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씨는 재치도 있고, 순발력도 좋고, 유머러스하다. H씨는 20대 때까지는 이성에게 어필하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었으며 자만심을 가질 정도였다고 하는데, 현재 상대에게 들이대는 모습을 보면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훅 들어가선 만나자는 말을 하는 걸 어려워하지도 않고, 어색하지 않게 금방 말 놓고 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왜 서른 이후에는 그 방법이 잘 통하지 않으며, 이번 소개팅녀 역시 주선자에게 ‘좋은 오빠 하나 생긴 것 같아서 좋다’정도의 이야기만 한 걸까?
가장 큰 이유는,
-상대로 하여금 ‘ㅋㅋㅋㅋ’하게 만드는 상황은 잘 만들어가지만, 그냥 그걸로 끝.
이기 때문이다. 축구공 묘기는 화려하게 보여주지만, 정작 축구경기는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대화 중 드립은 잘 치기에 상대를 웃길 수는 있는데, 무게감 있게 진행되어야 하는 대화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내게 보낸 사연신청서에도 H씨는
“자신감이 살아나며 다시 한 번 흥을 돋우고….”
“혜리님이 광고하는 숙취해소 알약도 하나 챙겨서는….”
“너의 눈에서 하트가 나오게 해주겠다는 생각으로….”
라는 문장들을 사용하며 재미있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고, 사연 제목 역시
“무한님, 저 Go? Pause? No?”
라고 적으며 유쾌하고 쿨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너무 그렇게 들뜬 분위기만 유지한다면 좀 가볍게 느껴질 수 있으며, 진심은 그렇지 않은데도 늘 유쾌하고 쿨해 보이려 노력하다간 상대는 정말 그런 줄로만 알게 될 수 있단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건, H씨가 ‘팬서비스’의 느낌으로 상대에게 다가간다는 점이다. ‘내가 뭔가 보여주겠다!’라는 선언은 잘 하는데, 그 선언과 함께 곧장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게 보고 싶으면 날 찾으라는 식으로 마무리를 하고 만다.
“심심할 때 연락해요~”
“필요하면 얘기해요~”
“시간 날 때 톡해요~”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듣고 싶다고 하는 노래 다 불러줌. 말만 해!’식의 선언만 하고 상대가 신청곡을 적어낼 때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상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을 불러주는 게 낫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날 보여주면 되는 건데, H씨는 본편보다 예고편에 더 공을 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 ‘만날 약속을 잡는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다른 대화는 ‘만나자는 말을 꺼내기 전 안부인사 겸 대충 물어보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문제도 있다. 대화를 보자.
H씨 - 뭐해요 날 좋은데.
상대 - 커피숍 왔어요.
H씨 - 커피숍! 커피숍 가면 주로 뭐 마셔요?
상대 - 단 거 싫어해서 그냥 아메리카노 마셔요.
H씨 - ㅋㅋㅋ 나도 그런데! 좋은 시간 보내고 심심할 때 연락해요~
이렇다 할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마무리 되는 것, 사실 별 관심도 없는데 그냥 예의상 물어본 것 같은 것, 심심할 때 연락하라며 그저 상대에게 발신기를 주고 물러서는 것 등이 전부 보이는 대화다. 늘 얘기하지만 상대와 연락이 닿고 있는 지금도 둘의 관계는 진행 중인 것이며 무슨 이야기든 하나 둘 나눠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니, 그걸 그저 약속 잡을 수단으로만 쓰거나 출석체크 및 생존신고만 하는 창구로 만들진 말자.
상대 - 아 오늘 진짜 바빠 ㅠㅠ
H씨 - 응~ 알겠어~ 수고해~
이런 식이라면, 그냥 시간 있고 놀 수 있는 때에만 연락해 수다를 떨 수 있는 ‘재밌는 오빠’의 역할만 하겠다는 것과 같다. 같이 놀 준비 하고 있을 테니 힘든 거, 어려운 거, 바쁜 거 다 끝나면 연락하라는 이야기만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말이다.
운 좋게도 H씨의 경우 현재 상대가 먼저 만남을 제의하거나 말을 걸어올 정도로 상황이 좋은 편이니, 위에서 말한 부분들을 참고해 H씨의 진중하고 속 깊은 모습도 좀 보여주고, 드립 쳐서 상대를 한 번 더 웃게 해주려는 것보다 상대가 마음속에 담고 있는 말들을 한 번 더 들어줘가며 상대의 안식처가 되어보길 바란다. 이십대에 연애할 때에야 당장 연애를 즐기고 싶으니 그저 방방 뜨기만 해도 문제없었겠지만, 삼십대의 연애엔 상대가 반평생을 걸고 믿고 함께할 수 있는 보금자리도 반드시 마련되어 있어야 함을 염두에 둔 채 만나보길 바란다.
▼달 보며 소원빌기 대행 서비스 합니다. 소원 적어주시면 내일 밤에 대신 빌어드림.
'연애매뉴얼(연재중) > 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썸인 듯 스킨십 하다가, 연락두절 되는 남자만 만나요. (53) | 2017.10.16 |
---|---|
헤어진 지 1년, 비난과 차단과 폭주와 무시로 이어지는 관계 (27) | 2017.10.04 |
편지나 장문의 카톡으로 고백하기 전 체크해야 할 세 가지 (32) | 2017.09.29 |
상대에 대한 호감보다 동정심이 앞서는 남자들의 문제 (40) | 2017.09.20 |
몇 년째, 매번 짝사랑만 하는 여자들을 위한 연애매뉴얼 (29) | 2017.09.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