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J양, 왜 여전히 그렇게 힘든 길로만 골라서 가고 계신 겁니까. 익숙한 길이라고 계속 그 길로 가면, 처음부터 백 번을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계속 비슷한 결과만을 맞이하게 될 뿐입니다. 매번 서쪽으로 가던 것과 달리 이번에 동쪽을 향해 가야 일출을 볼 수 있는 건데, J양은 역시나 이번에도 서쪽을 향합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지는 해만 슬픈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J양이 하고 있는 일들, 그거 사람이 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다른 것에 마음을 쏟아서라도 그 형벌에서 벗어나 보겠다며 나가서 초등학교 운동장을 파워워킹으로 돌아보지만, 겨우 한 바퀴를 돌고 난 뒤 혹시나 그 사이에 연락이라도 오지 않았을까 폰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 그렇게 실망하곤 집에 들어와 잠도 잘 오지 않기에 술이라도 찾기 시작하면, 그땐 엄마도 모르는 알콜중독으로 가게 되는 겁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면서 '내일은 다르겠지'라고 생각하는 건 정신병 초기 증상이다."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부터는 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일도 달라지는 겁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희망과 절망 사이에 놓인 오뚝이 그녀.
저희 집이 모 아파트 701호인데, 601호나 801호도 다 저희 집처럼 생겼습니다. 입주 초기에는 누구네 집이랄 것도 없이, 그냥 다 똑같은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사 온 지도 벌써 3년이 되었고, 이제는 저희 집이 601호나 801호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었습니다. 다른 집에서라면 불을 켜고 제 누울 자리를 찾아야겠지만, 저희 집에서는 정전이 되어도 대충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 누워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스카치테이프가 몇 번째 서랍에 있는지, 라면 끓일 냄비가 싱크대 어디에 있는지, 냉장고 안에 현재 뭐가 들어있는지를 누구에게 물을 필요 없이 그냥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자리를 잡아두고, 제가 의미를 부여하고, 또 제 손길을 거치게 된 물건들이 사방에 있는 저희 집이니 말입니다.
바로 저런 과정들이 있어야 우리 집, 내 집이 되는 겁니다. 남의 집에 가서 누우면 천장의 무늬도 이상해 보이고 이불도 낯설어 궁싯거리게 되지만, 우리 집에선 그냥 늘 하던 대로 누워 꿀잠 잘 수 있는 것. 그 차이는 내 주소가 이 집으로 되어 있어 저절로 된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만들었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J양은 위의 과정을 생략한 채, 그냥 처음부터 '내 집'인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아니, 만나고 싶어 한다기 보다는 호감 가는 상대가 자신에게 '내 집'같은 존재이길 기대합니다. 제가 이전 매뉴얼에서 J양의 문제로 지적했던 걸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대하는 것, 기대려는 것, 기다리는 것.
그땐 저걸 '3기의 문제'로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러니 잘 될 리가 없는 겁니다. 상대에게 우리 동네 놀러 오라고 떡밥을 던지거나, 아니면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 얼굴 보자고 한다고 위에서 말한 것들이 저절로 되겠습니까?
J양이 이번 신청서에 적은 말을 잠시 보겠습니다.
"3기 판정 받았을 때처럼 막 목매달고 그 사람만 생각하며 기다리고 그런 거는 아니에요. 저도 제 할일 하면서 제 시간을 보내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드는 생각은… 아 … 내가 많이 좋아하는구나.. 예전에는 혼자 화났다가 섭섭해했다가 풀었다가 그랬는데 .. 이젠 그냥 마냥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꿋꿋하게 연락하고 그랬는데 ..힘들기도 했었죠."
'아닌 척'하며 참는 게 아니라, 없애야 하는 겁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오늘부터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 해도 J양의 외로움과 심심함은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땐 또 다른 형태로, "연애를 시작했는데 왜 사귀는 것 같지 않죠?"라는 사연을 제게 보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J양의 구애는 '그'라는 한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J양 본인의 외로움을 향한 것이기에, '그'라는 사람을 주소로 갖게 되더라도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단순히 주소만 걸어둔다고 해서 그 집이 보금자리가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J양이 원하는 깊은 유대감. 그건 누가 선심을 베풀어 J양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같이 눈 비 바람 맞고 함께 웃고 울며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J양은 그와 연애를 시작하면 깊은 유대감 같은 게 저절로 생겨나며 마음 가득 행복이 들어 찰 거라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상황이 이런데 상대 카톡 프로필에 적힌 문구 보며 꿈만 꾸고 있으면, 또 해 질 때나 잠에서 깨어나 지는 해를 바라보게 됩니다.
J양이 이십대 중반이라면, 그래도 전 아프지만 달콤하기도 한 꿈 마음껏 꾸고 일어나라고 놔두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마구 흔들어서라도 J양을 깨워야 할 시간이니 깨우겠습니다. 참으며 기다린다고 해결되는 거 아니고, 그는 희망을 준 적 없으니 이건 희망고문도 아닙니다. 얼른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2.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거 내가 너무 늦은 게 아니어야 하는데…. 먼저, 솔로부대 전역을 축하해 배찬씨. 배찬씨의 사연을 다 읽은 지금, 나는 배찬씨가 솔로부대 재입대를 하게 될 것 같다는 불안함을 지울 수가 없는데, 여하튼 일단 축하를 못 해줬으니 축하부터 할게. 축하선물로는, 배찬씨가 가는 길에 왜 잘못된 길인지, 그 길에서 어떻게 돌아나와야 하는지를 말해줄게. 이 정도면 축하선물로 괜찮지?
여자친구는 배찬씨를 좋아해. 이건 사실이야. 의심하지 마.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계속 연락하고 만나고 하지 않을 거야. 조급증에 시달리는 많은 대원들이 이걸 헤어진 이후에나 깨닫곤 하는데, 배찬씨는 그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하고, 또 애정표현을 하며, 절대 부족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에 집중했다는 걸, 헤어진 뒤에야 유효기간 지난 카톡대화 들여다보며 깨닫지 말라고.
지금 배찬씨가 조급함을 느끼는 건, 여자친구가 뭘 잘못하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배찬씨가
- 말도 안 되는 판타지 같은 걸 바람.
- 혼자 전력질주 하며 상대보고 빨리 달리라는 이야기를 함.
- 아홉 가지의 긍정적인 모습보다 한 가지 부정적인 모습에 매달림.
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난 다음 주에 우리 동네 사시는 분에게 수초를 분양 받기로 했거든? 아직 그 분 어항이 정리가 안 되어서, 주말에 정리하고 잘라 낸 수초들을 내게 파시기로 했어. 그럼 앞으로 네 밤 정도만 자면 난 수초를 사올 수 있게 되는 거잖아. 하지만 내가 그때까지 못 기다리겠다고 조급증을 내며 그 분을 괴롭히면 어떻게 될까?
"전 어항이 벌써 준비되어 있는데, 이번 주 거래는 정말 어려우신 거죠?"
"혹시 주말이라도 거래가 힘들까요? 정리하신 직후 제가 받으러 갈 수 있는데…."
"다음 주라고 하셨으니까, 월요일 오전에 거래 가능할까요?"
"어항 정리하시는 거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일요일 날 제가 가면 안 될까요?"
"당장 되는 것만이라도 먼저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좀 부탁드립니다."
한 번 보고 말 사이 같으면, 저래도 그냥 '이 사람은 성격이 참 급한가보네.'하며 넘어갈 수 있겠지. 그런데 매일 봐야 하는 사이인데 계속 저런다고 해봐. 그럼 결국 저 분은 날 부담스러워 하지 않겠어? 저런 조급한 면 때문에 날 밀어내고 싶어지면, 내 다른 모습들까지도 전부 저 분에게는 못마땅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고 말이야.
이게 배찬씨 연애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야. 마음을 빨리 열도록? 마음에 무슨 손잡이 같은 게 달린 게 아니잖아. 그런데 배찬씨는 실제로 저런 이야기들을 '여친과의 진지한 대화'라는 명목으로 한단 말이야. 여친은 나름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건데, 배찬씨는 "더더더더."라며 재촉만 하는 거지.
"전 제가 여친에게 하는 것만큼의 사랑한다는 표현과 느낌을 받고 싶었고, 스킨십 진도에 있어서도 조금 더 진도가 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자친구의 마음이 빨리 열리지 않는 것에 대해 저는 뭐가 문제인지를 알아내 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는데…."
배찬씨, 날 위해 보증 한 번 서줄래? 못 서주겠어? 날 위해 보증을 서줄 수 없는 이유가 뭔데? 아직 술 한 번 같이 먹은 사이도 아니고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럼 오늘 저녁에 술 한 잔 해. 시간과 장소 정해서 말해줘. 그쪽으로 갈게. 나에 대해 어떤 걸 알면 보증을 서줄 수 있는 거야? 필요한 걸 말해봐. 필요하다면 등본이라도 다 떼어서 가지고 갈게. 난 만약 배찬씨가 보증을 서달라고 하면 서줄 수 있을 것 같아. 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배찬씨는 왜 못 해? 친하지 않아서? 그러니까 친해지자고. 오늘 만나. 우리 오늘도 만나고 내일도 만나면, 배찬씨는 날 위해 보증 서 줄 거지?
여자친구에게 배찬씨는, 저런 말을 하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거야. 저 위에 쓴 1번 사연에서 '깊은 유대감'에 대한 부분이 나오잖아.
"J양이 원하는 깊은 유대감. 그건 누가 선심을 베풀어 J양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같이 눈 비 바람 맞고 함께 웃고 울며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J양은 그와 연애를 시작하면 깊은 유대감 같은 게 저절로 생겨나며 마음 가득 행복이 들어 찰 거라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거랑 똑같은 거야. 단지 배찬씨는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만 다른 거고 말이야. 그러니 되돌려 받으려고 일부러라도 더 과하게 하는 배찬씨의 애정표현, 또 어떻게 하면 깊은 유대감 같은 게 생길 수 있냐고 묻기만 하는 태도 등이 여자친구에겐 부담이 된 거지.
"저는 여자친구에게 감정적인 위안도 얻고, 사랑한다는 표현도 자주 하면서 서로 기분이 상승하고 즐거운 연애를 하고 싶었습니다."
배찬씨.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들떠 병적일 정도로 행복감에 심취해 있는 상태를 '조증'이라고 하잖아. 어떻게 사람이 계속 희희희희(喜喜喜喜)만 하며 살 수 있겠어? 연애도 마찬가지야. 배찬씨는 여자친구가 마냥 들떠있거나 즐거워하지 않으면, 급격하게 심각해지더라고. 여자친구가 무표정한 얼굴을 잠시만 보여도 배찬씨는 '쎄한 느낌'이 들었다면서 어쩔 줄을 몰라해. 그래서 일부러 더 웃기려고 하기도 하고, 여자친구가 원하는 걸 해주려고 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된 거냐고 자꾸 묻기도 하지.
세상의 그 어떤 여자라도, 항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길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뭐가 문제냐고 청문회를 여는 남자와는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여자친구의 표현이나 감정의 크기가 커지고 있다는 느낌을 전 크게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건데?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배찬씨가 요구하는 것들이 실제론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이야. 여자친구 친구 남자친구들에 대해서는 '오빠'라고 부르지 말고 배찬씨에게만 '오빠'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이게 뭐야. 요구를 해도 말이 되는 걸 요구해야지. 이건, 그녀가 배찬씨의 새장 속에서 24시간 기쁜 마음으로 노래를 불러줘야만 만족하겠다는 거잖아.
배찬씨. 보이는 걸 믿고, 형체가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 설렘? 두근거림? 호감? 애정? 편안함? 그런 것들을 하늘에 걸어 놓은 채 여자친구보고 얼른 저기에 닿으라고 말하지 말고, 차라리 같이 야구 직관을 가서 치맥 먹으며 즐기라고. 야구를 보다가 여자친구가 추우니까 그만 가자고 하면 나오면 되는 거야. 야구에 사실 큰 관심이 없고 너무 추우면 나가자고 할 수 있는 거잖아. 단, 거기서 또 그런 그녀를 붙잡곤
"왜? 기분 갑자기 안 좋아? 야구장 들어올 때까진 괜찮았던 걸로 봐서는 중간에 기분이 안 좋아진 것 같은데, 혹시 내가 뭐 잘못했어? 무릎담요라도 미리 준비할 걸 그랬나? 아직도 많이 추워? 짜증나? 화났어? 난 자기랑 오늘 즐겁게 야구장 데이트 하고 싶었는데…."
하진 말라고. 그냥 따뜻한 곳에 가면 다시 괜찮아 질 수도 있고, 만약 뭔가 갈등이 있었던 거라면 나중에 그녀를 통해 들을 수도 있어. 배찬씨나 야구장 같은 거랑 관련 없이 그녀 자신의 신체적, 심리적 문제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 그냥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해소되는 감정일 수도 있고 말이야. 이걸 전부 배찬씨가 해결하려 들거나 문제라고 생각해 답을 구하려 하지 말고, 인생에 희로애락이 있듯 연애에서도 희로애락이 있다는 걸 받아들여. 그럼 지금처럼 점점 그녀에게 부담을 주며 배찬씨를 싫어지게 만드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거야. 난 행운을 빌게!
80일 프로젝트를 곧 시작하겠다고 예고한 지 80일쯤 지난 것 같다. 난 당시 금연을 목표로 잡을 예정이었는데, 매번 마음을 먹을 때마다
"Not today."
라는 시리오 포렐의 멘트가 떠올라 자꾸 미루게 되었다. 확실히 약속할 순 없지만, 일단 다음 주 월요일 정도에 다시 80일 프로젝트를 시작해 보는 걸로….
불금이다. 이번 주에는 매뉴얼을 두 번이나 빼먹은 관계로, 주말에도 글을 발행할까 한다. 6월 말까지 사연을 받지 않는다는 공지를 올린 후 "그냥 미리 보내놓고 7월 1일까지 기다리면 안 되는 건가요?"라는 질문을 계속 받는데, 기다리실 수 있다면 미리 보내셔도 괜찮다. 오늘 다룬 두 사연은 모두 5월 초에 도착한 사연인데, 그만큼 사연이 많이 밀린 와중에 계속 그 다음 분들에게 독촉을 받다 보니 힘들어서 공지를 올렸던 것이다. 독촉 없이 기다리실 수 있다면 지금 보내두셔도 괜찮다. 자 그럼, 다들 불금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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