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의 일이다. 어느 차량이 단지 내에서 우회전을 하려고 하다가 자전거 탄 여자아이를 칠 뻔 했다. 상대가 아이라는 걸 감안하면 차를 모는 쪽이 좀 더 주의했어야 하는 일이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잘잘못만 따지자면 아이가 분명 더 많이 잘못했다. 차는 이미 반쯤 우회전을 한 상태에서, 잠시 멈췄던 아이가 자전거를 몰아 차의 옆쪽에 부딪힌 거니까. 차주는 아이가 멈추는 걸 보곤 우회전을 한 거고, 아이는 차가 잠시 멈췄던 걸 '서서 기다리는 것'으로 오해해 진행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졌다. 난 사실 운전자가 내려서 짜증을 낼 거라 생각했다. 그 차는 차 문 옆에 달린 파란 스펀지도 안 뗀 새 차였는데, 아이가 자전거로 옆구리를 들이 받았으니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운전자인 아저씨는 내리자마자
"괜찮아? 다친 데 없어?"
라며 아이를 챙겼다. 하지만 바로 그 때, 뒤따라오던 여자아이의 엄마가 차로 다가와서는 발로 차를 걷어찼다. 자신의 아이가 큰 사고를 당할 뻔 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응징의 의미가 담긴 발길질이었다. 그러자 운전자도 태도를 180도 바꿔 아주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당신 뭐야. 왜 차를 발로 차?"
운전자는 이어
"얘가 와서 들이 받은 건데, 나도 애를 키우는 입장이라 애가 다치지 않았나를 먼저 살폈다. 그런데 당신 태도는 뭐냐. 당신이 엄마면 차가 나올 때 애가 서도록 붙잡아야지, 차가 이미 반쯤 나왔는데 애가 달려가도록 놔두면 어떡하냐. 애가 안 다쳤으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당신이 차를 발로 차서 그냥 못 넘어 가겠다. 지금 잘한 게 뭐 있다고 소리를 지르는 거냐."
라며 조목조목 짚어가며 설명했는데, 아이 엄마는
"애가 다칠 뻔 했잖아. 애가 다칠 뻔 했다고. 애가 다쳤으면 어떡할 뻔 했어."
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물론 운전자의 설명을 듣고는 아이 엄마도 자신의 아이가 더 많이 잘못한 거라는 걸 깨달았던 것 같은데, 사과하는 방법을 모르는지 사과는 못 하고 누그러진 목소리로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결국 운전자가 사과를 하라고 요구하고 나서야 아이 엄마가 사과를 했고, 그제야 두 사람 모두 갈 길을 갈 수 있었다.
1. 아빠 친구 아들과의 최악의 소개팅.
윤희씨의 사연을 읽으며 난 저 아이 엄마가 떠올랐다. 아이 엄마가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하지도 않은 채 판단해 화를 내거나, 상대의 반응이 어떤지도 보지 않은 채 차부터 발로 찬 것처럼, 윤희씨도 상대에 대해 뭔가를 알기도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답을 정해 놓고 행동했던 것 같다.
윤희씨의 그런 태도는, 윤희씨가 보낸 사연신청서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어느 항목에 윤희씨가 적어 놓은 말을 보자.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미기재."
추측과 짐작으로 이미 스케치를 해 버린 거다. 이러면 나는 채색에만 관여할 수 있을 뿐, 그림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워진다. 윤희씨가 상대를 만났을 때 벌였던 행동도 보자.
ⓐ 만났을 때 상대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음.
ⓑ 만나서는 상대가 학창시절 얘기를 했는데 부정적인 얘기였음.
ⓒ 커피라도 사려고 했는데, 어색한 대화가 이어질까봐 말하지 않음.
ⓓ 집에 돌아와 상대에게 연락이 왔는데 예의상 연락한 느낌임.
ⓔ 상대에게 또 연락이 왔지만 역시 예의상인 것 같아 확인 안 함.
역시나 추측과 짐작으로만 상대를 대한 것이다.
'저 사람은 나에게 관심 없을 거야. 예의상 잘 해주는 것뿐이야.'
라는 답을 이미 정해 놓고 그 증거만을 찾고 있는데, 그런 만남이 어찌 잘 될 수 있겠는가?
상대는 자신도 잘 모르는 식당이긴 하지만 윤희씨에게 메뉴를 추천해주기 위해 노력했고, 음식이 나왔을 때에는 자기가 시킨 것도 먹어보라며 권했다. 또, 같은 지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걸 알고는 학창시절 이야기를 꺼냈고, 윤희씨는 그가 학창시절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하지만 분명 긍정적인 이야기도 했다. 두 사람이 만난 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우산도 함께 쓰려고 했고, 그가 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물론 윤희씨가 다 거절했지만 말이다. 이어 집에 돌아와서도 그가 먼저 연락을 했고, 이후에도 그가 먼저 연락을 했다.
상대가 저렇게 열심을 내는 동안, 윤희씨는 한 게 없다. 추측과 짐작을 하며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학창시절 놀았던 얘기를 한 걸까요?"
"아빠가 엮여 있어서 싫은데도 억지로 카톡을 한 거겠죠?"
"집에 와서도 자기 잘 들어갔다고 할 뿐 저보고 잘 들어왔냐고 묻지 않던데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전부였다. 집에 와서 자기 잘 들어갔다고 말할 뿐 윤희씨에게 잘 들어갔냐고 묻지 않아 마음이 상했는가? 그렇다면 자신이 보낸 카톡을 읽지도 않고 무시해버리는 윤희씨를 보며, 상대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제가 연애 경험이 너무 없다보니까, 상대방 파악이 안 되네요. 저 좋다는 남자들 있어도 그동안 철벽을 치며 살았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남자들이랑 얘기를 아예 못 하는 건 아니에요.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교회 오빠들과는 얘기를 잘 해요."
교회오빠는 기본적으로 120%의 친절과 호의를 보이기 마련이다. 가족들도 그렇고, 윤희씨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대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남자가 다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잖은가. 윤희씨는 그간 이성에게 대우를 받아왔기에 그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려고 하는데, 이제 막 통성명을 마칠 남자가 시작부터 무릎을 꿇고 윤희씨를 모시진 않을 거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또, 일단 상대에 대한 파악부터 다 하고 시작하려 하진 말길 권하고 싶다. 최소한 카톡에 답장은 해주고 나서 파악을 하든 뭘 하든 해야 할 것 아닌가. 윤희씨도 나가서 가시 방석에 앉은 듯 불편한 얼굴로 말 한 마디 안 하고 있었으면서,
"불편한 침묵이 계속 이어진다는 건, 상대가 저에게 마음이 없다는 거죠?"
라는 이야기를 하는 건 윤희씨 본인의 감정만 생각한 질문일 뿐이다. 상대 입장에선 자신이 모시러 가고, 밥도 사고, 대화를 하려 노력해도 윤희씨가 뭐 씹은 얼굴로 앉아 있으니 얼른 집에나 가야겠다고 생각이 들 것 아닌가. 상대 입장에선 윤희씨가 커피 한 잔 사지도 않고, 집에 데려다 준다고 해도 거절한, '마음에 안 들어서 예의상 밥만 먹고 들어간 여자'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이후 상대가 카톡을 보냈을 때 윤희씨가 답을 안 한 것에 대해서도 '마음에 안 드니 더는 말 걸지 말라는 신호'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봤을 때 이 소개팅을 망친 책임은 윤희씨에게 더 많이 있으니,
"이미 끝난 사이이긴 하지만, 무한님이 보시기엔 상대에게 호감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것 같나요?"
라는 괴상한 질문은 그만두고, 상대에게 사과를 먼저 하길 권한다. 윤희씨가 상대에게 보인 태도를 동성친구에게 보였다면, 친구에게 절교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 아닌가. 소개팅이, 윤희씨에게 홀딱 반한 머슴 지원자 면접 보러 가는 거 아니다. 윤희씨와 같은 하나의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일이니, 앞으로도 이 간단한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2. 사연 쓰던 중 헤어졌어요. 전 어쩌죠?
좋은 이별이라는 건 없겠지만, 인정씨의 경우는 잘 헤어지신 겁니다. 이렇게라도 그와 헤어지는 게, 인정씨의 몸과 마음과 영혼과 미래를 위해 분명 좋을 거라 저는 확신합니다.
거짓말과 우기기를 반복하는 사람은 못 쓰는 겁니다. 상대의 책임감과 존중 뭐 그런 걸 확인하기 전에, 저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발견한 그 순간 잘라내는 것이 좋습니다. 집에서 자다가 나왔다는 사람이 정장에 구두를 신은 출근 복장 그대로라면, 누구라도 믿기 힘든 것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늦게 들어오는 문제로 부모님과 싸웠다고 해놓고는, 인정씨가 상대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확인해도 되냐고 하니
"사실 부모님 몰래 들어왔던 거다. 내가 왜 거짓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별 생각 없이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 하지만 집에 와서 자다가 나온 건 맞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남자. 그런 남자는 내려놓는 게 맞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 얘기도 했고 부모님들께 인사도 드렸고 하는 뭐 그런 거, 그런 것 때문에 이 남자와 결혼한다는 건 이미 항공편 예약했다고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로 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약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게 목숨 아니겠습니까?
더불어 그가 싸울 때 욕을 하고, 화가 나면 물건을 집어 던지는 행동까지 한다면, 이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야 하는 게 맞습니다. 인정씨는 그가 저런 행동을 해 놓고는 며칠 뒤 찾아와 무릎 꿇고 비니까 다시 만나곤 했는데, 무릎 꿇고 빈다고 다 진심인 거 아니고, 무릎 꿇고 비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그렇게 무릎 꿇고 빌기만 하면 다시 해결되는 일이 반복되니, 결국 남친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사과를 하는데도 며칠을 이러는 건 너무 심하다."
라는 말까지 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무릎 꿇고 비는 게 처음엔 그의 진심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엔 '이 정도 하면 얘가 넘어가 주겠지'하는 생각으로 하는 취하는 액션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정씨가 잘못한 것도 물론 있습니다. 전 그걸 아래에서 이야기 할 건데, 이건 재회를 목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저 인정씨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첫째는, 화가 났을 때 일부러 상대에게 심술을 부리거나 '형벌'처럼 연락두절을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인정씨의 태도가 상대를 다급하게 만들어 무릎을 꿇게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엔 결국 그도 '일부러' 그러는 인정씨의 태도에 환멸을 느꼈을 것입니다.
둘째는, 복수만 계획할 뿐 정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정씨의 남친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물론 인정씨 몰래 바람을 피웠다가 나중에 걸리게 된 건데, 그는 끝까지 부인하다가 인정씨가 증거를 내밀자 시인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둘의 만남 자체를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맞는 겁니다. 하지만 인정씨는 비슷한 상황에서
"너도 그랬으니 나도 그럴 거다. 그때 가서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말아라."
라며 그에게 서약을 받아내려 할 뿐이었습니다. 상대가 인정씨의 생일을 깜빡하면 일부러 인정씨도 상대의 생일이 지날 때까지 연락을 두절했고, 남친이 이성이 섞인 대학 동기들과 여행을 다녀온 것을 구실로 인정씨 역시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우기기도 했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란 생각으로 말입니다.
셋째는,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일단 서운함을 집어든 뒤 상대 탓을 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은 대화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자 - 주말에 갈 수 있는 거지?
남자 - 어딜?
여자 - 됐다. 그냥 나 혼자 가야겠다.
남자 - 어딜 가?
여자 - 주말에 시간 되면 **에 다녀오자고 했을 때, 자기가 알았다고 했는데.
남자 - 그게 이번 주말이었어? 나중에 언젠가 주말에 다녀오자고 한 거 아니야?
여자 - 됐어. 나 혼자 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남자 - 아니, 무슨 얘기를 하고 화를 내야지, 다짜고짜 화를 내.
여자 - 그만큼 자기가 내 얘기를 안 듣는다는 뜻이니까.
남자 - 우리가 약속 했어? 이번 한 주 내내 아무 말도 없었잖아.
여자 - 알았다고. 됐으니까 나 혼자 갈 거라고. 난 앞으론 자기랑 뭐 안 하려고.
연인이라면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같이 뭘 하기로 했으면 분명히 이야기 하며 계획을 짜야 하고, 상대가 깜빡한 게 있으면 즉시 알려주어야 합니다. 상대에 대한 평가나 실망은 그 이후에 해도 됩니다. 일단 도와서 뭔가가 되게 만들어야지, 아직 뭔가가 시작도 안 한 상태에서 따귀 맞은 기분 좀 느껴 보라고 심술을 부려선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런 식으로 상대를 대해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거라면 저도 적극 추천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런 방법을 사용해 봐야, 감정의 골만 깊어지고 원하던 걸 하게 되어도 불만만 가득 쌓일 뿐입니다. 다음번에 누구를 만나신다면, 저런 '본전도 못 찾는 대화'는 하지 마시길 권합니다.
매뉴얼은 이렇게 썼지만, 두 번째 사연의 인정씨는 남자친구를 다시 만날 것 같다. 둘은 헤어질 때에는 정말 다시는 안 볼 사람들처럼 저주와 욕을 퍼부으며 싸우지만, 며칠 지나면
"자나?"
하며 말을 걸어 다시 극적으로 재회를 한다. 그렇게 이전 갈등을 잊고 재회를 했다가도, 두 사람은 다시 자신들이 왜 헤어졌었는지를 깨닫게 되며 또 싸우는데, 이젠 그게 선을 넘어
"이것 봐라. 내가 너 이럴 줄 알았다."
"이번엔 내가 너 어떻게 하나 보려고 일부러 그런 거다."
"넌 진짜 답이 없다. 약속 해 놓고도 또 안 지키는 거 봐라."
라며 서로의 영혼에 망치질을 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간 홧김에 한 말들은 서로의 마음에 계속 축적되어 서로를 원수로 여기게 만들었고, 그간 생각할 시간도 몇 번이나 가질 만큼 가져봤으니 이제 그만 하자는 완전한 체념의 말들을 하게 되었다.
난 인정씨의 남자친구가 길거리에서 -그것도 맨 정신에- 인정씨에게 쌍욕을 하고, 몸을 밀치고, 전화기를 던져 부순 것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친구가 그렇게 돌변할 때면 인정씨는 정말 헤어지게 되는 것인가 해서 겁을 먹고는 그에게 매달리기도 했는데, 이렇게 2년, 3년을 더 사귀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게 내 솔직한 생각이다.
둘의 카톡 어디를 봐도 행복함이나 즐거움은 느껴지지 않고, 형사와 용의자 놀이하듯 둘이 역할만 바꿔가며 취조할 뿐이다. 헤어졌다가도 둘은 관성이나 외로움 때문에 쉽게 재회하곤 했는데, 난 그렇게 만나 계속 사귀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인정씨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니, 멀리까지 내다보며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길 진심으로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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