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양을 위한 이전 매뉴얼에서 내가
“‘대화의 주인공은 나야 나’가 되면 안 됩니다. 기-승-전-내 얘기가 되는 걸 주의하세요. 이쪽은 내가 먹은 식단 자랑하면서, 상대가 바빠서 라면 먹었다는 얘기를 하는 걸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 생각하는 듯 넘어가 버리면 안 됩니다.”
라는 이야기를 한 건, 둘 다 주인공인 것처럼 핑퐁핑퐁 대화를 하라는 거였지, 북북서로 진로를 아예 바꿔서는 상대를 주인공을 놓곤 팬클럽 활동을 하라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H양은 그걸 오해했는지, 대화를 대부분
“아, 오빠~ 있잖아….”
“오빠오빠~ 오빠는….”
“오빠는 오늘도 ~인 건가?”
라는 식으로 하고 말았다. 그러면 그건 그것대로의 문제가 또 발생하는 건데….
H양의 얘기를 해도 된다. 상대의 질문에 ‘내 얘기’로 대답하되 다만 거기다 ‘And you?’를 붙이라는 거지, 극단적으로 태세전환 해 인터뷰어로서만 활동하란 얘기가 아니었다. 이걸 오해한 H양이, 이번엔
‘빨리 뭔가를 물어야 해. 상대 위주의 대화! 밥 먹었냐고, 바쁘냐고, 안 피곤하냐고 얼른 다 물어봐야지!’
하면서 ‘안부 못 물어 죽은 귀신’에 빙의 되었던 것 같다. 어떻게든 빨리 뭘 더 물어서 ‘상대를 주인공으로 하는 대화’를 해야 한다는, 그런 강박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 이것 외에도 새로 발견한 문제들이 있는데, 그건 아래에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자, 출발!
1.썸은, 고백을 받기 위한 도구일 뿐일까?
내가 H양의 이번 사연을 읽으며 의아했던 지점은, H양이
“난 어디서든 예쁘다는 소리 듣고 막 캐스팅 될 정도임. 근데 상대는 아님. 상대 지인들이 잘생겼다고 해주는 것 같은데 그 정도는 분명 아님. 그리고 난 또래에 비해 경제력도 괜찮은데, 상대는 그냥 또래 정도임.”
이란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었다. H양이 봤을 때 자신보다 별로인 지점이 훨씬 많은 상대라면, 그런 상대와 왜 사귀어야 하는 걸까?
H양은 상대에 대해 ‘이 사람, 이런 부분은 진짜 멋있다’고 느낀 지점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소개팅으로 만났고 상대가 엄청 띄워주는 걸 보니 곧 사귀게 될 것 같다며 고백을 기다렸던 것 같다. 하지만 상대가 만나자는 얘기를 잘 하지 않으니, 그냥 약올라서 ‘빨리 나한테 고백해라!’라는 마음으로 분노를 축적해갔다. 바라는 게 ‘연애’인 까닭에 지금은 어떤 상황에서든 미소를 지으며 예쁜 모습만 보여주려 하니, 필연적으로 상대에 대해 진짜 궁금하거나 마음 쓰이는 지점도 없었고 말이다.
H양이 상대에게 선물을 하고 나서, 그것에 대해 내게 말한 부분을 보자. H양은
“난 선물을 주는 노력까지 했음. 근데 이 X끼는 빈손으로 옴.”
이라고 했는데, 이런 부분이 솔직히 좀 많이 이상하다. 상대가 막 적극적으로 만나자는 말을 안 한다면서 H양은 또 내게
“이 X끼는 무슨 생각인 걸까요. 이상한 X끼.”
라고도 해다. 이게, 진짜 호감 가는 상대가 내게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속상해하는 것과는 거리가 좀 있는 것 같다. 그것보다는 어느 모로 보든 상대가 내게 열렬히 구애하는 게 맞는데 그러지 않고 있고, 또 그런 와중에 내가 노력한답시고 먼저 말도 걸고 선물도 하는데 상대가 빨리 들이대지 않으니, 그저 그냥 약만 바짝 오른 느낌이다. 보통 요정도면 내게 반해서 무릎 꿇고 구애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더 멍석을 넓게 깔아줘 가며 고백을 유도하려는 듯한 그런 느낌 말이다.
완전히 끝난 상황에서 상대에 대한 원망만 남아 막 이 색히 저 색히 하는 거면 이해하겠는데, 그것도 아니다. H양은 내게 상대와의 관계가 진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묻고 있고, 상대를 사로잡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난, 그런 마음을 품은 채라면, 상대와 연애를 해봐야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겠나 싶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해 버리면, 또 그냥 연애를 위한 연애, 초반에 역할극 좀 하다가 별로 친하지도 않은 관계니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상대가 남자친구가 되었으니 애정표현도 하고 달달한 얘기도 하는 거지, 진짜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닌 상태로 말이다. 그래서 난, 연애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현재 상대와 가장 높다고 해서 무작정 썸 타지 말고, 진짜 H양이 호감과 매력을 느끼는 사람과 썸을 타길 권해주고 싶다.
2.진심으로 안 대하고, 자꾸 시나리오를 쓰는 문제.
상대가 자꾸자꾸 H양에게 칭찬하던 시기에 H양이 했다는 생각을 보자.
“그 날 만나러 나가면서, 상대가 사귀자고 하면 ‘좀 더 친해져보자’는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어요. 고백에 한 번 튕기는 상상을 하며 나갔었는데….”
뭐 그게 꼭 ‘해서는 안 되는 상상’인 건 아니지만, 저 태도엔 역시나 진중하게 마음 대 마음을 맞춰보려는 모습보다는, ‘고백받기 게임’을 하려는 듯한 모습이 더 강하다.
H양은 바로 이전의 썸남과 썸을 탈 때에도
“한 번 더 운을 띄워 볼 예정인데, 뭐라고 하면 좋을지 알려주세요.”
라는 이야기만 하지 않았는가. 그 부분에서 남들은 그냥 ‘본래 내가 남들과 맺는 관계’에서 좀 더 집중하고 좀 더 애정을 가진 채 자연스레 썸을 타는데, H양은 썸이 보통의 대인관계와는 완전 다른 두뇌게임이나 심리전이라 여기며 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자꾸 새로운 기술, 신박한 방법 같은 걸 찾아 상대를 구애하게 만들려 들고 말이다.
“제가 ‘바쁘긴 하지만 오빠 볼 시간은 있지~’라고 하니까, ‘그으래? ㅎㅎ’라고 답하더라고요. 전 뭘 흐흐거려 하면서 쏴붙이고 싶은 걸 진짜 꾹꾹 참았습니다. 제가 저렇게 얘기하면 약속 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연타로 물먹은 기분입니다.”
H양은 속으로 하는 생각과 겉으로 내보이는 표현이 너무 다르다. 때문에 카톡만 보면 H양이 현재 신난 채 즐거운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그게 속마음과 다른 연기이며 속으로는 빨리 결판이 나지 않는 것에 대한 조급증과 불만을 품고 있다. 그럴수록 H양은 ‘이런 마음을 들키면 안 되지’하는 생각으로 정반대의 표현만을 하고 있고 말이다.
“가장 최근의 대화는, 제가 부정적인 대답을 듣고는 확실하게 정리하려고 던진 말들이에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던진 건데, 거기엔 또 부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니….”
자꾸 이렇게, 저 멀리 서선 뭔가를 던져 반응만을 보려는 게 참 안타깝다. 그냥 상대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내 울타리’ 안에 둔 채 자주 연락하고 친근하게 대화하면 되는데, H양은 썸을 타도 상대를 이방인으로 둔 채 자꾸 어떤 기술을 사용하려 들거나 일부러 만든 얘기로 떠봐 상대의 속마음을 훔쳐보려 할 뿐이다. 그러지 말고 그냥 좀, H양도 본심을 꺼내놓고 만나면 안 되는 걸까?
3.“저를 만만하게 봐서 그러는 건가요?” 응?
넘치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쉽게 부끄러워질 수 있으며,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 일어나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채 혼자 분노하거나 공격적으로 변할 수 있다.
자기 입장에서 하향지원했다고 생각하는 회사에서 탈락하자 찾아가서 이력서를 받아오려는 사례, 자신이 유명인인데 알아서 모시진 않고 비행기 좌석 업그레이드 안 해줬다고 까내리는 사례, 환자나 의뢰인과 언쟁을 하다가 상대가 ‘아저씨’라는 호칭을 썼다고 울그락불그락 해지는 사례, 나 원래 연애사연 같은 거 보내는 사람 아니지만 사연 보냈는데 내 사연 왜 발행 안 하냐고 화를 내는 사례처럼 말이다.
저것과 비슷한 모습이 H양에게서도 보인다. H양은
상대가 내게 열렬히 구애하지 않는다 -> 날 만만하게 생각한다.
라는 이상한 해석을 하며, 주말에 시간 빈다는 걸 은연중에 드러냈는데 상대가 이번 주말엔 바쁘고 다음 주에 보자고 한 걸 두고도
“그 대답에 빡이 치고 말았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내게 한다.
H양은 내게 사연을 보낼 정도로 이 관계가 이미 엉망이 되었으며 상대가 어느 순간부터 H양을 만만하게 봐서 그렇게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당황스럽게도 여기서 봤을 때 현재 둘의 관계는 전혀 나쁘지 않다. 만남이나 연락의 빈도도 뭐 하나 부족한 것 없고, 상대는 충실한 리액션과 잦은 연락을 하고 있으며,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둘은 만날 약속까지 잡은 상황이다.
H양이 내 여동생이었다면, 난
“야 릴렉스 릴렉스. 이거 지금 괜찮은 거야. 쟤가 너 골탕 먹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요 정도 연락하고 만나면서 친해지는 게 일반적인 거야. 그런데 넌 쟤가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고 막 매일매일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서 빡친다고 하잖아. 지난주 내내 퇴근하고 집에 있었는데 만나자는 얘기 안 했다고 널 만만하게 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 말야.
쟤가 좀 소극적인 건 있어. 그래서 언제 만나서 무슨 영화 보자, 라고 말은 안 하곤, 새로 나온 영화 재미있다던데…, 하면서 말끝을 흐리잖아. 그런데 너도 그 말에 별 대응 안 하곤 그냥 다른 얘기했고 말이야.
그게 쟤는 네가 바쁘고, 약속도 많고, 연락 안 할 때면 너 할 일 하느라 그래서 그런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너도 네 스케줄이 어떻다고 대답을 해줘. 그래야 이게 쿵짝이 맞는 거지, 쟤는 말끝 흐리면서 눈치 보고, 너는 그냥 아무 말로 안부묻기 하면서 떡밥만 던지면, 둘이 안부봇, 말끝흐림봇 되어서 전파낭비 하다가 끝날 수 있어.”
라는 얘기를 해줬을 것 같다. 그간 만나는 거의 모든 이성에게 호의와 헌신과 관심과 애정을 먼저 받았기에, 그러지 않는 남자에 대해선 ‘날 만만하게 봐서 그러는 것’이라는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게, 참 안타깝기도 하다.
상대를 계속 타인으로 둔 채 이것저것 떠보거나 상대가 혹할 만한 계기를 만들려고 하기보다, 그냥 상대와 대화할 수 있고 약속 잡을 수 있는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 가까워지면 어떨까? 지금 H양의 모습은 지름길 놔두고 멀리 돌아가며 힐끗힐끗 목표지점만 쳐다보는 것 같으니, 그러지 말고 그냥 질러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H양을 만만하게 보는 사람이 그렇게 자꾸 연락하고, 궁금해하고, 만나서 대화할 리 없으니, H양의 속도 대로, 또 H양이 원하는 대로 빨리 뭔가 되지 않는다고 그걸 전부 ‘날 만만하게 봐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진 말자. 그 조급증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상대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선톡을 해도 ‘중간엔 왜 안 해? 그리고 왜 톡만 하고 전화하거나 만나자고는 안 해?’라며 불만족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옥께이?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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