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라면, K양과 나는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다. 다음번 썸이 시작되어도 K양은 상대에 대해 비슷한 평가를 하게 될 것 같고, K양의 지인들도
“넌 어떻게 만나도 그런 남자들만 만나냐. 걔도 아닌 것 같다. 버려.”
라는 이야기를 할 것 같다. 비슷한 경험을 반복하게 된 K양은
‘나이 들면 남자들이 다 이상해지나? 아니면 이상한 남자들만 남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지뢰만 골라 밟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내게 또 사연을 보내게 될 것 같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기엔 그게 ‘전부 상대들이 이상한 남자라서, 어장관리하는 남자라서 벌어진 문제’는 결코 아닌 것 같으니, K양이 놓치고 있는 부분과 함께 고쳐야 할 부분들을 함께 살펴봤으면 한다. 출발해보자.
1. 형식적인 대화만 하게 되는 게 상대 책임?
K양은, ‘상대가 뭔가를 더 얘기하지 않으면 대화가 끊어지게 되는 대화법’을 사용하고 있다. 전문용어로는 ‘블랙홀 대화법’이라고 하는 건데, 그것과 비슷한 ‘자체종결형 대화법’이
“오늘 A라고 하셨죠? A 잘 하시고, B도 잘 하세요~ 파이팅~”
식으로 혼자 알아서 기-승-전-결을 한 문장에 몰아 말하는 거라면, ‘블랙홀 대화법’은
상대 – 여자씨는 뭐하세요? 저녁은 드셨나요?
여자 – 영화봐요~
상대 – 무슨 영화요?
여자 – 무슨무슨 영화요~
상대 – 찾아보니 이러이러한 내용이던데, 맞나요?
여자 – 네네~
상대 – ㅎㅎㅎ
(얼마 후, 대화를 더 하고 싶은 여자가 메시지를 보냄)
여자 – 교회다니신다고 하셨죠?
상대 – 네 뭐뭐 교회 다니고 있어요.
여자 – 네네~
상대 – 근데 갑자기 교회는 왜..
여자 – 궁금해서요 ㅎㅎ 굿밤요~
라는 식으로 ‘대답을 하긴 하는데 그걸로 끝이라서, 거기서 더 나아가려면 상대가 무던히도 애를 써야 하는 대화법’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저런 대화법을 사용해도 ‘이성으로부터의 대시가 끊이지 않는’ 상황이라면 아쉬운 사람이 계속 우물을 파니 목마를 일 없겠지만, 이제 만나게 되는 이성이 대개 30대 후반을 넘어선 남자들이라 이성이나 연애에 대한 환상이 많이 깨져 있다거나, 상대가 단순히 연애할 사람 찾는 게 아니라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상황이라면, 굳이 저렇게 단답을 하거나 별로 되묻는 일이 없는 사람과 굳이 더 대화를 이어가려 하진 않을 수 있다.
K양도 후반부에는 점점 말을 길게 하며 상대에게 질문을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물으면 내가 답한다’의 패턴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서로의 공감대를 찾거나 발목 이상 깊이의 대화를 나누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네네~ 배고프시겠네요~ 얼른 식사하세요~~”
“네~ 수고하셨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
“ㅋ 쉬시다 주무세요~~”
상대가 열정적으로 들이대지 않기 때문에 형식적인 대화만 하게 되는 건 분명 아니다. K양의 저런 리액션은 ‘대화를 더 이어가려면 자꾸 새로운 주제를 꺼내야 하고 다른 걸 물어봐야 하는 상황’을 만들게 되고, 그러다 보니 상대에겐 그게 피곤함으로 느껴질 수 있다. 퇴근이 늦어서 이제야 집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상대에게, K양은
“네ㅋ 피곤하시겠네요~ 어여 씻고 주무세요~”
라는 이야기만 하지 않았는가. 그걸 상대가 ‘저 체력 좋아요~’라는 말로 받으며 대화를 이어가려 했지만, K양은 다시
“ㅎㅎ 잘자요~”
라는 이야기만 했을 뿐이다. 대화가 발목 정도에서 머물고 만 게, 꼭 ‘상대의 열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K양이 상대가 더 들이대길 기다리기만 해서’는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한다.
2. 그렇다면, 친구들의 평가는 왜 그런 걸까?
그러니까 그건, 소개팅하고 나서 친구에게
“야 근데 얘는 안부인사 말고는 뭐가 없어. 점심때도 밥 잘 먹으라고 하고 끝이야. 저녁엔 저녁 먹으라고 하고. 무슨 식사알림봇인줄….”
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친구로서는 그 얘기만 듣곤 대략 그런 종류의 관계를 떠올려본 후 리액션을 해주기 마련이다. 때문에 K양의 경우, 저 위에서 말한 K양의 ‘블랙홀 대화법’에 대해선 침묵한 후 ‘상대의 반응’만을 친구에게 전달하면, 친구로서는 그 상황을 그저 자신에게 대입한 후 ‘상대의 문제’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K양의 한 친구는
“보통, 남자들은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그런 식으로 대화하지 않지.”
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남자가 여자에게 완전히 반한 상황’과 ‘현재의 상황’만을 비교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K양은 ‘상대의 어장관리’라는 자신의 심증을 뒷받침해줄 저 조언을 든든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걸 뒤집어
-K양은, 여자가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을 때 대하듯 상대를 대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K양은 분명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카톡대화만 놓고 보자면 K양은
-상대가 얼른 더 열정적으로 들이대줬으면 하는 마음은 크지만, 상대에 대해 그다지 궁금한 건 없음.
인 마음을 가진 듯 보이니 말이다.
오히려 남자 입장에서 보면, S양은
-아침인사 하면 좋은 하루 보내라고 하는 여자.
-점심인사 하면 밥 맛있게 먹으라고 하는 여자.
-저녁인사 하면 피곤할 테니 얼른 자라고 하는 여자.
로 느껴진다. 특히 내가 가장 당황했던 건, 보통 썸을 탈 때 둘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저녁 8시 이후인데, 그때가 되면 K양은 두세 시간 침묵했다가 저녁 11시쯤 되어 상대에게 얼른 자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이건 K양에게 좀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는데, K양은
A.상대가 ‘빨래를 좀 돌려야겠다’고 했다.
B.그 얘기를 한 건 지금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C.내 대답 조차 상대의 대답을 요하는 것 같아 보일 수 있으니 침묵한다.
D.빨래 두 번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 지났는데 상대에게 연락이 없다.
E.빨래 잘 했냐고 묻는 것과 동시에 난 잔다고 통보한다.
라는 식으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빨래 뿐만 아니라, 상대가 ‘뭐뭐 좀 하려 한다’고 했을 때 대부분 저렇게 받아들인 까닭에 즉시 침묵했던 것이다. 보통 그럴 땐 “이욜 빨래도 직접 하는 남자! ㅎㅎ”등의 멘트로 받은 뒤 흰옷 빨래, 검은옷 빨래, 세탁기 얘기 등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K양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기다리고 말았다. 여하튼 그래서 그런 까닭에 그게 그렇게 된 건데, 이걸 친구에게
“빨래해야겠다며 두 시간 동안 연락 없더라. 마음이 있는 남자라면 빨래 핑계로 막 두 시간씩 방치해놓고 그러진 않지?”
라고 물으면,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는 판정 말고 다른 판정이 내려지긴 힘든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봤으면 한다.
3. 상대만 노력해야 하고, 상대만 평가받아야 하는 걸까?
처음부터 너무 진지하기만 하면, 그리고 시작부터 상대를 평가해 점수만 매기려 하면 안 된다. 소개팅이라는 게 두 사람의 인연이 닿는 기회인 거지,
-남친 지원자에 대한 면접과 수행평가
인 것은 아니잖은가.
난 K양이
“만났을 때 저를 어려워하는 느낌이 없더라고요.”
“걸을 때 제가 살짝 뒤처져도 절 잘 안 챙겼어요.”
“같이 영화를 보는데, 편한 자세로 보더군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큰 난감함을 느꼈다. 아니 좀 그게, 그런 것만 볼 게 아니라 이쪽도 ‘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눈을 반짝여야 하는 건데, 채점표를 든 채 관찰자 시점으로만 상대를 바라보니 자꾸 ‘마이너스’ 체크를 할 일들만 늘어가는 것 아니겠는가.
“상대와 카톡으로 대화를 하다 보면, 기분이 찝찝하고 더러워지고 그러더라고요.”
K양의 카톡을 나는 세 번 이상 읽었는데, 어디서 기분이 찝찝하고 더러워져야 하는 건지 솔직히 모르겠다. 아주 단순하게 이걸 ‘친구와의 대화’라고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러면 전혀 기분이 찝찝하거나 더러워질 부분이 없는 건데, K양은
-난 이미 상대에게 호감이 있음. 상대가 사귀자고 하면 사귈 것임. 그런데 상대는 내게 더 열정적으로 들이대지 않고, 먼저 막 만나자거나 대화를 길게 이어가려 하지 않음.
이라는 생각에 비뚤어지고 만 거다. 때문에 상대가 안부인사를 하면 ‘에휴, 또 그냥 안부인사야?’하는 생각으로 답장을 안 하기도 했고, 나중엔
-이거, 어장관리하는 거 아니면 마음 없는 거 둘 중 하나다. 호감이 있으면 상황이 어떻든 극복했을 거 아니냐. 여하튼 너랑 나는 인연이 아니다.
라는 뉘앙스로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그냥 상대를 하나의 사람으로 둔 채, K양이 친해지고 싶은 만큼 다가가 보면 안 될까? 친구와 친해질 때 ‘누가 먼저 연락을 하는가?’, ‘누가 먼저 만나자고 하는가?’, ‘누가 더 질문을 많이 하는가?’ 등을 체크해가며 친해지진 않을 것 아닌가. 친구에 대해 혈액형이 뭐라서 저런가 보다느니, 첫째라거나 막내라서 그런 것 같다느니, 인적성 검사 결과에 따라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느니 하는 식으로 관찰하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다. 썸이든 연애든 둘이 같이 하는 거니, 그저 관찰만 하다가 “내 그동안 자네를 쭉 지켜봐 왔는데, 자네는 어장관리 아니면 호감 부족이야. 쯧쯧. 못 난 놈.”하진 말았으면 한다.
상대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인지는 약속을 해봐야 아는 거고, 상대가 받은 만큼 줄 줄 아는 사람인지는 줘봐야 아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혹 그런 과정을 거치다 상대가 내 기대와는 달리 행동해 내가 상처나 손해를 보게 될지 모른다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저 상대의 작은 태도에서 낌새를 눈치채려 하거나 이쪽에서 상대를 방치했을 때 상대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고만 할 수 있다. 그런 태도를 고집할 경우 아무것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며 ‘좋은 사람’과 연이 닿아도 그를 돌려세우게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될 것 같으면 한다’의 마음 말고 ‘일단 해봐야, 되는지 안 되는지를 알 수 있다’의 마음으로 상대를 만나보길 바라며, 자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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