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애완견, 애프리푸들)를 데리고 지인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공쥬님(여자친구), 나, 간디 이렇게 셋이 놀러 갔는데, 저녁을 먹고 있던 중 지인의 남편이 들어왔다.
지인의 남편은 술에 취해 있었다. 우린 지인이 결혼하기 전에 주로 어울렸기에, 지인의 남편과는 결혼 전에 한 번, 그리고 결혼식장에서 한 번 봤을 뿐이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앉아서 밥을 먹으며 TV를 보는데, 지인의 남편이 고깃덩어리 하나를 쥐곤 간디에게 이것저것 시키기 시작했다. 손, 앉아, 엎드려 같은 명령들이었다.
그런데 그는 고깃덩어리를 간디에게 주진 않고, 계속 명령만 하며 주는 척 하다가 다시 뺏었다. 그가 계속 약올리기만 하자 간디도 더는 말을 듣지 않았고, 그가 불러도 그에게 가지 않았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가 간디를 불러대자, 지인이
"왜 개를 괴롭혀? 괴롭히지 말고 그냥 놔둬."
라며 말렸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언제 간디를 괴롭혔냐며 예뻐서 그러는 거라고, 이번엔 진짜 고깃덩어리를 줄 것처럼 간디를 불렀다. 하지만 그에게 희롱당한 간디는 가지 않았다. 그만 괴롭히라는 지인의 만류가 한 번 더 이어졌고, 그는 무안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심술이 났는지 불러도 오지 않는다며 간디에게 다가와 말을 안 듣는다며 코를 툭툭 쳐댔다. 난 그가 술주정처럼 간디를 괴롭히는 것에 좀 짜증이 났다. 그래서 한 마디 하려고 했는데, 공쥬님이 얼른 간디를 불러 품에 안고 주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기에, 분위기가 바뀌어 그냥 대충 넘어가게 되었다.
1. 재회할 생각 없다면서 연락은 계속하는 구남친.
서두에서 한 이야기에 비유하자면, Y양은 간디, Y양의 구남친은 지인의 남편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사연을 읽는 내내 난 Y양의 구남친이 참 괘씸했다. 그는 Y양이 사과를 할 땐
"난 너에 대한 기대감이 없고, 이 관계에 지쳤어. 우리가 다시 시작할 가능성은 없어."
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떻게 하면 재회할 수 있냐고 묻는 Y양에게
"더 예뻐지고 나은 사람이 되어서 나를 다시 꼬시러 오든가 ㅋㅋ."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Y양이 가장 두려워할만한 이야기를 해 좌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가, Y양이 정말 좌절하려고 하면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또 그는
"지금의 넌 나에게 어필할 만한 게 하나도 없어."
라는 이야기도 했는데, 저건 그냥 Y양을 가지고 노는 거다. 몇 년 전 논란이 되었던 '압박면접'의 경우를 보자. 철저히 '갑'의 위치에 있던 면접관들은, '을'의 위치에 있는 구직자에게
"예쁘게 입고 왔는데 춤 한번 춰보세요."
"여자가 나이도 많은데 장사나 하지 그래요."
"그 나이 먹도록 제대로 한 게 없네요?"
"아버지가 초졸이면 지적수준에 문제가 있지 않나요?"
"성실하다고 하는데 왜 대학은 그런 데 갔어요?"
"떨어지면 인물 때문인 줄 아세요."
등의 이야기를 했다. 저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지원자의 약점을 파고 들어 발언의 진위를 검증하고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자질을 평가하기 위해서' 라고 하는데, 여하튼 연애에서도 저런 일이 일어난다.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관계로 인해 한 쪽이 '슈퍼 갑'이 되어 있거나,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제발 다시 만나달라고 사정 하고 있는 경우에 특히 많이 일어난다. 전에 한 번 소개한
[여자친구가 전화로 사과를 하자]
"네가 지금 정말로 미안한 거라면 이렇게 전화 말고, 나한테 찾아와서 얘기를 했겠지."
[위의 얘기를 들은 여자친구가 찾아오자.]
"돌아가. 넌 이미 기회를 잃었어. 내가 말하기 전에 왔어야지. 난 안 나갈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이라도 보자고 여자친구가 사정하자]
"난 분명히 안 나간다고 했어. 다시 한 번 나보고 나오라고 하면, 넌 앞으로 나랑 볼 일 없을 거야. 상황 최악으로 만들지 말고 돌아가."
라는 사례에서도 '을'인 여자친구를 똥개훈련 시키며 놀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고, 이번 Y양의 사연에서도 헤어진 이후 절망과 희망을 번갈아 심어주며 여자친구를 놀리듯 대하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다.
"남친이 지금 제게 이러는 것이, 그저 헤어질 때 제가 너무 매달렸기에 걱정이 되어서 챙겨주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인지,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딱 하나 골라서 답하기가 힘들다. 복합적인 이유 때문인데,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는 아닌 게 분명하다. Y양은 그와 헤어진 후 그의 어머니와 연락을 하며 계속 챙기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에 대한 '보답'도 그가 Y양에게 연락하는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다.
Y양처럼 이별 후에도 둘이 함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또 관계가 끝났다는 걸 쉽게 선언하지 않으며 지킨 경우 재회한 사례가 있긴 하다. 그런데 그 사례들과 Y양의 사연이 다른 것은, 그 사연들엔 '최소한의 존중'이 남아 있었고, 또 대개 둘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시의 상황과 관련된 문제로 헤어진 것이었으며, Y양이 남친이 Y양에게 하듯
'네가 이렇게까지 하니, 내가 너 밥 한 번 사준다.'
식의 태도를 보이진 않았다. 때문에 난 Y양에게, 근 반 년이나 들고 있던 그 미련을 이제 그만 놓길 권해주고 싶다. 난 사실 이런 고민을 하게 되었을 때
'이쪽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을 경우, 과연 상대는 올 것인가?'
를 생각해 보곤 하는데, 그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둘 사이에서 그가 '남처럼 Y양을 대하는 일'이 두 번 있었고 말이다. 평소엔 밥을 먹자느니 하는 얘기를 종종 하지만 심각한 일이 벌어졌을 땐 남처럼 구는 관계엔, 희망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 타버린 커피콩이라해도 본인이 화분에 심어보고 싶으면 심어도 된다. 심을 수는 있다. 단, 그 커피콩을 아무리 정성껏 돌봐도 뿌리를 내리는 건 보기 힘들 거란 얘기를 나는 해주고 싶다.
2. 연애 100일, 남친에 대한 마음이 식었습니다.
수 년 전 일이 떠오른다. 하루는 내 동생이 내 DSLR을 하루만 빌릴 수 있냐고 물었다. 난 가져가서 쓰라고 했고, 동생은 내 카메라를 들고 어느 모임에 나갔다.
그 날 저녁, 모임에서 돌아온 동생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형, 형꺼(카메라) 동영상 촬영 안 되는 거였어?"
난 그때 니콘 D80을 쓰고 있었는데, 그 모델은 동영상 촬영이 안 되는 모델이었다. 그래서 안 되는 거라고 말했고, 동생은
"오늘 모임이 동영상 관련 모임이었는데, 난 내가 동영상 기능을 못 찾는 줄 알고 ㅋㅋㅋㅋ. 내가 촬영하기로 했는데 사람들 다 벙찌고…. 암튼 코미디 한 편 찍었어."
라고 말했다. 동영상 찍을 거였으면 동영상 촬영 되는 거냐고 진작 물어 보든가.
S양의 사연을 읽으며 저 일화가 생각났다. S양과 남자친구는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기도 전에 덜컥 연애를 시작해 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S양이 한 말을 보자.
"저는 남친의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성향에 끌려 마음이 생기고 사귀게 된 건데…."
그렇게 사귀게 된 건데, 막상 사귀고 보니
남친의 리더십 -> 간섭과 구속.
남친의 어른스러운 성향 -> 가르치거나 지적하려는 태도.
남친의 차분함 -> 훼이크였는지, 점점 징징이로 변해감.
였던 것이다. 게다가 사귀기로 한 이후 S양의 남친은 계속해서 '기-승-전-스킨십'의 이야기만을 해댄다고 한다. 난 첨부된 카톡대화에서는 특별히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을 발견하지 못 했는데, 여하튼 S양은
"만났을 땐 정상적인 대화를 별로 해본 적이 없습니다. 환한 대낮에 만나도 남자친구가 은밀하게 스킨십을 시도하고, 무슨 대화를 해도 자꾸 그런 쪽으로만 몰고 갑니다."
라는 이야기를 한다.(남친이 자꾸 애정을 확인 받으려 하는 부분은 카톡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게 참 다양한 요인들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사연이라, 긍정적인 예측을 하기가 힘들다. 둘 사이엔 서로가 대략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연애를 시작했다는 문제, S양이 연애를 하며 '역할극'을 하듯 '설레는 소녀'의 모습만을 보여주려 했다는 문제, 남친의 가부장적인 모습과 스킨십에 집착하는 모습이 드러났다는 문제, 그런 남친을 보며 S양은 질색을 할 뿐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지 않았다는 문제, S양이 말을 하지 않으니 남친은 문제가 없는 줄 알고 계속해서 정 떨어지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문제 등이 있다. 이 와중에 S양이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문제까지도 포함되어 있고 말이다.
S양이 아니라 S양의 남친이 보낸 사연이라면
"여친이 이쪽보다 몇 살 어리다고 해서 어린애인 건 아닙니다. 어린애 대하듯 대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쪽은 여친의 생활지도 선생님이 아니라 남자친구이지 않습니까? 여친에게서 전부 다 보고 받고 지시하려는 태도는 그만 내려놓으세요. 이쪽에선 '여친 생각해서 하는 소리'라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에겐 잔소리하고 짜증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여친에겐 그렇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으면서, 이쪽에서 하는 행동은 혼자 달아올라서 수위 높은 얘기로 자꾸 이어가거나 만났을 때 만지려고 하는 일 뿐입니다. 이래버리면 이건 연애가 아니라 사육하려 드는 모습이 되는 겁니다. 통제하고 지적하면서 이쪽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것이니 말입니다."
라는 이야기라도 해줄 수 있을 텐데, S양이 보낸 사연이라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S양은 이미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CC인 상황에서 헤어지면 어색하고 힘들지 않을지를 고민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남친에게 거부감이 들고, 또 문제없는 척 연기하는 것도 지치며, 남친에 대한 아무 애정도 없는 상황이라면 빨리 헤어지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저 CC라서 헤어지면 불편할까봐 계속 이어만 가는 연애는, 상황을 점점 악화시킬 수 있다. 현재 S양은 '부담스러운 부분'들을 남친에게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불만을 토로해서 남친이 반성하고 변하겠다는 얘기를 해도 S양 마음엔 아무 변화도 없다. 이번 달까지만 과외를 받기로 한 학생이
"기말고사 땐 수학이랑 영어 점수 진짜 올릴게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들을 때처럼, '그러거나 말거나'의 마음인 것이다. 헤어지자고 말하기 미안하거나 헤어지고 나서 불편한 사이가 될까봐 계속 사귀는 건 채무가 늘어가는 걸 보고만 있는 것과 같으니,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 전에 어서 정리하길 권한다.
오늘은 포스트 새 글도 발행해야 하니 마중글은 생략하자. 오후에 다시 뵙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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