게 청문회가 벌어지고 거기서 공방을 해야 하며 감정이 격해졌을 때 날 선 말들도 서슴지 않는 상황이 반복될 경우 결국 ‘이 관계에서 로그아웃 하고 싶다’는 생각을 부르지 않겠는가. 그러니 아직 둘이 볼링도 안 쳐봤다면 볼링도 좀 쳐보고, 바다도 같이 한 번 본 적 없다면 바다 가자는 약속도 잡으며 그렇게 ‘즐거운 부분’도 즐기며 만나보길 바란다.
“저 제주도 살아서 바다는 질리도록 봤고, 남친이랑 볼링동호회에서 만났는데요?”
내가 이러려고 연애매뉴얼 발행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즐거운 수요일 보내시길!
▼ 오늘도 또 이렇게 들러주시고 거기다 공감, 추천, 댓글까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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