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부모님께는 맹목적으로 효도를 해도 모자라다는 인식이 박혀있는 와중에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게 참 힘들긴 합니다.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무슨 손익을 따지듯 그렇게 이야기를 하냐."
"어떻게 효도를 하든,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엔 미치지 못 한다."
라는 이야기를 하면, 저는 그냥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하는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제 주변에도 부모님과 관련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 여자 지인이 셋이나 있고, 또 사연을 주신 Y양 역시 부모님과의 관계 때문에 힘들어 하시는 것 같으니, 제가 지인들과 함께 고민했던 부분들을 살짝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출발해 보겠습니다.
1. 서운해 하는 엄마 때문에 힘들다는 여자.
제 지인 A는 부모님으로부터 확실한 편애를 당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동생이 사업을 한다고 하자 집에서는 가게까지 열어줬는데, A에게는 버는 돈 중 일부를 집에 보태라는 얘기만 돌아왔습니다. 집안 분위기 자체도, 동생이 누나인 A에게 반말을 하거나 욕을 해도 아무 터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A는 사춘기 시절부터 자신이 주워온 아이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지인 B는 고교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했는데, 취업 직후부터 버는 돈의 1/3에서 1/4 정도를 집에 보태고 있습니다. '그렇게 첫 단추를 낀 까닭에'라고 말하면 제가 너무 계산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런 까닭에 그녀의 20대는 저축만 하다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1/3은 용돈으로 드리고, 1/3은 저축하고, 나머지 1/3로만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까닭에 서른 넘어 1억 가까운 돈을 모으긴 했습니다만, 바다를 본 지는 5년, 비행기를 타본 지는 8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그녀의 부모님은 일본, 동남아, 중국 등에 관광을 다니시며 국내 무슨 축제 무슨 축제 등을 다니시는데 말입니다.
지인 C는 부모님 때문에 4천의 빚이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당신들의 명의로 더는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자, C의 명의까지 가져다 일을 벌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는 결혼 같은 건 아예 포기하고 사는 중인데, 이런 와중에도 C의 부모님께서는 20만원, 30만원정도의 금액을 C에게 빌려달라고 하십니다. 물론 그렇게 빌려 가신 뒤 갚은 적은 없지만 말입니다. 빌려주지 않으면 '너 같은 자식 필요 없다'는 뉘앙스의 대답이 돌아오며, 빚 때문에 죽고 싶다는 얘기를 하면 '이게,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된 일이냐. 인연 끊자'는 뉘앙스의 대답이 돌아온다고 합니다.
C가 30만원 입금한 뒤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고 말하면, 그녀의 부모님은 "이딴 식으로 주는 건 안 주느니만 못 하다."라며 다시 보낼 테니 계좌 부르라고 하십니다. 물론 C는 계좌를 부른 적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본인도 어려워서 못 부친다는 얘기를 한 적은 있다고 하는데, 그럼 "너 옷 사고 구두 사고 놀러 다닐 돈은 있고, 부모 어려운데 빌려줄 돈은 없냐."라는 식의 대답이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럼 그 말에 C는 또 마음이 아려서, 울며 계좌이체를 한다고 합니다.
효도에 대해서는, 얼마 이상의 용돈을 드리고 어느 정도의 헌신을 해야 '효도 만족도'에 충족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자칫하다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너는 나가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부모 생각은 안 하냐."라며 비교를 하기 시작하면, 이쪽의 인생이라는 건 오로지 부모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일 수 있고 말입니다.
Y양에겐, 당장은 본인이 '나쁜 딸' 되는 것 같아도 하나만 하시길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용돈을 드리든가, 생활비를 보태든가 둘 중 하나만 하는 겁니다. 지금은 매달 생활비를 보태며, 거기다 명절이나 무슨 날, 그리고 기념일에 용돈을 드리고, 더불어 큰돈은 아니지만 5만원, 10만원 등의 자잘한 물품구입까지 다 하다 보니 Y양도 신경이 바짝 마르는 겁니다. 이런 와중에 Y양도 어렵다고 부모님께 하소연을 하면 "됐다. 아예 주질 마라. 답장도 하지 마라."라는 대답이 돌아오는데, 그러다 보니 Y양은 '주고도 욕먹는' 생활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부모님께서 Y양이 드린 용돈을 모아 나중에 Y양 시집 갈 때 통장 째로 내미시는 감동적인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만, 그런 일이 있을 거라 해도 현재 Y양이 너무 힘들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건 베스트 케이스의 상상일 뿐,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높고 말입니다. 그러니 당장 겪게 되는 부모님의 서운함을 어느 정도는 견디며, 줄일 건 줄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이건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부모님들께서 당신들의 부모님께는 지금 Y양이 하는 것만큼 하셨는지, 또는 하고 계신지를 살펴볼 필요도 있습니다. 앞서 얘기한 제 지인들의 사례를 보면, 지인들의 부모님들께서는 당신들의 부모님께 지원만 받고 사셨거나 사심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의 자식에겐 이상하게 효도를 강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엔 내가 어려우니 부모가 날 도와야 했고, 지금은 역시 내가 어려우니 자식이 날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더불어 부모님들께서 아직 활동을 하시며 경제능력을 가지고 계실 때 더 즐기시라고 용돈을 드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모님 노후나 건강악화 등의 비상시를 대비해 위해 적금이나 연금을 드는 게 낫다는 얘기도 해드리고 싶습니다. Y양 사회생활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지금 생활비, 용돈, 선물 안 드린다고 불효자 되는 거 아닙니다. Y양이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좋은 거, 비싼 거 해 드리려는 마음을, 부모님이 모르신 채 더 달라고만 하시면, 그때는 줄이는 게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효도라는 관념의 노예가 되지 마시고, 뭐가 더 중요하고 멀리까지 내다본 계획인지를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효도하시길 권합니다.
2. 남친이 잘해주는데도 마음이 안 간다는 여자.
안녕하세요 S양. 그러니까 이게,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개
나쁜 남자 - 나쁜 남자 - 나쁜 남자 - 회의감 - 착한 남자
이런 식으로 흘러가거든요. 그런데 S양은 서른을 코앞에 둔 상황에
착한 남자 - 착한 남자 - 착한 남자 - 회의감
의 영역에 들어서 있습니다. 그냥 갑도 해보고 슈퍼 갑도 해봤는데 다 재미없더라, 의 영역이라고 할까요. 이런 상황에선 나쁜 남자를 만나 눈물 콧물 원 없이 쏟아 보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긴 하지만, 지금 그랬다간 그 여파로 인해 불혹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76년 용띠 지인이 있는데, 서른 초반에 주화입마에 들어 아직까지 내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S양이 눈물 콧물 안 빼고도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 알려드리겠습니다.
A. 마음에 안 들땐 조율을 시도한다.
S양은 상대에게서 마음이 안 드는 점이 보이면, 그냥 피해버립니다. 갈등의 해결책으로 '관계의 단절'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래버리면 손쉽게 갈등에서 벗어날 순 있겠지만, 매번 비슷한 레퍼토리의 인간관계만 맺게 됩니다. 일반적인 대인관계에서는 그 방법이 불화를 만들지 않으며, 또 '무난하게' 관계를 이끌어 가기 좋을 겁니다. 내 마음의 50%만 투자하고 있으면, 큰 즐거움이 없는 반면 큰 어려움도 없으니 말입니다. 흘러가는 대로 저항 없이 흘러가기만 해도 '모난 데 없는 사람'이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연애에서 그런다면 어떨까요? 가장 친밀하고 치열한 형태의 대인관계인 연애에서 마음의 50%만 할애한다는 건, 다리 하나만 걸치고 있는 모양이 될 수 있습니다. 100%를 다 주려는 상대를 만나도, 저 사람은 왜 저러나 하며 구경만 하게 될 수 있고 말입니다. 이게, S양에게 헌신하는 남자들을 만나다보니 자연히 형성된 태도일 수 있는데, 이게 바뀌지 않으면 누구를 만나도 상대의 애정을 필요 이상의 감정이라고만 여길 수 있습니다.
B. 상대의 실망이나 변화를 겁내지 않는다.
S양이 저 '적당히'의 태도를 보이는 건, 어쩌면 미래를 겁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S양이 이번 남자친구에게 한 말을 잠시 보겠습니다.
"내 그 부분 때문에 내가 좋은 거라면, 그 부분 빼면 내가 싫을 수도 있겠네?"
"지금 좋아하는 내 성격이, 만약 잘 보이려고 연기한 거고 실제로 안 그러면 어떡할 거야?"
어쨌든 S양은 연애를 하니,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레벨은 벗어난 겁니다. 그런데 여전히 구더기는 계속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항아리 뚜껑을 열 생각도 하지 않고, 항아리는 그냥 방치해 둡니다. 이러면 100일, 200일 넘긴 이후 상대도 지쳐 떨어져 나가거나, S양도 이 연애가 그저 감정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해 치워 버리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나서 같이 변해가고 또 닮아가는 건 당연한 거고, 상대에 대해선 S양이 알려는 의지를 갖고 바짝 다가앉아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애정도 생기고 확신도 생기는 거지, 지금처럼 카달로그 보듯 훑어만 보고 있으면 절대 가슴 뭉클한 감정 같은 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건데, 나중에 가서는 또 상대에게 그런 감정 안 든다고 내치기만 하면, 제대로 되기 어려운 것 아니겠습니까?
C. '좋은 여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오직 미안한 감정 때문에 맞춰 가면 안 됩니다. 눈치가 보여서 마음에도 없는 말 하면 안 됩니다. 괜히 분위기 이상해질까봐 진심과는 다른 얘기를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걸 계속 하면 상대는 S양을 '좋은 여자'로 여기겠지만, S양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만이 쌓여가고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불편해 질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관계를 벗어버리게 될 수 있고 말입니다.
저는 아기 때부터 낯가리는 걸로 동네에서 유명했고, 지금까지도 처음 보는 사람과 있으면 혼자 뇌파를 안드로메다로 송수신 하고 있을 정도로 낯을 가립니다. 그래서 불편한 침묵이 감돌게 되면 저는 상대에게 제가 낯을 심하게 가린다는 걸 말해주곤 합니다. 지금은 그레이의 모습이 나온 거지만, 좀 더 만나게 되면 블루의 모습도 나올 거라고 말입니다. 이런 농담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제 선천적 바리케이트가 치워지며, 상대와 마음 대 마음으로 만나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나름의 그런 돌파구를 찾지 않고 만난 사람들과는, 대부분 악수만 하고 그 이후로 연락도 하지 않는 사이가 되기 마련입니다. 가깝게 지내게 되어도, 흰색 바지를 입고 나가서 만나는 것처럼 불편합니다. 흰 바지 입으면 어디 앉는 것부터 신경 쓰이고 불편하지 않습니까? 이렇듯 의식적으로 계속 '좋은 사람'을 연기해야 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건 자주 만나며 여러 가지 경험을 함께 할 때 저절로 해결되기도 하니, 지금처럼 일주일에 한 번으로 못 박아둔 채 그 날만 의식적으로 노력하며 만나지 마시고, 평일에도 저녁에 편한 옷 입고 벤치에 앉아 같이 모기에도 뜯겨가며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꼭 함께 할 일을 정해두고 만나서 같이 하고 돌아오지 말고, 그냥 만나서 생각해 보기도 하고 그러시길 바랍니다.
오늘부터 '웃자고 하는 소리'를 좀 더 많이 포함한 매뉴얼을 쓰려고 했는데, 첫 사연이 너무 진지한 까닭에 나도 모르게 힘을 주고 말았다. 마음속에서는 '에밀 졸라'같은 드립들이 마구 떠오르는데, 이런 걸 썼다간 말 타고 오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긴장하고 말았다. 내일부터는 좀 더 재미있게 쓰는 걸로….
어제 급한 사정이 생겨 보기로 한 영화들을 못 봤다. 언젠가
"남친이랑은 제대로 시간 맞춰 영화를 본 적이 없어요. 꼭 영화 시간 다 되어서 급하게 가게 돼요. 이것 때문에 싸우다 영화 중간에 나온 적도 있고요. 이런 남친 도대체 어떡하죠?"
라는 사연이 온 적 있는데, 나도 그러는 까닭에 뜨끔해서 그 사연은 소개하지 않았다. 사연을 주신 분께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내 경우, 영화 보러 갈 때는 일찍 가면 괜히 지는 느낌이 들어 꾸물거리게 된다. 영화관에 일찍 도착해도 다른 짓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다 늦게 들어가기도 하는데, 어제도 그러다 20분이 지나서 그냥 오늘 보기로 했다. 얼른 준비해야지. 다들 즐거운 월요일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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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 > 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5)'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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