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 땐가 두 살 땐가, 내 지인 중 하나가 불치병에 걸렸다고 했다. 그는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각혈을 하는 걸 보여주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치료법이 없어 미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때문에 나와 내 지인들은 그를 만나면 늘 위로의 이야기를 했고, 만났다 헤어질 때마다 침울한 표정으로 잘 될 거라고, 잘 다녀오라는 이야기까지는 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도 그는 출국하지 않았고, 그냥 '위로의 술자리'만 계속 되었다. 기침하며 각혈을 하는 날이 있는 반면, 그냥 가슴만 움켜쥐는 날도 있었다. 무엇보다, 미국으로 가서 치료를 받는 게 병원 정도만 옮기는 간단한 일이 아니고, 또 다른 지인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미국보다 우리나라가 그 병과 관련해 더 앞서 있었기에 우린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판정을 받았다고 했던 병원에 전화를 하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전화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개인정보에 대해 환자 이외의 사람에게 알려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말한 병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병원이름을 확인했지만, 그가 말한 병원은 없었다. 이후 그를 만났을 때 우린 이 사실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화를 내며 다음번에 진단서를 가지고 올 테니까 그걸 보라고 했다. 물론, 그 이후로 우린 그를 볼 수 없었다.
1. 사생활이 철저히 비밀인 남친, 어떡해?
저 위에다 내 지인 얘기를 써 놓은 건, J양의 사연을 읽으며 그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J양 남자친구도 내 지인과 비슷하게 거짓말을 했는데, J양이 병원에 확인전화를 했을 때 그런 환자가 없었다고 했다.
이게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거짓말이 아니니, 자세한 내용에 대해선 생략해야 할 것 같다. J양도 남친이 보면 바로 알 수 있기에 내게 각색을 요청했는데, 이건 뭐 어떻게 각색을 해야 좋을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사실 난, 진위를 떠나서 이 두 사람이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병원에 확인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난 후)
남친 - 그거 알려주면 불법이라 안 알려 준 걸 거야.
J양 - 아예 그런 사람 온 적이 없다고 했는데?
남친 - 개인정보 불법이라 그렇다니까.
J양 - 자기가 오늘 만나서 확인시켜준다고 했으니까. 이따 만나서 얘기하자.
남친 - 담에 보자.
J양 - 왜?
남친 - 기분도 별로고
J양 - 적극 해명해도 모자랄 판에 담에 보자고? 지금 상황이 이런데?
남친 - 그래 다 내 잘못이지.
(이후 남친은 여러 핑계를 대며 만나기로 한 약속 취소.)
J양은 못 헤어지는 여자다. 그래서 그가 뭐라고 하든 이번 일 역시 그냥 넘어가게 될 것이다. 둘이 오래 사귀기도 했거니와 사생활만 빼면 남친은 J양에게 더 없을 정도로 잘 대해주는 남자기에, J양은 헤어질 생각이 없다.
전화를 해서 병원에 확인을 했고, 병원엔 그런 사람이 없다고 했다. 남친은 불법 어쩌고 하며 무작정 부인만 했지만, 만나서 확인 시켜 달라고 해도 기분이 좋지 않아 그러지 못하겠다고 한다. 목 위에 머리를 달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다. J양도 머리로는 남친이 거짓말을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가 '믿음'을 강조하며 J양에게 호소하면, 가슴으로 믿어버린다.
남친이 이후 어떻게 행동할지는, 이전의 비슷한 경험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사실 병원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에 잠수를 탔던 거다. 그간 너에게 말을 못 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 때문에 난 진짜 세상을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걸 너에게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병원 핑계를 댄 거다. 이런 나를 용서 못 한다 해도 괜찮다. 이러이러한 일 때문에 나만 힘들면 됐지, 너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 미안하다."
지금까지 J양의 남친은 저런 식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폰으로 남인 척 연락해 J양을 바보 만들다 들켜도, 다른 핑계를 대며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른 이성과의 연락을 들켰을 때도 그렇고, 돈과 관련된 문제를 들켰을 때도 그랬다. J양은 그때마다 남친을 가슴으로 믿으며 오히려 그를 위로했는데, 이번에는 사태가 좀 더 심각한 것 같아서 내게 사연을 보냈다. 누가 봐도 거짓말인 위의 사건을 두고, 겨우 '이번엔 좀 수상해서'라는 가벼운 표현만을 쓰며 말이다.
내 결론이 너무 매정하고 단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연애에선 두 번 고민할 필요도 없이 벗어나는 게 맞다. 남친은 '믿음'을 강조하지만 정작 폰 비밀번호에 카톡 비밀번호까지 걸어서 쓸 정도로 철저히 숨기기만 하지 않는가. 또, 다른 여자와 아무 일도 없었으며 그녀가 먼저 접근한 거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어쨌든 남친은 J양에게 일이 있다고 해놓곤 그 여자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남들은 평생 사귀면서도 한 번 경험할까 말까인 일들을 J양은 벌써 수차례 겪었는데, 이건 어느 면에서 보든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니 벗어나길 권한다. 거짓말인 게 드러나면 남친은 정신적 고통만 호소하는데, 이런 식이라면 남친이 바람을 피우다 걸려도 J양이 그걸 추궁하는 것 때문에 정신적 고통이 심하다는 얘기만 할 가능성이 높으니, 그런 일들이 벌어지기 전에 정리하길 바란다. 미안하지만, 이건 진작 끝났어야 하는 관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둘이 이렇게 오래 사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오로지 J양의 '이해심' 덕분이다. J양은 이번에도 그가 뭐라고 변명하든 이해심을 발휘해 연애를 연장하려 하는데, 그렇게 계속 연장해봐야 그 끝엔 J양을 위해 준비된 게 아무 것도 없을 거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2. PINK와 VORA(응?)를 오가는 여자.
안녕 보라씨. 보라씨는 본인에 대해 수줍은 모태솔로인듯 말하지만, 보라씨가 하는 어떤 행동들을 보면 거의 육식녀 타입이야. 공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해서 같이 뭐 보러 가자고 말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그리고 창의력도 있는 까닭에, 다른 데이트 신청도 아무렇지 않게 할 줄 알아.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걸 구실로 내세워 성공률을 높일 줄도 알아.
그런데 그렇게 멍석을 잘 까는 반면, 친해지는 과정에서는 급격히 소심해 지는 거야. 들이댈 때는 PINK같은데, 정작 만나면 VORA가 되는 거라고 할까? 보라씨와 썸을 타다가 흐지부지된 남자들이
"보라씨는 좀,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고 했잖아. 그게 바로 저 지점을 말하고 있는 거야.
썸도 어쨌든 같이 타는 거잖아. 그런데 보라씨는 '계주'를 하는 것처럼 썸을 타려 하거든. 초반 100미터는 보라씨가 전력질주 하고, 그 다음은 상대가 100미터 전력질주 해주길 바라는 거야. 그런데 그게 잘 될 리가 없으니 전력질주를 마친 보라씨는 상대가 달리지 않아 실망하게 되고, 그 실망을 내보이니 상대는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지. 어제만 해도 호감을 보이던 보라씨가, 오늘은 갑자기 찬바람 부는 것처럼 대하니까.
"그 오빠는 저를 그냥, 본인과 카톡대화 하는 애 정도로 인식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뭐 잘 들어갔냐고 연락도 오고, 다음에 또 만날 약속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카톡으로 대화를 하던 중 오빠가 제 이름을 잘못 부른 거예요. 보라인데 보리로요…. 이런저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기도 하고, 여튼 저도 그 이후로 일주일 동안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상대가 다른 사람과 착각해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것도 아니고, 처음에 저장을 잘못해서 획 하나 틀린 건데, 그것 때문에 카톡 대화창 나오며 대화 삭제하고 인연 끊을 생각까지 하는 건 너무 극단적이잖아. 이름 틀리게 저장한 걸 안 상대가 당황하며 민망해 하는데, 거기다 대고
"저한테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ㅋㅋ. (중략) 저 이제 가야겠어요. 안녕."
해버리는 건, 아무래도 좀 그래.
"제 이름조차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도 하고…."
보라씨가, PINK에서 VORA로 변할 땐 또 이렇게 부정의 전력질주를 하는 거야. 그 전까진, 보라씨가 어디어디 가자고 하니까 상대는 거기 주변에 좋은 길도 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잖아. 보라씨와의 관계를 연인이든 오빠동생으로든 이어갈 마음이 전혀 없는데 약속을 잡고, 연락을 하고, 만나진 않겠지. 그럼 이 정도의 사이에서 발전해가면 되는 건데, 보라씨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으니 상대가 100%나 120%의 호감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만큼 큰 실망을 하게 되는 거지.
더불어
"사실은 한 번 만나고 나면 마음 접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나갔던 건데…."
라는 보라씨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애초에 끝을 점치면서 시작한다는 것도 좀 문제가 돼. 연애가 아닌 다른 관계에 대해선 그런 생각 전혀 안 하잖아. 그런데 연애와 관련이 되기만 하면 보라씨는 '을'을 자처하며 스스로 비관적인 미래를 예언해. 이번 일도 상대가 이름 잘못 부른 것 때문에 보라씨가 셔터를 안 내렸으면, 오늘 같은 불금에 만나서 치맥 한 잔 할 수 있는 거거든.
상대에게 연락을 해 봐. 이거 뭐 큰 일이 벌어졌다거나 뭔가 대단히 잘못된 게 아니야. 해프닝일 수 있는 걸 보라씨가 너무 확대하고 있는 거니까, 오늘이나 내일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자고 해.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에도 만나고 돌아와서
"우리는 그냥 맥주 같이 마시는 동네 오빠동생 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는 이야기만 하지 않도록, '우리는 무슨 관계인가?'에만 집중하지 말고, 상대에게 집중해. 보라씨가 작성한 신청서를 보면, 상대에 대해 채워 넣어야 하는 부분에 물음표만 써 넣은 곳이 많잖아. 상대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까. 둘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도 모르는 사이인데, 이런 와중에 가능성 점치며 마음만 접었다 폈다 하진 말자고. 전력질주 안 하고 천천히 걸어도 되는 거니까, 길게 보면서 만나봐. 알았지?
불금이다. 지난주부터 주변에서 기쁜 일과 슬픈 일이 이상하게 많이 일어나다 보니, 동풍이 불었다 서풍이 불었다 하는 바다에 나와 있는 기분이다. 이번 주말에 있는 경조사까지만 참석하고, 다음 주부터는 닻을 내리고 부지런히 써야겠다.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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