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할 목적으로 쓴 편지나 장문을, 상대에게 보내기 전 한 번 봐달라는 부탁이 한 주에 한 번은 꼭 온다. 며칠 전에도 심각한 얼굴을 한 청년이
“무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맹세코 저 편지에 제 진심이 아닌 것은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비장함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솔직히 난 그걸 읽다 손발이 오그라들어 침을 맞으러 가야 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난 내가 쓴 편지도 아닌데 그 부끄러움이 다 내 몫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고통을 받고 있는데, 편지를 쓴 대원은 “이 정도면 감동해서 마음을 열지 않을까요?”라며 거리낌 없이 질문을 한다.
왜 그러면 안 되는 건지, 왜 그게 이쪽이 기대한 것만큼 효과가 안 나는 건지, 고백을 목적으로 한 편지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문제들은 무엇인지, 편지 고백 이전에 먼저 해야 할 것들은 뭔지 오늘 함께 살펴보자.
1.한 방에 모든 걸 걸려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다가가자.
상대와 아직 전화통화 한 번 한 적 없거나 단둘이 만난 적 없다면, 심리적으로 2km 이상 차이나는 그 거리에서 편지로 고백할 생각을 할 게 아니라 일단 좀 가까이 가야 한다. 총을 쏴도 2km바깥에서 쏘는 거랑 2m앞에서 쏘는 거랑은 명중률이 다른 법 아닌가. 2km바깥에서 그러는 건 도전이 아닌 도박이며, 오로지 ‘상대의 허락’에만 모든 걸 거는 무모한 행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정말 운이 좋아 2km바깥에서 명중을 시킨 사례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상대의 허락’을 받아낸 후 ‘저절로 알아서 다 되는 게 아닌 연애’에 혼란스러워하다 차이거나 흐지부지 되곤 한다. 연인이 되었으니 상대가 듬뿍 애정을 지닌 채 사랑에 얼른 푹 빠진 모습을 보이길 기대하다 불만과 실망만 전한 사례도 많고, 혼자 들떠서는 자신의 연애 판타지를 펼치려 전력질주 하다가 상대를 부담스럽게 만든 사례도 많다. 사귀기로 했다고 이전까지 잘 안 되었던 연락이나 의사소통이 단번에 되는 게 아니기에, 그 지점에서 마음고생을 한 사례도 많고 말이다.
편지로 고백하려는 대원들을 보면 다들
-이 고백이 받아들여져 사귀게 되면, 우리는 서로 힘이 되어주고, 위안이 되어주고,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고, 그 누구보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
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그런 사이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런 막연한 이야기들만 하는 건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또, 말은 저렇게 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게 하지만, 막상 사귀면 상대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에 삐쳐서는 ‘너에게 난 어떤 존재인지? 나에게 넌 최우선 순위인데….’하고만 있으면 그것 역시 곤란한 것 아니겠는가.
자신의 기대치대로 계산하자면 현 상황이 10점 미만인데 편지 한 방으로 100점이 되길 기대하지 말고, 현 상황이 최소 80점 이상일 때 거기서 10점 정도들 더 더할 수 있는 방법이 ‘고백’인 거라 생각하자. 상대는 이쪽의 취미가 뭔지도 모르고 이쪽이 무슨 폰을 쓰는지 본적도 없는 ‘잘 모르는 사람’인데, 그런 상황에서 편지로 고백해 세상에 둘 도 없는 연인이 되길 바라는 건 욕심이 아닌지, 그냥 얼른 연애부터 시작하고 싶어 그러는 모습인 건 아닌지도 차분히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한다.
2.그 정성과 간절함과 절실함은, 상대와 사실 아무 관련이 없다.
정말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편지를 쓴 까닭에
‘정말, 이 정도로 쓴 편지라면 분명 감동해서 마음을 열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건 이쪽의 생각이지 그게 사실 상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저 정성으로 편지를 써서 될 일이라면, 난 108배 후 획 하나 긋고 다시 108배 후 점 하나 찍어가며 편지를 쓸 수 있겠다. 마음을 글로 완벽하게 표현해서 될 일이라면, 난 산에라도 들어가 ‘가장 진실한 단 하나의 문장’을 쓸 수 있는 일에 매진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건 그냥 이쪽이 그런 거지 상대와는 별 관계가 없는 일 아닌가. 내 친구의 집까지 내가 삼보일배하며 갔다고 해서 그가 날 평생 베프로 생각해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우정에 대한 시를 만 편 써서는 그 중에 고르고 고른 57편의 시로 시집을 만들었다고 해서 목숨까지를 걸어줄 수 있는 우정이 생기는 것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친구와의 우정을 두텁게 만들고 싶다면, 나 혼자 뒤에서 애쓸 게 아니라 그와 더 대화를 하고, 그에게 더 연락하며, 그와의 공감대를 찾아 그것을 나누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썸이나 연애 역시, 우정이 두터워질 때의 그것처럼 함께한 시간과 나눈 이야기들, 그리고 같이 한 일들을 토대로 두터워진다는 걸 기억하자.
그런 과정 전혀 없이 ‘내가 이렇게까지 간절하고 절실하게 말하니, 알아주겠지’하는 건, 상대에게는 그저 뜬금없는 일이며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대 역시 잘 알지도 못하는 어느 친구가 찾아와서는
“난 널 위해 보증을 설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우정에 엄청난 의미를 두고 있다. 그러니 너도 나를 위해 보증을 서줄 수 있었으면 한다. 내가 진짜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하게 말하니 꼭 들어줘라.”
라고 할 경우, 그 친구의 말에 감동을 하긴 커녕 앞으로 피할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자신은 정말 상대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으며 상대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당장 목숨도 걸 수 있다는 게 진심이라 해도,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도 없는 사람이 그런 비장함을 앞세워 다가오면 상대 입장에선 거부감부터 들 수 있다. 모임에서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인데 무슨 안식처가 되고, 기댈 곳이 되고, 우산이 되어주고, 그늘이 되어줄 거라는 얘기를 하며 행복하기 위해 그런 나와 빨리 사랑하자고 하면 이상한 사람처럼도 보일 수 있고 말이다. 이런 들이댐은 결코 상대에게 ‘감동’이 될 수 없는 법이니, 현재 혼자 너무 높은 텐션을 유지하며 앞서가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한다.
3.편지 고백 전, 보여줘야 할 것들은 다 보여줬는가?
고백 편지의 문장을 하나 보자.
“너는 어쩌고저쩌고(칭찬)하니까, 멋진 나와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아 잠깐만 또 손이 펴지질 않아서….
무슨 마음으로 저런 문장을 쓴 건지 모르는 건 아닌데, ‘멋진 나’같은 표현을 사용하려면 자신의 멋있는 모습을 그간 상대에게 절반이라도 보여줬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준 까닭에 상대가 정말 이쪽을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자기 입으로 자기를 저렇게 표현하는 걸 본다면 아무래도 좀 깨지 않을까?
또,
“난 너에게 이런 사람도 되어주고, 저런 사람도 되어주고, 그런 사람도 되어주고 싶고….”
라는 이야기 역시, 그간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소하게 챙겨주거나 가까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않은 채, 뜬금없이 편지로만 너무 요란한 것 역시 믿음이 가진 않는 행위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편지로 고백하겠다는 대원 중엔 연애계획서 같은 걸 발표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와 사귈 경우 내가 너에게 해줄 엄청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대원들이 많은데, 그런 다짐이 상대에게 가서 닿게 하려면 그간 그 비슷한 일들을 상대에게 베푼 적 있다거나 아니면 현 상황에서도 뭔가 상대와 연결된 채 함께하던 게 있어야 한다. 동네 라이딩 같이 하다가 국토종주 하는 거고 민물낚시 같이 다니다 바다낚시도 가는 거지, 그런 교류 전혀 없이 지내던 사람이 백두대간 종주 같이 가자고 하면 ‘친하지도 않은데 내가 왜 같이 가?’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 아니겠는가.
때문에 난, 상대와 사귀게 되면 해줄 것이라는 것들의 1/10이라도, 현 상황에서 좀 먼저 하길 권하고 싶다. 카톡 연락 조금 하다가 기프티콘 보내고 다음 주에 고백하는 그런 거 말고, 일단 좀 상대와 친해지자. 이번 연휴에 뭐 할 건지, 어떤 장르의 영화 좋아하는지, 친가친척들이랑 더 친한지 외가친척들이랑 더 친한지, 해보고 싶은 운동 뭐가 있는지 등 대화할 건 차고 넘치지 않는가.
당장 할 수 있는 이런 일들을 다 놔두곤 ‘사귀면 해줄 일’만을 이야기하며 상대에게 사귈지 말지 선택하라고 하지 말고,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 계단으로 올라가면 2층 올라가는 게 어려운 일 아니다. 그러니 점프해서 오르려 하지 말고, 한 계단씩 올라보길 바란다.
끝으로 몇 가지 더 당부하고 싶은 건,
-고백편지에서 왜 자아비판하며 반성문을 쓰고 있는가?
-돌려 말하고 떠보다 ‘읽씹’의 상황까지 왔다면, 고백을 할 상황이 아닌 거다.
-상대의 선택과 선택 후의 일들까지를 짐작해 말하며 지시나 요구, 부탁 하지 말자.
-‘너와 난 닮은 점이 많다’는 건 억지로 엮는 거다. 혼자 그러진 말자.
-널 이해해, 널 알아, 넌 그럴 거야 라는 것 역시 그냥 내 착각일 수 있다.
라는 것들이다. 아직 보여준 것도 없고 대화를 많이 한 것도 아니니 무슨 고백편지를 자기소개서 쓰듯 ‘성장과정, 고백동기, 연애시작 후 포부’ 같은 걸로 꽉꽉 채워 쓰는 사례가 있는데, 앞서 말했듯 그런 건 편지로 다 해결하려 하지 말고 고백 전에 절반 이상 꺼내 보여주길 바란다. 그리고 고백이라는 건 내 마음을 상대에게 조심스럽게 전하는 것이니,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기억해 뒀으면 한다.
무엇보다 고백은, 만나서 하자. 덜덜 떨리거나, 아무말대잔치를 하게 되거나, 또는 눈물이 나와도 괜찮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상대를 움직여, 부정적임이 확실하던 상황에서 그린라이트가 켜지는 사례가 종종 있다. 거절을 당하면 집에 돌아와 샤워하며 시원하게 한 번 울면 된다. 샤워하며 우는 건 또 그것대로의 맛이 있으니, 인생의 그런 쓴맛도 한 번 경험해 본 셈 치면 된다. 그렇게 샤워하고 나와서 노멀로그에 접속하면 또 내가 매뉴얼에다 낚시 가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어찌되었든 난 이 자리에 늘 이렇게 있을 테니, 그때 또 우리 대화 나누면 된다 생각하며 힘내보자.
▼바닷가에서 숙박업하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장기숙박하며 매일 낚시 할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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