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몇 살 때였나, 집 밖에 나가 친구를 잠깐 만나고 들어와선 어머니께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벌써 만나고 들어온 거야? 집 앞에서만 잠깐 보고? 같이 뭐 안 마셨어? 저녁 먹을 시간인데 밥 먹었냐고 묻지도 않았어? 걔 배고팠을 텐데 밥 먹자고 말했어야지. 걘 너 보러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땐 나도 어린데다 뭔가 혼나는 느낌에 겉으론
“배고프다고 안 하던데? 밥 먹고 왔겠지. 잠깐 보자고 해서 보고 들어온 거야. 아 몰라.”
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내가 참 세심하게 돌볼 줄 모르며 ‘얼굴 보자고 했으니 진짜 얼굴만 보곤 들어와 버리는’ 고지식함이 있다는 걸 반성했다. 그래서 그 이후론 누굴 만나게 되면 밥은 먹었는지를 꼭 묻게 되었으며, 둘 다 밥 먹은 상황이라 해도 밖에 서서 얘기만 나누는 게 아니라 커피숍을 가든 편의점을 가든 하게 되었다. ‘상대가 하려던 말’만 듣고 오는 것 외에 안부나, 상대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도 묻게 되었고 말이다.
L양의 사연을 읽으며 저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만약 L양에게
“상대는 어렸을 때 어디 살았대요?”
“친구들이랑 주로 뭐 하면서 논대요?”
“요즘 가장 사고 싶은 아이템이 뭐래요?”
라는 질문을 하면, L양은
“아, 그런 얘기는 안 하던데요?”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L양은 내게
“소개팅에서 리액션도 나름 열심히 했고, 경청이나 칭찬하기, 잘 웃기 등도 열심히 하긴 했어요. 하지만 제 그런 피드백을 상대가 어떻게 느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건 ‘피드백을 잘못해서’라기보다는 ‘피드백만 해서’ 라는 부분이 더 큰 문제다. 물론 피드백 역시 그것에 너무 신경 쓴 까닭에 영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는데, 여하튼 상대라는 사람을 궁금해하거나 상대와 더 친해지기 위해 내 얘기도 꺼내는 만남이 아니라, 소개팅 자체에 의의를 둔 채 깔끔하고 예의 있게 얼른 마무리하고 들어와 쉬려는 느낌이 더 강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난 L양에게, 상대를 ‘이 남자분’으로 두는 것으로 한 발 나아가 ‘요 친구’ 정도로 두며, 꼭 약속을 잡고 얼굴을 보기로 한 시간만 본편인 게 아니라 그 외에 서로 연락을 하고 지내는 시간까지도 둘의 관계가 진행 중인 거라 생각하길 권해주고 싶다.
지금 L양이 보이는 모습이
-평소에는 주차, 만나는 건 주행
이라면, 이젠
-평소에는 주행, 만나는 건 가속
정도의 느낌으로 만나보잔 얘기다. L양이 상대에게 호감을 느꼈고 애프터까지 잡혔다면 L양도 일단 ‘좋은 친구’가 생겼다는 생각으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연락하고 대화하고 그래야지, 그냥 혼자 기쁨과 설렘을 누릴 뿐 연락은 ‘몇 시에 어디서 보자’나 ‘잘 들어갔냐’에만 그치면 곤란하다.
“상대가 적극적이었으며, 애프터까지 문제없었던 만남이 흐지부지되는 걸 몇 번 겪으며, 전 약간의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젠 ‘어차피 애프터 후에는 또 끝이겠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제가 더 알아가 보고 싶은 분들과의 관계가 그렇게 되어버리니 씁쓸한 느낌까지 듭니다.”
L양은 지금까지 연애도 상대가 적극적으로 리드하는 연애를 주로 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앞으론 ‘연락부터 먼저 좀 자주’하는 것으로 조금씩 변화를 줘봤으면 한다. 만나고 들어갈 때의 연락 역시, 너무 막 딱딱하게 ‘집도착 후 연락’, ‘다음 날 아침에 연락이 왔다 보곤, 안 왔으면 점심때쯤 연락’하는 식으로만 하지 말고, 그냥 집에 들어가면서도 오늘 차가 막힌다거나 생각보다 전철에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해도 되고, 아까 말 못했던 게 지금 떠올랐다며 이어지는 주제를 꺼내 대화해도 된다. ‘다음 날 아침 연락’역시, 상대에게 연락이 오면 합격인 거고 아니면 불합격이라는 생각같은 걸 하지 말고, 그냥 먼저 눈 떠서 연락 와있으면 대답하고 안 와있으면 좋은 아침이라고 톡을 보내보자.
“저 같은 사람은 소개팅 같은 ‘단기간에 나를 어필해야 하는 만남’으로는 이성을 만나기 적합하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게 좋은지도 궁금합니다.”
L양은 애프터를 문제없이 받으니,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첫 만남에서 서로 좀 긴장한 상황이고 초면이니 어색할 수 있어 그렇다손 칠 수 있는 부분들이, 애프터에서도 그대로 반복되는 데다, 연락이 빈도 역시 낮으니 상대는
‘상대방이 내게 묻는 것도 별로 없고 연락도 없는 걸로 봐서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굳이 내가 더 계속 연락하고 만나자고 권해서 만날 필요가 있는 건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이건 위에서 이야기한 것들을 활용해 충분히 교정 가능한 부분이니, ‘아무 얘기도 안 하며, 지금 서로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는 시간’을 줄여가는 것을 목표로 관계에 더 바짝 다가앉아 보길 권한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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