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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과여행/사슴벌레는남자의로망

사슴벌레 잡으러가자는 남자, 알고보니

by 무한 2009. 7. 2.

등업하느라 "카페활동 열심히 할게요~ 등업부탁드려요~" 이따위 마음에도 없는 가입인사를 써 놓고 기다린지 삼일, 드디어 나는 사슴벌레카페의 '알' 등급에서 '유충' 등급이 될 수 있었다. '채집후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다.

채집후기에 올라온 수 많은 정보들을 훑으며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사슴벌레 서식지를 찾는 중이었다.

"저 파주 사는데, 사슴벌레 많은 곳 알아요"


포르쉐를 몰며 툼레이더 같은 깜장 난닝구를 입고 우중충한 날씨에 썬글라스를 낀 채, 이태원 삼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어느 이태리 여성을 봤을 때 보다 더 가슴이 뛰는 글이었다.

파주 봉서산에 사슴벌레 엄청 많아요.
근처 여우고개만 가도 잡는게 아니라 주워요.
너무 많이 주워와서 걱정이에요.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가속화 되는 것을 느꼈다. 검색창에 '파주 봉서산'을 넣고 검색을 했더니 뉴스자료가 있었다.

"파주 봉서산 60년만에 시민의 품으로"

그동안 군사지역이라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곳이, 작년부터 일반인들도 들어갈 수 있게 바뀌었다는 소식이었다. 60년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야생, 그 안에 가득있을 사슴벌레!

그 글을 올린 분은, 왕사슴벌레(가명)님이었다. 작성자의 다른글 보기로 그가 올린 정보가 정말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를 살펴봤다. 유충사육과 균사사육, 채집과 산란 등등 글마다 사슴벌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엿보였고 '채집같이가요' 라는 카테고리에는 그가 올린 '6월 30일에 봉서산으로 채집가실 분~' 이라는 글이 있었다. 난 바로 댓글을 달았다.

안녕하세요. 전 일산에 살고 있고요, 왕사슴벌레님이 올리신 글 읽고,
30일날 저도 같이 사슴벌레 채집에 가고 싶어서요.
제가 직장에 다녀서 퇴근하고 준비해서 파주까지 가면 9시쯤 될텐데 괜찮으신지요?
제 연락처는 0106543**** 입니다. 댓글 보시면 연락 주세요.


그리곤 다음날, 연락이 왔다.

그러면 봉서산 입구에 SM마트가 있으니까 거기로 오세요.
9시까지 오세요. 제 연락처는 0104648****입니다.


상당히 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형식적인 인사따위는 생략한 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버리는 강한 적극성과 간결하면서도 자제된 말투의 사용이 인상적이었다. 그 후 30일이 되기 전까지 문자로 몇마디의 대화를 더 나눴다. 역시나 왕사슴벌레님(이후 '왕사')은 심플한 언어를 사용했다.

왕사 - "오실때 후레시"

무한 - "아, 네. 또 뭐 필요한거 있나요?"

왕사 - "없음"

무한 - "근데 이 시간에(오후4시) 문자보내시는 걸 보면.. 학생이세요?"

왕사 - "네"

무한 - "아.. 그렇구나.. 군대는 갔다 오셨나요?"

왕사 - "아뇨"

무한 - "몇학년 이세요?"

왕사 - "4학년"

무한 - "그렇군요. 암튼 자세한건 만나서 얘기하죠 뭐." 

어쩌면 짧은 말투가 대답하기 곤란해서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하곤 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곤 드디어 30일, 왕사님에게 아침부터 문자를 보냈다.

무한 - "드디어 오늘이군요! 완전 설레입니다."

그런데 오전 내내 왕사님의 답장이 없었다. 강의가 많은 날인가 싶어 더 연락을 안했지만, 점심시간이 지나도 왕사님의 연락이 없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한 - "오늘 우리 봉서산 가는거 맞죠?"

답장이 오질 않았다. 직감적으로 뭔가 틀어졌다는 걸 알았다. 혼자서라도 찾아 가야하는 건지, 아니면 다음으로 약속을 미뤄야 하는 건지 고민하고 있을때 드디어 왕사님의 연락이 왔다.

왕사 - "죄송. 오늘 못감"

막 사가지고 나온 아이스크림을 땅바닥에 떨어뜨렸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루 종일 연락이 없더니, 퇴근시간이 가까워서야 연락을 주고, 거기다가 못간다니... 난 전화를 걸었다.

무한 - "여보세요?"

왕사 - "누구세요?"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어린애의 목소리 같은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무한 - "아.. 그...음.....왕사슴벌레님 좀 바꿔주세요"

왕사 - "전데요"

(응?)

무한 - "아.. 음..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왕사 - "엄마가 가지 말래요"

이 부분에서 나는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 - "아..그렇군요. 근데 왕사님 실례지만 대학생 맞으세요?"

왕사 - "아뇨"

무한 - "......"

왕사 - "파주초등학교 다니는데요"

무한 - "......파..파주 초등학교 사학년이요?"

왕사 - "네."

여기까지 대화를 하고 이후 대화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생각이 안난다. 그 분(?)이 일부러 낚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빈 바늘을 물어버린 것이었다. 단답형의 대답, 그리고 핸드폰이 있다는 것에 초등학생이란 생각은 못 했던 것 같다. 근데, 그렇다면 사슴벌레에 대한 그 해박한 지식은 뭐였을까. 해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무.단.펌.

같은 제목으로 검색을 해보니, 이미 타 곤충판매 사이트등에서 배껴온 내용이었다. 파주 봉서산에 사슴벌레가 많다는 것 역시 허풍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뉴스제목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60년만에 민간인에게 개방.60년만에 민간인에게 개방.60년만에 민간인에게 개방.'

나는 급하게 '사슴벌레 원정대'를 조직했고, 우리는 부푼 가슴으로 파주 봉서산을 향했다. 마트에 들러 랜턴 배터리를 사며 직원에게 묻자 그는 대답했다.

"뭐하러 봉서산까지 가요. 여기 널린게 사슴벌렌데"

'여기 널린게 사슴벌렌데..여기 널린게 사슴벌렌데..여기 널린게 사슴벌렌데..'

왕사님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파주를 떠돈지 세시간,


봉서산 근처에서 잡은 애사슴벌레 (이름은 '푸쉬킨')



윗 사진의 애사슴벌레를 잡을 수 있었다. 사슴벌레의 이름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시를 쓴 작가 '알렉산드로 푸쉬킨'의 이름을 따서 '푸쉬킨'으로 지었다.

그 후로도 총 네시간을 파주에 머물렀으나 다른 사슴벌레를 찾을 수는 없었다. 종종 길바닥에서 로드킬 된 사슴벌레를 보고 인근 산을 다 뒤졌지만 산에 목줄도 안 되어 있는 야생의 개들이 계속 짖는 바람에 더는 작업(?)을 할 수 없었다.



로드킬당한 사슴벌레 (넓사 암컷으로 추정)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교하에 들러 딱 나무 하나만 보고 집에 가야지, 했는데 그 안에 애사슴벌레가 또 한마리 있었다. 이미 시간은 흘러 7월 1일 새벽이었고, 녀석의 이름은 '줄리어스 시저' 라고 지어주었다.

서른 가까운 나이에 이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마음속에서 계속 '강원도~ 톱사슴벌레~' 라는 소리가 들려 아마 조만간 강원도로 떠날 것 같다. 

그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만난 넓적사슴벌레 '찰스 디킨스'와 녀석들의 집 공개는 다음편에 계속 하기로 하고, 주변에서 사슴벌레 암컷을 보시거나, 톱사슴벌레나 걍사슴벌레 등을 발견하시면 바로 연락주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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