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난 여권을 만들러 시청엘 들렀다. 그런데 여권신청을 접수하는 나이 지긋하신 분이
"여권 만들러 오면서 사진도 안 가져 왔어요?"
"안경 원래 그거 써요?"
"여권 처음 만들어요?"
하는 이야기를 해서 살짝 당황했다. 난 그곳에 즉석사진기가 있다는 걸 알고 가서 찍으려 했던 건데, 뭔가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으셨는지 다짜고짜 쏘아댔다. 여권 처음 만드냐는 얘기는 내가 이름을 띄어 써서 나온 얘긴데, 행여 소문자로 쓰기라도 했으면 귓방망이를 맞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은 일부러 대답을 늦게 하는 등의 심술도 부리시던데, 내 앞 순번의 아저씨가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되물으니 그제야 정상적으로 대답하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내가 앉아 있던 책상으로 민원인들이 서류를 교부받으러 왔을 때… 나는 그들에게 이를 갈아보이곤 했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데 성공했을 때는 가라앉히기 힘든 쾌감을 느꼈다. 거의 항상 그러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대부분 겁쟁이들이었다. 부탁하는 이들이 그렇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파주로부터의 수기>나 써볼까 하다가, 고골리가 쓴 <외투>의 한 구절도 떠올라 그만두게 되었다.
"그의 직급으로 말하면(뭐니뭐니해도 러시아에서는 사람의 직급부터 밝혀둘 필요가 있다) 이른바 만년 구등관(九等官)이었다. 뭐라고 반격을 할만한 능력도 없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짓밟기를 좋아하는 기특한 습성을 가진 글쟁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게 바로 이들 구등관들이다. 이 글쟁이들이 이들 구등관들을 마음껏 조소하고 풍자하기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널려 알려진 사실인 것이다."
러시아의 엄청난 이 두 꾸러기 때문에 난 참, 무슨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지들끼리 사실이다 사실인 것이다 하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놨으니…. 여하튼 상황이 이러니 수기를 쓰는 건 다음으로 미루고, 늘 하던 대로 내게 도착한 사연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썸인 줄 알았는데 제 짝사랑으로 변해가요.
상대에게 모든 걸 걸고 있는 사람들은 상대의 거절 한 번에도 처참한 절망감을 느낀다. 때문에 결국 실망이 덕지덕지 묻은 말 같은 걸 건네 상대에게 복수하려 들다 망치고 마는데, 사연을 보낸 철진씨도 그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철진 - 너무하네
철진 - 알겠다
상대 - 음, 실망감이 엄청나게 묻어나네….
철진 - 알긴 아네
물론 저게 (일반적인 대화에서 그런 게 아니라)반쯤 장난이 섞인 태도라는 걸 상대도 알고 철진씨도 아는 상황이긴 하다. 그런데 저 대화 이후 상대가 장난으로 받아 좋게 넘기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진씨는 계속 말을 성의 없이 툭툭 던지며 일부러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려고 했다.
난 위의 대화를 통해 철진씨가 노멀로그 애독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노멀로그 애독자라면, 내가 모 외국 대학 강의를 예로 들어 '선함과 악함'의 이야기를 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그 예문을 다시 한 번 보자.
한 교수가 수업시간에 '선함과 악함'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다.
교수 - 자네가 지금 30달러가 필요한데 내가 30달러를 준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학생 - 선한 사람입니다.
교수 - 그럼, 자네가 지금 30달러가 필요한데 내가 20달러를 준다면?
학생 - 마찬가지로 선한 사람입니다.
교수 - 30달러를 필요로 하는 자네를 두고, 내가 그냥 지나가 버리면?
학생 - 악한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저 이야기와 철진씨의 사연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자. 철진씨의 만나자는 말에 '안타깝지만 선약이 있다'고 대답한 그녀는,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혹 '나쁜 사람'이라고 대답할 분들이 계실 수 있는데, 난 그분들의 올바른 판단을 돕기 위해 이 사실을 적어두어야겠다. 그녀는 철진씨와 계속해서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그간 둘은 잘 만나서 밥 먹고 영화 보고 커피 마시며 놀았다. 거절은 저게 처음이었다.
이건 어떻게 보든 선약이 있냐고 물어서 선약이 있다고 대답한 건데, 철진씨는 그게 자신이 원한 대답이 아니니 심술을 부린 것이다. 철진씨가 노멀로그 애독자였다면,
"당신이 원하는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당신은 상대에게 심술을 부리거나 가시 돋친 말을 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그 문제를 만든 건 당신이고, 그 문제 때문에 심술을 부리는 것도 당신입니다."
라는 매뉴얼의 한 구절을 떠올려 위와 같은 일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 철진씨가 노멀로그 애독자 였다면 상대에게 선택지를 두 개 이상 주는 데이트 신청방법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건,
"이번 주 토요일이나 다음 주 화요일 정도에 시간 괜찮아?"
라고만 물었어도 아무 문제없이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토요일 오후에 시간 괜찮냐고 물었다가 선약이 있다는 대답을 들어 심술을 부리진 않았을 것이다. 철진씨의 경우, 기대가 무너질 경우 실망의 급행열차에 올라타버리는 태도만 버린다면 친해지는 데 문제가 없을 테니, 그 부분만 좀 보완하길 권한다.
아, 그리고 저 일 이후 철진씨는 상대가 좀 냉랭해진 것 같다는 생각에 자꾸 눈치를 보며 상대의 비위만 맞추려는 대화를 시도하는데, 그러지 말고 6월달 초반처럼 대화하길 바란다. 혹시 상대가 화난 거 아닌지 확인하려 계속 눈치만 보는 남자는, 아무 매력도 없다는 걸 잊지 말자.
2. 그에게 쪽지를 줘도 될까요?
자유작성에만 폰트 사이즈 8.5로 A4 두 장을 빼곡히 채워 사연을 주셨는데, 알맹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K양의 추측과 예상, 생각, 심증, 예감, 상상, 느낌 등의 감정을 걷어내고 보면,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K양이 하고 있는 그런 것들은, 사실 제가 밖에 나가면 자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전 버스를 타고 가다 다리 위를 지날 때면, 이 버스가 전복되어 강으로 떨어질 경우 어느 경로로 탈출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기도 하고, 은행 앞을 지날 때면 누군가 날치기를 당할 경우 제가 어떻게 범인을 제압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자주 뵙게 되는 택배 아저씨가 만약 연쇄살인범이라면 어떨지에 대한 상상을 한 적도 있고, 어느 골목에 몰려 있는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지하 원룸에 사는 가족 하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상상도 한 적 있습니다. 또 어떤 물건을 보면,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이나 이전에 그 물건을 사용했던 사람들의 모습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어떤 건물을 볼 때에도, 그 건물이 들어서기 전이나 그보다 훨씬 전 등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이런 제 몹쓸 상상력에 대해 친구에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한 적 있는데, 그 친구는 자신이 종종 유체이탈을 하는 것 같다는 대답을 하길래 대화를 접어버렸습니다. 제게 이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한 20년 쯤 된 것 같습니다. 특별히 무슨 약을 먹고 있진 않습니다.(응?)
웃자고 하는 제 이런 얘기들에 진지하게 반응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가끔 깜짝깜짝 놀랍니다. 전에 위와 비슷한 얘기를 했더니 본인 언니와 증상이 비슷하다며 좀 더 자세히 말해달라는 분도 계셨고, 조심스럽게 어떤 병명을 이야기하며 걱정해주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제가 요즘 한밤중에 매미 우화 촬영지 답사를 다니는 등의 좀 이상한 행동을 하곤 있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은 넣어 두셔도 괜찮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K양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카페에서 일하는 모든 남자가 다 그러는 건 아닙니다만, 오지랖이 넓으며 금방 친근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기도 합니다. 낯이 익은 고객에게 무료로 사이즈 업을 해준다든가, 평소에 자주 시키는 걸 기억하고 있다가 "이거이거 맞으시죠?"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커피숍 안 가고 밖에 지나갈 때에도, 그가 저를 쳐다보거나 인사 하며 아는 척 한 적도 있는데요?"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길거리에 낯선 사람들 가운데 '우리 가게 단골손님'이 지나가니 쳐다볼 수 있는 겁니다. 제 단골 미용실 헤어디자이너도 제가 밖에 지나가고 있으면 저를 쳐다보고, 자주 가는 식당 알바생도 어쩌다 동네 횡단보도에서 마주치면 계속 쳐다봅니다. 전에는 근처 예식장에서 한 지인 결혼식에 갔다가, 뷔페에서 그 식당 알바생이 주말알바를 뛰고 있는 것도 본 적 있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그 알바생은 아무래도 자주 본 얼굴이니 반가워서인지 저를 계속 쳐다봤고 말입니다. K양이 그 커피숍에 들르기 시작한 게, 몇 달 단위가 아니라 년 단위지 않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가 K양에게 베푸는 친절은 '단골'에 대한 친절로 봐야하는 게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반짝이는 눈빛이었습니다. 조명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단호박처럼 말씀드리자면, 네, 조명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저는 저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K양은 커피숍 밖에서 그 안쪽에 있는 상대를 쳐다보지 않았습니까? 그런 와중에 눈이 반짝이는 걸 보고 뭐 하고 그러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런 것 같아 보였다고 여기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K양은 '상대가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은 증거'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런 '심증'들만으론 아무래도 판단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심증 다 제외하고 '사실'만 보자면, K양이 말을 돌려 무언가를 부탁했을 때 그가 단순한 대답으로 '원칙'만 이야기 한 적 있지 않습니까? 이렇듯 전 감정을 걷어내고 실제 벌어진 일들을 중점으로 보기에, 이 관점에서 봤을 땐 그린라이트라고 보기 어렵다는 대답을 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K양이 그에게 연락처가 담긴 쪽지를 주겠다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 K양이 애먼 곳에 걸고 있는 기대를 좀 내려두셨으면 해서 위의 이야기를 한 것이지, 그 관계가 이미 틀렸다는 얘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당장 쪽지를 주고 판정을 기다리듯 마음 졸이기보다는, 일단 대화를 좀 더 해가며 말을 트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다른 어떤 여자손님이, 그에게 "안경 바꾸셨네요?"라고 한 적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식으로 일단 말 한 마디를 더 걸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상대에게 머리를 자르는 등의 변화가 있으면 그걸 알아채 말을 꺼내도 되고, 커피 맛에 대해 말을 꺼내도 되며, 타르트 같은 건 판매할 계획이 없는지 물어도 되고, 음악 선곡은 누가 하는지 물어도 되며, 커피숍 내에 탐나는 소품이 있다면 구입처를 물어도 되는 겁니다. 이렇게 사다리 놓고 한 발 한 발 올라가 보면 되는 걸 두고, 단 포도일지 신 포도일지 상상하며 짐작만 하고 있진 마시길 바랍니다. 사다리를 오르던 중 문제가 생기면 다시 한 번 사연을 보내면 되니, 남의 집이 아닌 내 집 안마당에서 포도 좀 따보려는 거라 생각하며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오늘은 가장 기대를 안 하고 있었던 구피 암컷이 새끼를 낳을 것 같다. 난 EMB(일렉트릭 모스코 블루)라는 구피 암컷을 세 마리 키우고 있는데, 1순위 녀석은 새끼를 두 번 낳았고, 2순위는 새끼를 한 번 낳았다. 3순위는 2순위와 함께 온 녀석이라 원래 비슷하게 새끼를 낳았어야 하는데, 수컷 구피도 나와 보는 눈이 비슷한지(응?) 2순위를 먼저 임신시켰다.
아, 문제가 하나 발생하기도 했다. 내 계획은 1순위 수컷 구피와 1, 2, 3순위 암컷 구피를 짝지어 주는 것이었는데, 잠깐 합사한 사이 2순위 수컷 구피가 1순위 암컷을 임신시켰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1순위 암컷 구피가 낳은 새끼들이, 2순위 수컷 구피의 어릴 적 모습과 흡사하다. 이러면 나가린데…. 2순위와 3순위 암컷이 낳는 새끼들은 1순위 수컷의 자식들이 분명하니, 치어들의 레벨을 다시 조정해야 할 것 같다. 출산 장면 촬영을 위해선 또 어항 청소를 해야 하니, 오늘은 여기서 작별인사를 하기로 하자. 비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난 빨간색 수초 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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