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씨, 지훈씨가 최대한 날카롭게 적어달라고 말했기도 했고, 또 남자끼리니까 변화구 같은 거 없이 직구로 갈게. 일단 이건 연애가 아니야. 연애라기보다는 연애 역할극에 훨씬 가깝고, 알게 된 지 며칠 만에 여보 사랑해 쪽쪽 뭐 그러다가 한 2주 지나서부터 한쪽이 점점 흥미를 잃거나 다른 한쪽이 자신의 연애판타지를 펼치려다 끝나는 관계라 할 수 있어.
이건 어느 정도 정형화, 패턴화 되어 있는 까닭에 이 유형에 대해 꽤 디테일한 보고서까지 작성할 수 있을 정도야. 대략
-이십 대 중후반의 연애경험 별로 없는 애정결핍 남자
-이십 대 초반의 금사빠거나 진입장벽이 아주 낮은 여자
의 조합이면 발생하기 쉬우며, 당장 이 세상 그 누구와의 관계보다 두 사람이 친밀한 사이라 생각하지만 정작 서로에 대해서 아는 건 별로 없다는 특징이 있지. 좀 나쁘게 말하자면, 굳이 상대가 아니라 어떤 이성이었어도 요 정도의 반응을 보여줬다면, 그 또는 그녀와 지금과 똑같은 애정표현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특징도 있고 말이야.
여하튼 안타까운 건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이런 식의 관계를 맺는 게 연애라거나 사랑이라 생각하며 매번 똑같은 패턴만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대로라면 지훈씨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테니, 오늘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 자, 출발!
1. 관심사는 오로지 ‘내가 꿈꾸는 연애’인 문제.
이런 식의 연애 역할극은, 한쪽이 심심해서 계속 수다를 떨거나 다른 한쪽의 드립에 무조건 긍정적인 반응만 보여줘도 시작될 수 있어. 때문에 외로움과 심심함, 그리고 애정에 대한 결핍의 농도가 높은 사람들이 찾기 쉬운 어플에서, 몇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기만 해도 ‘우리 오늘부터 1일’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해.
뭐 그렇게 시작했더라도 길게 가는 커플이 있기도 하지. 서로를 자신의 삶에 초대했다는 생각으로 찬찬히 가까워져 가면 결과가 긍적적이기도 해. 그런데 그렇지 못한 커플들을 보면, 그냥 사귀게 된 첫날부터 그냥 상대가 자기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거나, 그날부터 온갖 짐 다 싸들고 들어와 동거부터 하는 식으로 시작하거든.
심지어 상대가 이성인 척 하는 동성인데, 오로지 메신저로만 상대와 만난 까닭에 그걸 모른 채 여보 사랑해 쪽쪽 하는 경우도 있어. 그 관계를 유지해가는 동력이 ‘연애에 대한 이쪽의 욕구와 외로움’인데다, 상대가 누구든 무엇이든 그걸 다 받아주고 반응만 해주면 ‘연애 시작하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펼치기 바쁘니 당황스럽게도 그리되는 거지.
상대라는 사람을 알아가며 사귀는 게 아니라, 그냥
-여자랑 사귈 때 잘해줘서 멋진 남자로 보이고 싶은 모습.
-상대도 얼른 내게 올인 하며 사귀게 만들려는 모습.
-사랑해서 어쩔 줄 모르는 연인처럼 이것저것 하려는 모습.
등을 보이는 거라고 할 수 있어. 때문에 상대가 아프다고 해도 ‘그래도 나와서 잠깐이라도 나랑 만날 순 없는지’를 물어보기만 하거나, 일이 생겨 바쁘다는 사람에게도 그 사이사이 애정표현을 해달라고 조르게 되지. 지훈씨는
“전 정말 달달하게 연해하고 싶은데 왜 그게 안 되는 걸까요? 제가 너무 조급증에 시달리는 건가요?”
라고 묻지만, 조급증이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저 부분들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
2. 사귀는 걸 쉽게 생각하며, 인기를 즐기고픈 사람들.
연애에 대한 의미나 진지함이 모두 같을 거란 생각은 위험할 수 있어. 그간 노멀로그에서는 연애에 대한 의미부여 최저치가 3할 정도인 사연들을 마지노선으로 다뤄왔는데, 그것보다 훨씬 적거나 일주일 만에도 마음이 변하는 사례가 많거든.
그 정도면 뭐 굳이 매뉴얼 발행까지 안 해도 금방 와해 되며 저절로 잊히기에 놔뒀던 건데, 지훈씨 같은 사람들이 그런 상대를 경험하며 집착하거나 미련을 갖기 시작하면, 그게 막 2년 3년 후딱 넘어가기도 해. 상대가 떡밥을 안 던져줘도, 어장 속에서 자력으로 먹을 것을 찾아가며 버티니까.
그런 상대들이 구하는 연애상대는
-나랑 24시간 연락하는 게 가능하며 열정적으로 구애하는 사람.
인 경우가 많아. 그래서 대략 일주일 정도 서로에게 무섭게 빠져들 때에는 여보 자기 서방님 막 그러곤 하는데, 그러고 난 뒤에는 급하게 흥미를 잃기도 해. 원하는 만큼 다 받아 봤으니 이젠 좀 질린다거나,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만났던 건데 상대가 바라는 것들까지 등장하니 귀찮아지는 거지.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상대가 먼저 막 빨리 대답하라거나 애정표현 안 하냐면서 이쪽을 다그쳐 사랑꾼으로 조련시켜. 그런 뒤 이쪽이 모든 신경을 연애에 집중하면, 그때부터는 집착하지 말라거나 부담스럽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해. 자신이 심심하고 외로운 새벽엔 “여보야 자는 거야? 연락 안 되네~”하면서 부재중 메시지를 여러 개 남기기도 하는데, 그래서 이쪽이 그럴 때마다 상대와 연결되어 있으려고 노력하면, 상대는 자신이 놀고 싶지 않을 땐 부담스럽게 하지 말라는 식으로 반응하기도 하지.
저게 참 약오르며 사람 미치는 거잖아. 상대가 놀고 싶을 땐 이쪽이 즉각 반응해야 하며 다른 건 다 제쳐둔 채 집중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나 반대의 경우일 땐 상대가 ‘나중에 연락해’ 따위의 반응만 보이는 거 말이야. 이런 사람들 중엔 사귀는 걸 쉽게 생각해 일단 사귀며 관심을 받고 즐기다 방치해두거나, 그저 인기를 즐기고 싶어 진입장벽을 낮춘 채 초대해 놓고는 집을 비우는 사람들이 있으니, 혹 상대에게 그런 모습이 있는 게 아닌지도 꼭 세심하게 살펴봤으면 해. 그렇지 않으면 상대도 연애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자꾸 밀어내는 것 같다고 착각해, 점점 갈급해지기만 할 수 있으니까.
3. 기대하고 요구하고 실망하고 삐치기인, 연애패턴.
저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지훈씨와 비슷한 타입의 사람들은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연애판타지를 펼치기 위해 전력 질주를 해. 이제부터 모닝콜을 하자, 매일 서로에 대해 느낀점을 말하자, 하루에 한 가지씩 칭찬을 하자, 매일 셀카를 찍어 보내며 인사를 하자 등을 제안하고 그걸 실천하려 하는 거지.
그런데 저런 것들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되면 부담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둘 중 하나가 빼먹기라도 하면 다른 한 쪽은 ‘마음이 변했나? 이제 그러기 싫은가?’하며 시무룩해진 채 실망의 늪에 빠질 위험이 있거든. 네가 안 하니 나도 앞으로 안 하겠다, 식의 복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말이야.
또,
-연인이니까, 모든 걸 다 공유하며 모든 이야기를 다 웃으며 해야 한다.
라는 전제를 깔아버리는 것도 문제야. 아니 조증이 있는 것도 아닌 어떻게 항상 웃을 수 있으며, 혼자 좀 생각할 시간도 필요한 법인데 어떻게 일 생기자마자 다 털어놓고는 위로받는 즉시 괜찮아질 수 있겠어. 게다가 털어놓을 수 있는 환경도 아닌데다 털어놔도 ‘내가 위로해줬으니 괜찮아져라’라는 답을 내밀 뿐이니, 상대로서도 말을 안 꺼내게 되는 걸 수도 있고 말이야.
더불어 상대가 내 연인이 되었다고 해서, 상대의 일상과 대인관계까지를 다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꿔주길 바라는 것 역시 갈등을 만들기 쉬운 부분이야. 특히 연애에 집착하며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소유하려는 사람들은 상대를 어린애처럼만 생각하며 전전긍긍하곤 하는데, 상대는 어린애가 아니잖아. 그런데 그렇게 애취급을 하며 연애에 더 집중하라고 말하고, 나아가 그 ‘집중’이라는 게 내가 하고 싶은 얘기 많고 물어볼 것도 많다며 나만 보게 돌려 앉히는 거라면, 그럴수록 상대는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커질 수 있을 거야.
이 부분은 상대가 상식적으로 이해 가능하며 심지어 착하기까지 한 사람이라 해도 지훈씨의 행동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이니, ‘상대와 함께 가는 것’보다는 ‘상대에게 내 속도대로 빨리 뛰어오라고 잡아끄는 것’에만 너무 마음을 쓰고 있었던 건 아닌지 돌아보길 권할게. 한 발 물러서서 보면 큰 문제 없이 굴러가고 있는 연애인데, 지훈씨의 전력 질주 때문에 상대가 느려 보이며, 그래서 지훈씨는 마음이 바짝바짝 말라가며 인내의 한계에 부딪히는 느낌이 아닌지 꼭 한 번 살펴봐.
지훈씨는 내게
“저도 하고 싶은 말 많고, 서운한 점도 있고, 또 힘든 것도 많은데, 그런 것도 표현하지 못하니 더욱 힘든 것 같고….”
라고 했는데, 그게 진짜 상대 때문인지 아니면 지훈씨가 계속 염려되고 불안해지는 지점들을 만들어서인지도 한 번 생각해 봐. 연휴 때만 해도 상대는 연휴 때 행사가 있으니 그걸 준비하느라 바쁜 걸 수 있는데, 지훈씨는 ‘행사는 행사고, 또 오늘이 행사인 건 아니니 오늘은 나랑 더 대화하거나 만나고 싶어 할 수 있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버리잖아. 상대는 상대인 건데 왜 상대가 나랑 똑같지 않냐며 불만을 갖기 시작하면, 그 답은 영영 구하지 못한 채 빨리 나처럼 행동하라고 강요하다 연애를 폐업하게 될 수 있어. 이건 다른 사람과 다른 연애를 할 때에도 반드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부분이니, 꼭 교정할 수 있길 바랄게.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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