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공지를 먼저 좀 적으려 했는데, 글이 생각보다 길어져 일단 접어두겠습니다. 읽기를 원하시면 아래 [공지 더보기] 버튼을 클릭해 보실 수 있습니다.
자 그럼, 공지는 이쯤하고 매뉴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존대로 시작한 김에, 오늘은 매뉴얼까지도 존대로 달리겠습니다.
사연을 보내시는, 그리고 매뉴얼을 읽으시는 독자 분들의 연령층이 높아짐에 따라 글을 쓰는 게 사실 좀 부담이 되기는 합니다. 오늘 매뉴얼도
"괜찮아요? 결혼 앞두고 자꾸 싸우게 돼 많이 놀랐죠?"
라는 드립으로 시작하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사연 주인공에겐 이게 정말 심각한 일일 텐데, 그런 사연을 두고 개그를 치는 게 불쾌하네요. 그리고 저런 개그코드가 안 맞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저에겐 저게 전혀 웃기지 않아요. 글을 좀 진지하게 써주셨으면 합니다."
라는 반응이 올 수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자꾸 글을 쓸 때 각 잡고 쓰게 되고, 내면의 비평가가
"그러지 마. 그런 얘기를 하면 그 분들이 몰려올 거야."
라며 제 귀에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는, 아무래도 연령층이 높아지다 보니 '나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졌다는 겁니다. 제 지인 중 한 명은 문화센터에서 주부님들께 뭔가를 가르치고 있는데, 지인은 수강생 열다섯 명이 아니라 선생님 열다섯 명을 놓고 수업을 하는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매의 눈'으로 뭘 잘못하나 지켜보고 있는 분부터 나이를 앞세워 일단 짓누르는 분, '내 방식'을 고집하며 귀를 닫는 분, 수업은 뒷전이고 파벌 형성해 정치하려는 분, 자꾸 전도하려 하시는 분까지 참 다양한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백지에 뭔가를 새로 쓰는 것보다, 이미 누군가 한참 쓰다 만 걸 다시 고쳐 쓰는 게 더 어렵습니다. 자기만의 생각이 종이에 찍힌 활자처럼 굳어버린 경우, 서로 '내 말이 맞다'는 공방전만 하게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잠깐만, 근데 바로 이 지점에서 C양 커플의 문제가 잠깐 보인 것 같지 않으십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내 말이 맞다. 내 말을 이해 못 하면 네가 이상한 거다."라고 말하는 문제 말입니다.
혹시 어제 자 매뉴얼 보셨습니까? 어제 사연의 주인공에게도 위와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보낸 사연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지만 얜 진짜 대책이 없는 것 같다. 이러이러한 것들이 이러이러한 영향을 끼쳐 얘가 그렇게 된 것 같다. 성장배경과 자기연민…,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오래 사귀기도 했거니와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 마음을 돌릴 방법을 알려 달라. 잘못은 걔가 하고 난 헌신만 한 것 같은데,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다. 내가 잘못한 부분들이 일부 있는 건 인정하지만, 걔가 한 잘못이 더 크고 무겁다."
저렇게 혼자 분석해서 낸 결론을 콘크리트처럼 굳혀 놓고 있으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이 안 보입니다. 아니, 못 봅니다. 못 보고 못 듣습니다. 그가 저렇게 자기 혼자 분석을 마치고 결론을 내는 동안, 현실에서 여자친구가
"내가 더 잘 할게. 나 정말 오빠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라고 오들오들 떨며 말해도, 저 말을 못 듣습니다. 오히려 저때는 뭔가에 씌인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상대를 더욱 괴롭히는 이상한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는 동안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듯 도움을 요청하던 상대는, 결국 저 검은 물 밑으로 영영 내려가 버리게 되고 말입니다. 물론 현실에선 아직 상대가 눈앞에 있고 억지로라도 연락하거나 찾아가 만날 수 있지만, 그 시절 그 사람은 그렇게 수장되고 만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C양 커플은 아직 허우적거리는 단계는 아닙니다만, 분명 위험합니다. 이건 C양이 보낸 사연이고 또 C양이 상대가 아닌 본인의 오답을 말해달라고 요청했으니, 아래에선 C양의 모습을 중심으로 위태로운 지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2. 토킹과 스피킹 히어링과 리스닝.
Simon & Garfunkel의 <The Sounds Of Silence>에 아래와 같은 가사가 나옵니다.
People talking without speaking
People hearing without listening
그러니까 ing가 붙어서 '말하는 것'이 되고…, 어려운 단어가 없는 문장이니 해석은 하지 않겠습니다.(응?)
<대학>에도 저것과 일맥상통하는 문장이 나오는데, 거기엔 그 이유까지도 적혀 있습니다.
心不在焉
마음이 있지 않으면
視而不見
보아도 보이지 않고聽而不聞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食而不知其味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현재 연애 중이며 결혼을 앞두고 있는 커플인데, 마음이 없진 않을 겁니다. 저 위에서 말한 어제 사연의 주인공도 마음이 없진 않았을 겁니다. 마음이 없이 수년 간 사귀며 헌신하고, 또 상대에게 프로포즈까지 할 사람은 없으니 말입니다.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다른 곳에 빼앗겨서 그런 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C양이 마음을 빼앗긴 지점을 보겠습니다.
"남자들하고 싸울 때 제가 매번 느끼게 되는 점인데, 주로 여자가 맞는 말을 하거나 자신보다 강하다고 느껴질 때 나타나는 남자들의 방어심리인 듯해요. 여자보다 우위에 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하는 남자들 본능은 알겠는데…"
"'남자한텐 구체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알아서 잘 하겠지, 는 없다. 무신경하다. 그러니 내가 남자 자존심 안상하고 죄책감 안 드는 방법으로 미리 챙기자.' 이렇게 진짜 힘들게 맘 다스리고 있어요."
"아무리 좋게 얘기 하려해도 '당신이 이렇게 못하지만 내가 참을게.' 식으로 밖에 말이 안 나와서 말을 못하겠어요. 어떻게 얘기 하면 좀 본인이 너무했구나. 잘 해야겠다. 라는 맘이 들게 할 수 있을까요?"
C양이 이미 남친에 대한 분석을 모두 마치고 결론까지 낸 상태라는 걸 알 수 있는 문장들입니다. 그래서 참 어렵습니다. 높은 연령층의 독자 분들은 그 분들 나름의 진화생물학적, 사회심리학적, 또는 그 밖의 여러 기준들로 이미 상대에 대한 분석을 마친 후 그 결론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요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C양도 이미 혼자 다 분석하고 결론 낸 뒤 제게 '남친을 잘 구슬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위와 같은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인지, C양에게선 '이기지 못 하면 비기기라도 한다'는 태도가 보입니다. 사소한 것 하나도 절대 양보하지 않습니다. 양보를 한다 해도, 꼭 거기에 조건을 달아 양보의 의미가 없어지도록 만듭니다. 게다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은 말이나 행동, 또는 표정이나 제스쳐에서 분명 드러나고 마는 까닭에 상대도 눈치를 채고 맙니다. 대화를 하다가 의견이 대립하게 되면 C양이 상대를 앞에 두고 한숨을 쉬거나 하는, 뭐 그런 태도들로 말입니다.
딱 하루만이라도 남자친구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그가 C양을 공격해 무너뜨리려 한다거나 괜한 고집 부리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듣고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겁니다.
"너는 항상 네가 원하는 식으로 가르치려 들지. 내가 네 학생이야? 가르치려는 그 태도 버려. 뭘 그렇게 계속 분석하고 가르치려 들어?"
남친의 저런 말들을 '히어링' 말고 '리스닝' 하는 겁니다. 정말 딱 하루만이라도 변명하거나, 말꼬리 잡거나, 비기려고 하지 말고 가드 내린 채 묵묵히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C양이 정신봉(몽둥이)을 내려두면 상대도 가드를 내릴 것입니다. C양은 몽둥이를 들고 있으면서, 거기에 놀란 상대가 가드 올린다고 그걸 '남자 특유의 방어심리'라고 생각하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3. 본전생각.
위와 같은 이유들로 인해 발생한 또 다른 문제가, 바로 C양이 '본전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C양에 대해
- 양보를 한다 해도, 꼭 거기에 조건을 달아 양보의 의미가 없어지도록 만든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C양이
"알았어. 그럼 (결혼하면)화장실 청소는 내가 할 테니 주말엔 오빠가 밥 해."
라는 식의 '조건'을 달아 말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C양의 남자친구라면, 결혼이 기대되거나 기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하나씩 계속 늘어나는 의무들에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쫓기는 느낌이 들어 도망가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이거 또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그 분들이 오셔서
"그런 건 결혼 전에 확실히 해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안 그러면 고스란히 여자 몫이 될 텐데요? 그런 건 말하기 불편하다고 해서 그냥 함구하고 있을 게 아닙니다. 당연히 정해야죠. 그렇게 계획 세우고 정하는 걸 불편해 하는 남자라면 차라리 그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라는 이야기를 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시댁'이나 '시누이' 얘기를 하면 말 탄 채 몽둥이 들고 찾아오시는 분들인데, 여하튼
馬上得之
馬上治之
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말을 타고 전쟁을 해 천하를 얻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리지는 못한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지금 이대로 가다간 말싸움에서 32전 32승을 해도 결국 파혼을 하게 되는 황당한 결과가 찾아올 수 있으니, '내가 편하게 할 결혼생활'이 아닌 '우리가 함께할 결혼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C양은
"난 남친 가족에게 이것저것 다 하고 조카들까지 챙겼는데, 남친은 내 친척은커녕 우리 부모님과도 아직 먼 사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시며 이 문제로도 남친과 싸웠다고 하셨는데, 그렇다고 이걸 남친에게
"오빠가 우리 부모님한테 하는 것만큼(만) 나도 오빠 부모님한테 할 거다."
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건, 소위 말하는 '해주고도 욕먹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C양의 지인이라면 제발 1절까지만 하고 끊으라는 얘기를 해줄 것 같습니다. C양은 2절까지 해버려서 자신이 한 양보나 희생을 모두 도루묵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건 C양이 뭔가를 하는 순간 그 즉시 보상을 받으려 하는 태도만 접어두어도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건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인데, 남들이 살을 주고 뼈를 치는 것과 달리 C양은 뼈를 주고 살이라도 받아 내려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C양의 남자친구인데, C양 부모님을 모시고 장어를 먹고 왔습니다. 그렇게 잘 먹고 부모님은 부모님 댁에 모셔다 드린 후, C양에게
"내가 이렇게 너희 부모님과 외식하는 것처럼, 너도 좀 우리 부모님과 외식자리 마련하고 그래."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럼 15초 전까지 가득하던 고마움이 단번에 사라지며 정이 뚝 떨어질 것 같지 않으십니까? C양의 남친이 C양에게
"그렇게 본전생각 나? 그렇게 매사 본전생각 나서 어떡하냐?"
라는 이야기를 한 건, C양의 '즉각적인 보상을 받으려 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일방적으로 흘러간다 싶으면 차라리 C양이 '알아서 잘 하려는 노력'을 하던 걸 줄여나가시는 게 낫습니다. 그렇게 해서 당연한 것이 되어가는 상황을 정지하고 긴장감을 불어 넣는 게, "난 오빠 가족들에게 잘 하는데 오빤 왜 우리 가족들에게 못 하냐."라고 하는 것보다 서른여덟 배 쯤은 낫습니다.
끝으로 하나만 더 말씀드릴까 합니다. 저 위에서 한 이야기와 중첩되는 부분이긴 한데, 어쨌든 무조건 C양이 이기게 되어 있는 싸움은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둘의 대화를 잠시 보겠습니다.
C양 - 오빠, 화나는 건 알겠는데 화를 내지 말고 화나는 부분을 얘기를 해봐.
남친 - 네가 이러이러하게 한 거, 그렇게 내 의견 무시한 게 화난다.
C양 - 그래. 그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닌데 그렇게 들렸음 내가 사과할게. 미안해.
남친 - 나는 그리 들리더라.
C양 - 그건 내가 무시한 게 아니라고 얘길 하잖아. 미안하다고.
남친 - 네가 의도한 게 아니라도 그건 네 생각이고 그렇게 들린다고.
저런 대화가 계속되면, 결국 남친은 C양과의 의사소통을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입장을 바꿔서 저 대화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성의 없는 사과'와 '미안하다고 했으면 된 거 아니냐'는 태도에 더 화가 날 것 같지 않으십니까? 다른 대화에서도 C양은
"내가 언제 그랬는데? 난 기억 안 나는데 내가 그랬으면 진짜 잘못한 거네. 근데…."
라고 대응하시던데, 저런 태도에 대해 지금 후회해야 합니다. 많은 대원들이 대개 이 지점을 당시엔 못 보고, 헤어지고 가슴앓이 하며 카톡대화 다시 읽어 보다가 그제야 후회하며 상대에게 사과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미 그 때는 '그 시절 그 사람'이 죽은 뒤라 사후약방문이 될 뿐입니다. 남친이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어느 지점에서 답답해하고 있는지 남친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남친이 계속해서 답을 이야기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흘려 듣고, 멀리서만 그 답을 찾으려 하진 마시고 말입니다.
그럼 저는 C양이 이 갈등들을 지혜롭게 해결하시고, 훗날 '연애모범사례'를 제게 사연으로 보내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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