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를 처음 배울 때가 생각난다. 난 스타를 J군에게서 배웠는데, 처음에 J군은 공격유닛을 뽑는 방법을 내게 알려줬다. 공격유닛만 엄청나게 뽑아선, 자신이 공격을 갈 때 같이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난 배운 대로 열심히 공격유닛을 뽑아 J군이 공격갈 때 같이 보냈지만, 내 기지에 몰래 들어온 상대편 유닛에게 기지가 초토화 되고 말았다. 그러자 J군은
“본진 방어도 해야지. 공격 유닛만 뽑아서 보낼 게 아니라!”
라고 했다. 그래서 난 방어하는 법을 배운 후 방어에 집중을 했는데, 그러자 J군은 또
“방어만 할 게 아니라 유닛도 뽑아서 보내야지. 상대방은 두 명 다 공격유닛 보내는데 너 혼자 본진 지키고 있으면 난 밀려버리잖아!”
라고 말했다.
그때는 참, 대체 뭐 어쩌라는 거냐,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라고 하는 대로 열심히 했는데도 내가 잘못한 거라니. 여하튼 팀플레이에 민폐를 끼치지 않고자 나는 J군에게 “나 뭐 뽑을까(어떤 유닛 만들까)?”라고 계속 물었고, J군은 그때그때 다르긴 했지만 여하튼 “질럿 뽑아.”, “드라군 뽑아.”, “다크 바로 가.”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매번 그렇게 뭘 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줘야 하다 보니, J군도 지치며 재미가 없었던 것 같다. 사실 팀플레이를 하려면 나 역시 정찰을 하며 상대 기지를 둘러보곤 상대가 뽑는 유닛에 맞춰 유닛을 뽑아야 하는데, 난 그냥 ‘시키는 것만 열심히 뽑는’ 역할을 하다 보니 상성에 맞지 않는 유닛을 뽑아 몰살당하기 일수였다.
그러다보니 J군은 J군대로 짜증이 나고, 나는 나대로 ‘뽑으라는 거 뽑았는데 진 거잖아.’하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그때 내가 종족별 상생을 묻고, 상대 기지 정찰을 좀 더 열심히 하며, 뭘 하면 좋을지 물어볼 게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면, 좀 더 재미있게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었을 것 같다.
연애매뉴얼에 왜 게임 얘기가 절반을 차지하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L군이 연애에 임했던 모습을 보니 딱 저 시절 내가 J군과 게임했을 때가 생각났다. 내가 J군에게 ‘뭐 뽑을지’를 물어봤던 것처럼, L군 역시 ‘여자친구가 바라는 연애’가 무엇인지를 그녀에게 물으며 전부 그렇게 맞춰가려 했다.
난 L군이 그녀의 바람대로 뭔갈 더 맞추거나 고치지 못해서 헤어졌다기보다, 그 연애를 그저 상대 접대하듯-그것도 상대가 뭘 바라는지를 물어 거기에 맞추듯-했기 때문에 헤어진 거라 생각한다. 헤어진 지금 L군은
“저의 문제점을 이제는 알고 고칠 수 있는데, 이대로 떠나보내기에는 너무 힘이 듭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건 내가 J군과 게임을 할 때 이전 판에서 밀리고 난 후 ‘방금 전 게임 다시 하면 이젠 뭐 뽑아야 할지 확실히 알 것 같다’고 했던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렇게 상성을 배워가는 것도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앞서 말했듯 J군과의 팀플레이에서 내게 필요했던 건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고 어떻게 운영할지 계획을 세우는 일’이지 않은가.
“저에게 여러 문제점이 있기는 했지만 충분히 노력하고 대화하며 해결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대화조차 거부하며 피해버린 그녀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둘 사이에선 이번 이별 전, 이미 네 번이나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는가. 그게 L군이 말하는 ‘노력하고 대화하며 해결하기로 한 것’인데, 그것만 계속하는 연애는 상대에게 리드를 맡겨둔 채 ‘뭐 뽑을지’를 계속 묻는 연애와 같다. 재미있는 팀플레이란, 내가 뭘 뽑으라고 말해서 파트너가 그것만 우구장창 뽑는 게 아니라, 내가 옵저버도 없이 다크에게 썰리고 있을 때 파트너가 옵저버와 병력을 보내주는 게임 아닐까?
“저는 그녀가 말해준 부분은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말하지 않은 부분조차 제가 노력했으면 했나 봅니다.”
그렇게 뒤쫓으며 상대의 지시를 기다리는 입장 말고, 다른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자. 게임으로 치자면 L군은 정찰을 전혀 안 한 거다. 파트너가 3시 정찰하면 L군이 6시 정찰하며 계획을 세웠어야 하는데, L군은 상대의 기지가 다 밀리고 있을 때에야 “다크 나왔네? 내가 옵저버 뽑을게.”라며 그제야 늦은 대책만을 세우려 했다고 할 수 있겠다.
L군은 어떤 연애를 하고 싶은가? 상대가 지적하면 다 고치는 연애? 상대에게 열심히 맞춰주며 뭘 더 해주면 좋겠는지 묻는 연애? 상대가 화내면 사과하고 고치겠다고 말하는 연애? L군의 연애가 저런 모습이었던 건, ‘이 연애가 끝나지 않는 것’을 목표로 둔 채 맹목적으로 ‘상대가 불평하는 부분 고치기’에만 집중한 까닭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L군은 뭘 좋아하는가? 무얼 먹고 싶고, 무얼 보고 싶고, 무얼 하고 싶은가? 연애를 할 땐 L군이 좋아하는 그런 것들도 상대에게 소개해주고, 또 L군이 차린 저녁식사에 상대를 초대하듯 부를 수도 있어야지, 상대에게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뭘 보고 싶은지를 물어 그것들로만 채우려 들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래버리면 상대가 그 연애의 주인공이 될 순 있겠지만, L군은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될 수 있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나도 미드에 빠져 늦잠 잘 때 있고, 게임할 때 있고, 등산복 반바지에 티셔츠 입고 나갈 때 있다. L군은 상대가 저런 부분들에 대한 지적을 했기에 헤어진 지금도 ‘지금은 정말 다 고칠 수 있다’며 다시 한 번 상대에게 사과하며 매달려 보려 하는 중인데, 단언컨대 저런 모습이 있다고 해서 정말 딱 그 이유만으로 헤어진 게 아니다. 아주 단순히, L군이 함께 있을 때 즐겁거나 고민을 털어 놓았을 때 힘이 되는 사람이라면, L군이 문경에 내려가 고무신 신고 지내도 그녀는 L군을 찾을 것이다.
덜 고치고 덜 사과해서 헤어진 게 아니라, L군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 적 없으며, 그녀의 일상까지를 함께 짚어보거나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던 걸 보여준 적 없기에 헤어진 거라 생각하자. 요즘은 전과 달리 이런 얘기를 하면 “왜 남자만 그래야 하냐!”라며 콜로세움이 열리곤 하던데, 남녀를 떠나 매력적인 사람들에겐 저런 특징이 있다는 얘기라고 생각해줬으면 한다. 다시 한 번 대화를 하더라도 이 지점을 염두에 둔 채 대화를 해야지, 그저 더 필사적으로 사과하고 고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고 적어두도록 하겠다.
▼애니 <너의 이름은>보세요. 두 번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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