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씨는 본인의 사연이 이런 제목의 매뉴얼로 발행될 것이라 상상도 못 했을 텐데, 그 사연의 근본적인 문제는 저 제목과 같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점점 만만한 여자로’ 여겨졌다기보다는 ‘처음부터 만만한 여자로’ 여겨져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거라 보면 되겠다.
아직 두 사람이 사귀고 있는 중이라면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겠지만, 천만다행으로 둘은 현재 헤어진 상황이니, ‘지금이라도 반드시 정확하게 보고 확인해야 하는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출발해 보자.
1.처음부터 가벼웠던 관계
상대와 열매씨와의 관계는, 사실 처음부터 좀 가벼웠다. 열매씨는 그걸 두고 ‘썸’이라고 말했지만, 여기서 보기엔 그게 호감표현 보다는 성희롱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그 여행 나랑 같이 가요. 손만 잡고 잘게.
-끝나고 우리 집 와요. 내가 먹을 거 해놓을게.
-소원? 야한 옷 입고 우리 집에서 기다리고 있기?
더 심한 얘기들도 있지만 수위조절을 위해 걸렀는데, 여하튼 열매씨 역시 상대의 저런 행동에 대해선
“가끔씩은 약간 가벼우면서 저질스러운 말장난을 해서 제 기분이 상하기도 했고, 좀 이상하다고 느낀 적도 있긴 했습니다.”
라고 말할 뿐이지만, 난 그걸 훨씬 심각한 문제로 본다. 저건 상대가 열매씨라는 한 사람에 대한 호감 때문에 그랬다기보다는, 그저 이성에 대한 성적 이끌림을 기반으로 하는 말에 가까우니 말이다.
어쨌든 상대는 자신이 저렇게 들이대도 열매씨가 밀어내지 않으니 점점 더 수위를 높여가며 다가왔고, 열매씨는 아무 일 없던 일상에 그렇게 다가오는 상대가 생기자 그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상대에 대해서는 그냥 다 통틀어 ‘솔직한 사람’ 정도의 평가를 내린 채 말이다. 그렇게 지내다, 결국 열매씨는 상대에게 사귀자는 말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열매씨가 처음 ‘사귀자는 말을 한 순간’에도 상대는 사귈 수 없다는 대답을 했는데, 그 이유는 ‘성적인 부분에 보수적이면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이 정도만 봐도 난 이게 분명 좀 뭔가 이상한 시작처럼 보이는데, 연애경험이 별로 없던 열매씨는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연애도 있는 건가보다….’했던 것 같다.
2.즐기기만 할 게 아니라 판단도 했어야 하는데….
당장 상대를 너무 잡고 싶다는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냉수마찰이라도 한 번 하고 와서는 둘의 관계를 ‘내 여동생의 연애 얘기’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돌아보자.
둘의 관계에서, 여자가 하는 말을 남자가 귓등으로라도 듣긴 했는가? 상대가 이럴 땐 이런 핑계, 저럴 땐 저런 핑계를 댄 까닭에 어찌어찌 협의를 하며 만나온 거라 생각할 수 있는데, 그 관계 전체를 조망해보면
-여자의 의견을 남자가 받아들인 적은 한 번도 없음.
이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열매씨가 사연신청서에 ‘투닥투닥했다’고 적은 일들이, 여기서 보기엔 결국 씨알도 안 먹힌 항의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그 관계는 상대가 자신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지속되어 온 것 아닌가. 지금 보면, 붙잡는 것과 놓는 것까지도 상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이고 말이다.
여행지에서 벌어졌던 일도 보자. 이 여행도 사실 두 사람이 같이 여행을 간 게 아니라 남자친구 혼자 여행 가있을 때 열매씨가 남자친구 보고 싶다며 거기까지 가서 함께하게 된 건데, 여하튼 두 사람이 거기서 사고를 당해 다쳤을 때 남자친구는 ‘병원 가고 싶냐’고 물었을 뿐이다. 언어와 치료비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은데, 열매씨가 자가치료를 하다가 귀국했을 때에도 상대는 거기에 더 남아 여행을 즐겼다.
이것 외에도 몇 가지 일이 더 있긴 한데, 어쨌든 요는
-연애의 목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음.
-핑계 좋고 말 잘하는 사람에게 휘둘리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음.
이란 거다. 돈과 시간이 없어서 연인은 일주일에 한 번 밖에 못 본다는 사람이 주 3회 나가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술 마신다. 그리고 그걸 지적하자,
“알았어. 그럼 지금 재형이 왔는데 보낼까? 나 보려고 온 애를 그냥 가라고 해? 어떻게 할까? 재형이 보내고 너 만나러 가면 되겠어?”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해서 계속 넘어가게 된다면, 그냥 상대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야만 하고 이쪽은 무작정 이해만 해야 하는 연애가 지속될 수 있다. 상대가 먼저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로 선수를 친 까닭에 그냥 계속 다 이해만 하면, 나중엔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속만 타들어가게 될 수 있고 말이다.
열매씨의 연애가, 말 잘하며 그때그때 프레임을 바꿔 열매씨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상대의 그 변명들에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여기까지 이어져 온 것은 아닌지 천천히 한 번 돌아보길 권한다.
3.연애를 시작했다고 무조건 지속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 연애가 열정적이었든 운명적이었든, 결국 상대의 입에서
“넌 그냥 너 같은 부류 만나.”
라는 이야기까지가 나왔으면 그 관계는 못 쓰게 된 거라 보는 게 맞다. 열매씨는 현재 헤어지며 상대가 한 저런 이야기에 꽂혀서는 ‘연애스타일의 차이’ 때문에 이 모든 문제가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건 상대가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모습을 보여서 벌어진 문제지 무슨 ‘연애스타일의 차이’같은 것 때문에 벌어진 게 아니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 다쳐서 끙끙 앓고 있는데도 외국에서 병원 가면 돈 많이 나올까봐 ‘병원 가고 싶냐’고만 계속해서 묻는 사람과의 관계에 무슨 비전이 있는가? 술자리엔 주 3회 이상 나가면서 연인은 주 1회만 보고 싶다는 사람에게서 무슨 애정이 느껴지는가? 이쪽의 친구 같이 좀 보자니까 술 먹는 자리 아니면 싫다며 거절하는 사람을 어떻게 좋은 남자친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거의 모든 연애가 시작은 다 좋다. 상대가 정색하거나 동물욕 숫자욕 하는데 사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시작은 분명 그렇게 다 좋은데, 호감을 느껴 몰입하는 초반의 집중력이 다 흐트러지고 난 후엔 상대가 귀찮아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할 수 있고, 구애를 위해 상대에게 잘 보이려 ‘괜찮은 사람’처럼 행동했던 걸 그만하곤 본색을 드러내기로 할 수 있으며, 여러 이유들로 인해 흥미를 잃은 채 다른 즐거운 것에 매달리게 될 수도 있다.
때문에 처음에 좋았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그 연애를 이어가려 할 게 아니라, 귀찮아하고 짜증내고 화낼 때의 상대도 겪어 보고, 또 상대를 변화를 경험해가며 그 연애를 지속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물론 평가만 할 게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관계가 진행될 때 그걸 막아서려는 노력을 해야겠지만, 열심히 애써도 이쪽만의 노력이 되거나 상대에게 그러려는 생각이 안 보인다면 그땐 그 관계를 정리하는 게 맞다.
“제가 다 망가뜨린 것만 같아서 아무 것도 손에 안 잡히고, 밥도 잘 안 넘어갑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후회되는 것투성이고, 제가 잘못했던 일들만 생각납니다.”
알다시피 난 이 ‘연애오답노트’에서 상대의 잘못이 6~7할 정도 되어도 어차피 상대가 읽을 거 아니니 이쪽이 다음번에 ‘더 나은 연애’를 할 수 있도록 이쪽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 얘기하곤 한다. 그런데 열매씨의 사연에선 잘못이 상대에게 9할 이상 있는 게 확실해 이렇게 얘기하는 거니, 상대가 불평하고 변명했던 것들을 오늘날 이 시점에 곱씹으며 후회하진 말길 권한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아가페적인 사랑을 주는 부모님도 아들이 저런 식으로 군다면 분명 무조건 감싸주고 이해하긴 힘들 테니 말이다.
열매씨는 내게
“좋은 사람 만나서 잘해줄 그 사람만 생각하면 마음이 엄청 쓰리고 아프네요.”
라고 했는데, 열매씨는 ‘그냥 아주 평범한 보통의 남자’만 만나도
‘내가 전엔 왜 그런 걸 연애라고 부르면서 힘들어 하고 있었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다. 열매씨는 상대의 ‘잘해주고 싶을 때 잘해주는 부분’만을 보며 좋은 사람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보기엔 그런 부분이 7%정도이며 나머지 93%는 ‘다른 여자였다면 진작에 로그아웃 했을 태도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정말 너무나도 작은 그 부분들만을 떠올리며 후회하는 건 그만하고, 거기서 조금 벗어나면 만나게 될 꽃길로 어서 발걸음을 옮겼으면 한다.
이별 후 미련과 후회로 스스로를 너무 괴롭히면 마음이 만신창이가 될 수 있으니, 상대에게서 받은 괴로움으로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다 생각하며 얼른 벗어나자. 거기서 마냥 주저앉아 있으면 느껴지는 건 상실감이요, 느는 건 패배감일 뿐이다. 일어서서 걷자. 걷다보면 또 분명 괜찮아진다.
▼버들붕어 서식지 공유해 주실 부운~? 역시나, 안 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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