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저는 낮에 금촌에 갔다가 화장실을 못 찾아 울뻔 한 적이 있습니다. 점심에 먹은 게 잘못되었는지 차를 몰고 가다 갑작스레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어, 아무 곳에나 일단 차를 세우고 내렸습니다. 제가 내린 곳은 상가가 거의 없이 주택만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전 저 멀리 겨우 하나 보이는 편의점을 발견하고는, 가다서다를 반복하며(응?) 힘겹게 편의점에 도착했습니다. 편의점에 들어가 대충 눈에 보이는 캔커피를 산 후 화장실을 좀 쓰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편의점 주인은, 그곳 화장실이 가정집에 있는 거라 외부인에게 제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위급상황에 놓여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급격한 신호가 한 번 왔다 가면 잠잠해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괄약근과 대장이 서로 의사소통을 한듯 잠시 유예가 된 그런 시간 말입니다. 때문에 전 그 옆에 있는 미용실이 있었음에도 거기에 들어가 부탁을 하진 않았습니다. 급한 순간도 지나갔는데 괜히 남의 영업장에 들어가 화장실 좀 쓰겠다고 하긴 아무래도 멋쩍으니 말입니다. 미용실 대신, 그저 멀리 보이는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공원이라면 공중화장실을 보유하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편의점과 공원 사이엔 정차 중인 경찰차가 있었기에, 괜한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걸 최대한 자제하며 공원으로 곧장 질러갔습니다.
파주는 일산과 달랐습니다. 일산엔 공원마다 화장실이 있는 것과 달리, 파주에는 없었습니다. 그 좌절감 때문인지 다시 신호가 왔고, 전 다시 공원을 돌아 나와 화장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공원 옆으로 작은 오르막이 있었는데, 그쪽으로 가면 뭔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그 오르막을 올랐습니다.
그때부터 경찰차가 절 따라오기 시작했습니다. 하긴, 대낮에 주거지역에 들어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누가 봐도 수상할 겁니다. 제 딴에는 가다서다를 반복할 때마다 자연스레 행동하려 둘러보는 척을 했던 건데, 경찰이 보기엔 그게 털 만한 빈집을 물색 중인 모습으로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급한 와중에 경찰까지 붙어, 저는 점점 정신줄을 놓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르막을 올라가도 상가가 보이지 않았기에 다시 내려왔습니다. 중간에 인적이 드물고 쓰레기 더미로 은폐되어 있는 최적의 장소가 절 유혹했지만, 경찰차가 저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었기에 일을 저지를 수 없었습니다. 그냥 아까 편의점 옆 미용실에 들어가 부탁을 했으면 쉽게 해결되었을 걸 왜 그러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전 교회를 나가지 않지만 이럴 때마다 열정적인 기독교 신자가 되는데, 그 날도 3년 8개월 만에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집을 발견할 수 있었고, 전 들어가서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짜장면을 시키곤 화장실 키를 받아 미션을 해결했습니다.
1. 순간의 감정만을 따라 행동할 때 벌어지는 일.
저는 평소 인적이 드물고 쓰레기 더미로 은폐되어 있는 곳을 지날 때,
'오, 저기 딱 좋은데. 저기서 볼 일을 봐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위에서처럼 다급한 상황일 때에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만약 저 상황에서 그 쓰레기 더미 뒤로 가 볼일을 봤고, 그 와중에 저를 의심하던 경찰이 와서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라고 했다면 참 난처했을 겁니다. 제 사정을 잘 모르는 경찰은, 근처에 미용실도 있는데 왜 굳이 여기까지 들어와 숨어서 볼일을 보는지를 아무래도 의심스럽게 생각할 수 있고 말입니다.
사연을 주신 P양이 바로 저런 상황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P양이 거기서 왜 그러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P양의 남친에 대해 간략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 전과 있음.
- 전처와 아이 있음. 양육비 일부 부담 중.
- 연상녀들과 화상채팅 함.
- P양에게 돈 빌림.
- P양의 신용카드 등을 몰래 사진 찍어 둠.
- 여자 친구인 P양을 두고 다른 여자와 만남.
- 전 여친, 이전에 알던 여자들과 연락함.(저질스런 대화도 함.)
그를 만나기 전인 5월로 돌아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였다면 P양도, 지인의 남자친구가 저렇다고 했을 때 강력하게 이별을 권할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미 발을 들여 놓은 지금은,
- 그가 날 진심으로 좋아했던 것 같은데, 아닌지?
- 내 의심병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건 아닌지?
- 관계를 더 이어나갈 가능성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만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과연 정상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생각이나, 지금 P양이 하고 있는 게 올바른 행동들인지에 대해서는 접어둔 채 말입니다.
순간의 감정만을 따라 행동할 때 이런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술 취한 사람이, 다음 날 술 깨면 후회할 일들을 저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제 저희 동네에서는 앞 동 사람이 부부싸움을 하다 남편이 집기들을 부수고 출동한 경찰과도 몸싸움을 했는데, 그가 오늘 집에 돌아와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보면 분명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어제 맞다가 울며 뛰어나와 택시를 타고 가버린 부인은, 이제 영영 집에 돌아올 생각을 안 하게 될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 관계 밖으로 빠져 나와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저 그 안에서 지인들의 반대를 '쟤들이 잘 몰라서 하는 소리'정도로만 여기거나, 당장의 위기를 모면할 진통제 같은 해법들만을 찾아서는 곤란합니다. 얼마 전 발행한 매뉴얼에서도 한 얘기지만, 순간의 다급함 때문에 또 다른 어려움을 불러올 선택은 하지 마시길 권합니다. 30분 째 라면 끓이는데 싱거운 것 같다고 라면 하나 더 넣고, 또 짜다고 물 넣어봐야 어차피 그 라면은 못 먹는 겁니다. 이어서 끓일 더 큰 통을 찾지 마시고, 그만 싱크대에 부어버리시길 저는 권하고 싶습니다.
2. 무한님도 그를 모르면서, 선입견 때문에 반대하시는 군요?
네, 뭐라고 하시든 좋으니 여하튼 저는 이별을 권하고 싶습니다. 전 말보다 행동을 무겁게 생각하고, 행동의 축적이 그 사람을 증명한다 생각합니다. 그런 시각에서 P양의 남자친구를 보면, 그는 P양에게 달달한 이야기만을 했을 뿐 그걸 실천하려는 능력도 없거니와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P양의 남친은, 아주 얄팍한 수를 쓰고 있습니다. 애정과 정의로움의 기준을 자기 방식대로 설정해, 상대에게 한 가지 선택밖에 못 하도록 만드는 수입니다.
"넌 나를 가지고 노는 거다. 넌 언젠가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갈 거다."
저런 얘기를 하면 이쪽에서 이별을 말하는 게 '나쁜 짓'이 되어 버립니다. 헤어질 생각이라도 하게 되면 저 저주스러운 예언을 이쪽이 그대로 따르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지고,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계속해서 그 관계를 이어가야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면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넌 나에게 지적만을 해왔다. 내가 너에게 지적을 한 적 있냐. 난 너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넌 그렇지 못 하다."
이것 역시 얼핏 들으면 정말 그런 것 같은 얘기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류가 가득한 말일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P양과 제가 놀러가게 되었는데, 제가 식사 준비도 안 돕고 밖에 나가서 구경하자는 P양의 제안에도 거절합니다. 폰을 붙잡은 채 게임만 하고 있으며, 대낮부터 술을 마시곤 자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P양이 제게 불만을 이야기 했을 때, 제가 "난 너에게 바라는 게 아무 것도 없는데 넌 왜 내게 바라는 게 그렇게 많냐."라고 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방식으로 교묘하게 책임회피를 하는 거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그가 다른 여자들에게도 저런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데 제 국민은행 통장을 걸려고 했는데, 이미 P양은 그의 폰에서 그걸 발견하신 것 같습니다. 그는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게 만드는, 똑같은 레퍼토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P양과 제가 친구라면, 저 역시 저런 방식으로 P양에게서 제가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우정을 생각한다면, 서로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부탁을 들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보증을 서거나 하는 건 아니더라도, 돈이 급하게 필요할 때 빌려줄 수 있는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난 만약 내게 천만 원 밖에 없어도 그걸 전부 너에게 빌려줄 수 있다. 우리 우정을 생각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난 이럴 수 있는데, 너도 그럴 수 있는가?"
정도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P양이 저 상황에서 "난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기 아무래도 어려울 테니, 저는 긍정의 대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P양에게 500만원을 빌려달라고 할 것이고, 그때 P양은 제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듯 P양은 본인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그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만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으셨으면 합니다.
더불어 믿음이라는 건, 상대가 믿을만한 행동을 해야지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P양이 조사에 착수할 때마다 상대가 다른 여자랑 놀고 있었다는 증거가 나오는데, 이런 와중에 몇 시간씩 연락두절이 되고 아무 일도 없었으니 믿으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요구인 것입니다. 그가 한 달콤한 말들 말고, 행동을 통해 증명한 것이 얼마나 되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넌 내게 더 열심히 살아가게 만드는 동기가 된다."
라는 달콤한 말 말고, 그가 P양에게 10만원, 20만원씩 돈 빌리려 하는 것, P양의 신용카드 사진 찍어 두는 것, 그리고 다른 여자와 화상채팅하고 있는 것 등의 행동을 보셔야 합니다. 선입견을 떠나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라봐도 이건 정상적이지 않은 일들이니 말입니다.
3. P양의 문제는?
우리끼리니까 빙빙 돌리지 않고 곧장 적겠습니다. P양은 자신이 기대를 걸 수 있는 사람과 만났다가 실망하게 될 것이 두려워, 애초에 실망할 거리가 많을 것 같은 사람과 만나 그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 이걸 P양 연애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봅니다.
남자친구와 싸울 때 P양이 했던 말을 잠시 보겠습니다.
"난 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너를 만나려고 하는데, 넌 고작 이런 문제 때문에 이별을 생각하냐."
그 고난과 역경을 겪으라고 P양을 떠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P양의 남친 조차도 그래 달라고 요청한 적 없습니다. 그냥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이 있으니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한 거지, 진지하게 함께 미래를 계획하거나 지금부터 뭘 어떻게 준비하자는 등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만나는 남자들이 모두 바람둥이가 아닌 한 이러기도 힘들 것 같은데요. 제 의심병 같은 게 상대를 그렇게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정말 다 이상한 남자들만 제가 만난 걸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P양은 '쉬운 남자'를 만납니다. P양은 이번 남친과 채팅으로 만났고, 대화를 나눈 지 두 시간이 안 되어 그가 불러내자 만나러 갔다가 사귀지 않았습니까? 덜컥 사귀게 되고 난 뒤엔 P양도 그가 그렇게 여자들을 꼬시는 걸 낙으로 생각하며 산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발을 들여 놓은 후라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한두 명을 꼬셔본 게 아닌 상대는 P양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줬고, 앞서 말한 대로 P양이 이별을 생각하면 불편한 마음이 되도록 만들어 놓았으니 말입니다.
그의 전여친이 집까지 찾아와 씩씩대며 그와 싸우다, P양에게 남기고 간 말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너만 있는 게 아니야."
거긴 분명 시궁창인데, 그 속에서도 서로를 견제하며 1등 참치가 되겠다고 다투는 게 저는 참 가슴이 아픕니다. 오늘 나가서 돼지갈비만 뜯어도 흐뭇하게 불금을 즐길 수 있는데, 대체 왜들 무슨 호사를 누리겠다고 그에게로 집결하는 걸까요. 이렇듯 사람 하나 잘못 만나면, 팔자가 꼬이는 건 시간문제라는 얘기를 저는 해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애나 결혼에 있어 상대의 조건까지 따지는 건, P양이 말하는 그 '고난과 역경'을 되도록 겪지 않으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것은 그것으로 그의 노력이 한 번 증명되었다고도 볼 수 있고, 좋은 기업에 다닌다는 것은 그 기업에서 그를 인정했다고도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단순히 '고소득', '고스펙'이라는 것 말고도 다른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얘깁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요. 저소득, 저스펙이라고 해도 얼마든 행복할 수 있고, 명문대 나오거나 좋은 기업 다니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사람일 수 있는 거잖아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제가 말하고 싶은 지점이기도 합니다. 저 말을 반대로도 적용해 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소득, 저스펙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사람은 아니며 그와 행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보통 가진 게 많으면 오만하고 배운 게 많으면 교만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빈 수레가 더 요란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얼마 전 TV를 보다가 지인이 모 그룹의 경영권을 두고 벌어지는 일을 보며 역시 돈이 있으면 저래서 안 되는 뉘앙스의 말을 하던데, 그런 일은 돈이 없는 집안에서도 일어나지 않습니까? 백만 원도 안 되는 돈 때문에 형제간에 공기총을 쏘아댔다는 뉴스도 있고 말입니다.
P양은 P양의 남친이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으며 P양보다 학벌이나 소득에서도 아래에 있으니, 제어가 가능하다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경험해 보니, 그는 자신이 남들 때문에 불행하게 된 것이란 합리화를 하고, P양보다 우위에 서려는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그에게서 '나는 잘못한 거 없고 세상이 미쳐서 내가 이렇게 된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거기서 바로 돌아나왔어야 하는 건데, 안타깝게도 P양은 모성애와 동정심까지 발휘하며 그에게 더 다가가버린 것 같습니다.
저는 단풍이 들 때쯤 되면, P양도
'내가 저 때 왜 그랬지? 잠깐 미쳤었나?'
하는 생각을 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헤어지자. 넌 나를 떠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냐."라는 그의 마지막 떡밥에 파닥이는 건 이제 그만 두시길 권합니다. 그는 지금도 화상채팅을 하며 누군가에게 자신의 집으로 올 수 있냐고 묻고 있을 테니, 겨우 저 따위 수작이 담긴 마지막 떡밥에 넘어가 미안함이나 죄책감 같은 걸 가지진 마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불금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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