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에 난, 매뉴얼에서 몇 번 이야기 했던 것처럼 치과를 자주 다녔다. 처음엔 사랑니 때문에 갔던 건데, 가보니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 그래서 얼떨결에 여러 치료를 받았다. 때문에 난 친구들을 만날 때에도 치과에서 벌어진 일이나 치과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그 이야기에 유독 관심을 보였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내가 나눈 대화를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친구 - 신경치료 하면 무조건 씌워야 하나?
무한 - 응. 그런 걸로 알고 있어.
친구 - 나 치과 가면, 치과에서 신경치료 해야 된다고 할까?
무한 - 그건, 가봐야 알지.
친구 - 씌울 때 금으로 하는 게 좋은가? 그렇게 알고 있는데.
무한 - 일단 가서 진단을 받아 봐봐.
친구 - 사랑니 빼서 어금니로 쓸 수 있다던데, 진짜 그럴까?
무한 - 사랑니 빼서 앞니로 쓴다 그래. 멋지겠네.
친구 - 나 치과 가면 견적 얼마나 나오려나?
무한 - 가 봐. 가서 받으면 되는데 뭔 걱정이야.
친구 - 치과 가면 돈 많이 깨지니까. 현금으로 하면 더 싼가?
무한 - 네가 지금까지 물어 본 거, 치과 한 번 가면 한 큐에 다 알 수 있어.
첫 사연의 주인공인 L양의 사연을 읽으며, 위의 지인이 떠올랐다. L양 역시 걱정이 많으며 썸남이나 심남이가 생기면 주변의 지인들에게 상담을 한다. 그러면 아무래도 L양이 부정적인 것들을 위주로 이야기하기에 지인들은 선수인 것 같다, 끼 부리는 것 같다, 작업 거는 게 분명하다, 등의 평가를 하게 되고, 그 얘기를 들은 L양은 지인들이 만들어준 색안경을 끼고 상대를 바라보게 된다. 이것 외에도 다른 문제가 있는데, 아래에서 자세히 알아보자.
1. 저는 왜 남친이 안 생기는 거죠?
L양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남자에게 쉽게 거부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L양이 자신에게 들이댔던 남자들을 평가한 부분을 보자.
남자1 - 자꾸 말 걸고 참견해서 짜증남.
남자2 - 아예 남자로 느껴지지 않음.
남자3 - 남친 유무를 떠보는 걸 보며 정 떨어짐.
남자4 - 모든 여자에게 다 그럴 것 같아서 싫음.
이건, 얘는 이래서 싫고, 쟤는 저래서 싫다는 얘기 아닌가.
확실하진 않지만 교육학자들이 한 실험으로 알고 있는데, 실험 대상자에게 두 가지 콘텐츠를 주곤, 하나는 볼펜을 입에 문 채 웃는 얼굴로 보게 하고, 또 하나는 입술을 닫은 채로 보게 했다. 그러고는 두 컨텐츠 중 어떤 것이 더 재미있냐고 물었는데, 한 명도 빠짐없이 '볼펜을 입에 문 채 웃는 얼굴로 봤던 컨텐츠'라고 대답했다. 인위적으로 웃는 표정을 짓게 만들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대상에 대해 가지는 호감이 증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실험이었다.
저 실험에 비유하자면, L양은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자, 어디 한 번 내게 호감이 생기게 해 봐. 못 하면 끝장이야.'
라는 태도로 상대를 대하는 거라 할 수 있겠다.
L양에게 다가가려면 당연히 연락을 하고 말을 걸어야 하는데, L양은 상대의 그런 태도를 결격사유로 삼는다. 또, 다가가는 중 남친 유무를 알아보려 질문을 할 수도 있는 건데, L양은 역시 그걸 '남친 유무를 떠봐서 싫다'는 결격사유로 삼아버린다. L양에게 관심을 가지고 잘 해주는 사람을 보면서는, '다른 여자들에게도 저러겠지.'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말이다.
"제가 모태솔로이긴 하지만, 이제 연애에 대해 가졌던 기대도 대부분 없어졌어요. 주변 사람들의 연애에 대해 들으며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되기고 했고, 상대의 외모나 조건 같은 걸 크게 바라는 것도 아니고요."
L양이 '본선' 기준은 그렇게 낮춰줬을 지 모르지만, '예선'의 기준은 아직 그대로다. 예선에서 아무도 뽑지 않으면 본선에 올라올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어떤 감정일 때 교제를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연애에 관심을 가지긴 했는데, 1년간 약간의 호감이 생기는 사람도 없으니 초조해지네요. 그냥 싫지만 않으면, 상대가 사귀자고 할 때 사귀어야 하는 건지…."
연애에만 관심을 가질 게 아니라 상대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 경우도 유명한 작품을 읽을 때 '얼마나 잘 썼나 보자'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단점과 오류부터 찾게 되고, 눈물이 나야 하는 부분에서 눈물이 나기 보다는 '작가가 이걸 노리고 썼네.'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자연스레 읽으면 마음이 뭉클해질 수 있는 부분도, 그 이전에 나온 걸 떠올리며 '여기서 이 얘기하려고 앞에서 저 얘기를 꺼내놨던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이렇듯 다가오는 사람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하며, 나아가 주변 사람들에게 L양의 비평을 들려준 뒤 동의를 얻는 건 L양의 연애를 점점 어렵게 만드는 일이다. L양은 좋은 사람과 만나 행복한 연애를 하려는 거지, 뛰어난 비평가가 되려 하는 건 아니잖은가. 그러니 누군가를 만났을 때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한 개인'이라고 생각하며 현미경을 들이대지 말고, 맨 눈으로 상대를 좀 바라봤으면 한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서 낯설지 않거나 이상하지 않을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연애 보다는 상대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보시길!
2. 잡을까요, 아니면 잘 맞는 다른 사람을 만날까요.
자꾸 제 지인 얘기를 하게 되는 것 같은데, 제 지인 중에 부자인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 부모님은 결혼 당시엔 부자가 아니었지만, 이후 사업이 성공해 큰돈을 벌었고, 그 돈을 부동산에 투자해 더 큰 돈을 벌었습니다. 그 친구네 집에는 나무에 매단 그네가 있는데, 그 그네에 앉아 발을 굴렀을 때 보이는 데 까지가 그집 땅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집은 미신인지 무속신앙인지를 믿습니다. 그저 그렇던 시절 누군가에게 미래를 점쳤던 것 같던데, 그 점괘에 따라 선택을 했을 때 부자가 되자, 이후 모든 일들을 점을 쳐 해결하는 것입니다. 단기계획부터 중기계획, 장기계획, 그리고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점을 보고, 거기서 나온 결과를 따릅니다.
그 결과라는 게 좋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황당할 때도 있기에 문제가 됩니다. 예컨대 올해 물을 조심해야 한다는 점괘가 나오면 그 친구는 물가에 절대 가지 않습니다. 또, 다른 친구 어머니의 장례식을 하던 어느 날엔, 집안의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런 자리에 가면 안 된다고 해서 그 친구는 오지 않았습니다. 빨간 옷을 입어야 잘 된다고 하면 빨간 옷만 입고, 무슨 씨 성을 가진 사람과 만나지 않는 게 좋다고 하면 그 성을 가진 친구가 낀 자리엔 오지 않기도 합니다. 제가 볼 땐, 워낙 그 집 돈이 많으니 뭘 해도 그냥 잘 될 가능성이 높아 잘 되는 건데, 그 집은 점괘를 따라 행동했기에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더 착실하게 점괘를 따릅니다.
그래서 저나 다른 친구들이 그 친구와 멀어진 것 같습니다. 가끔 '가진 자의 심술'을 경험한 이유도 있긴 하지만, 다 같이 모여서 놀 때에도 그 친구의 원칙을 따라줘야 하니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우정이고 뭐고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들을 가장 우선시하는 그의 태도에 실망하기도 했고, 저런 태도라면 가깝게 지내다가도 그의 원칙 때문에 한 순간에 멀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비위를 맞추며 그가 베푸는 것을 누리려는 친구들 말고는, 대부분의 친구가 그 친구의 이름도 꺼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M양이 점을 보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분명한 원칙이 있다는 점에서 제 친구와 비슷합니다. M양에겐 여러 가지 원칙이 있는데, 저는 그중
"전 개인적인 신념으로 술을 전혀 마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술을 마신 사람과는 통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남친은 술을 마신 후에도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다는 등의 연락을 해왔기에, 이 사람이면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오는 전화를 받기도 했습니다."
라는 부분을 보며 사실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술, 담배를 안 하는 사람과 만나고 싶다.' 정도의 이야기라면 보통의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술을 마신 사람과는 통화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누가 봐도 빡빡해 보일 것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M양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좀 세속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M양과는 친구로 지내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럼 술을 마시든 담배를 피우든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하든 터치를 받을 일도 없을 거고, 어차피 남자친구가 되어봐야 M양의 원칙에 따르고 M양을 기뻐하게 해야 할 의무만 가득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건, 정회원과 준회원의 차이가 아무 것도 없을 때 굳이 등업을 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겁니다. 정회원이 되어봐야 준회원과의 권한은 똑같고, 대신 정회원이 된 자격으로 출석률과 후원에 신경 써야 하는 의무만 늘어납니다.
"제가 상담을 자주 받는 친한 오빠가 있습니다. 그 오빠와 만나서 밥을 먹거나 할 때면 편합니다. 그런데 왜 남친과는 그런 편한 대화를 할 수 없는지가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원인은 두 가지 입니다. 먼저, 남친을 대하는 것처럼 그 오빠를 대하면, 그 오빠도 두 손을 들고 말 가능성이 높습니다. M양 역시 그 오빠를 '아는 오빠'가 아닌 '남친'으로 두게 되면 어마어마한 불만을 가지기 시작할 수 있고 말입니다. 어쩌다 만나서 밥 한 번 먹는 사이일 땐, 120%의 호의를 베풀며 만날 수 있고, 서로의 고민에 대해 주례사식 조언을 해주거나 마냥 응원만 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이에서 더 가까워져 5박 6일의 여행이라도 같이 가게 되면, 반드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과 갈등이 생기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M양과 만나 다른 누군가에 대한 불평을 하고 M양이 맞장구를 쳐주면 우린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M양과 만나 M양에 대한 불평을 하기 시작하면, 우린 오늘부터 원수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남친과 나눠야 할 이야기까지도, 의지가 되는 다른 누군가와 나눈 뒤 결론을 내버리고 만다는 점입니다. 늘 얘기하지만 그 둘에 사용되는 동력은 같기에, 그렇게 분산해 버리면 이도저도 아니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M양의 사연을 읽으며 두 번째로 놀란 것은, 그렇게 많은 원칙들을 가지고 있는 M양이 '연애 중 다른 이성과 만나거나 대화하는 것'에는 관대하다는 점입니다. 이건 뭐 이미 M양이 '조언자인 좋은 오빠'를 가진 까닭에 원칙에서 탈락시키신 것 같은데, 상대 입장에서 보자면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하던 사람이 다른 남자와 단둘이 만나 밥을 먹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를 구하려 하는 게 좀 황당할 겁니다.
나아가 M양은
"남친이 저와 썸을 탈 때, 다른 여자 동생에게 연애 상담을 받은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 부분이, 제가 이 친구를 다시 붙잡아서 연애를 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어렵게 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둘을 같이 놓고 보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M양이 아는 오빠와 단둘이 만나 밥을 먹으며 조언을 듣는 건 '착한 관계'이고, 남친이 썸탈 때 아는 여동생에게 연애상담을 받았던 건 '신뢰할 수 없는 나쁜 관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로 여겨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까지 한 얘기가 너무 길어서 이해하기 어렵다면, 아주 간략히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M양은 불공평한 원칙을 상대에게 요구했고, 상대는 그것에 맞추려 노력하다 지쳐 떠났다.
M양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제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이 맞지 않을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연애는 함께 하는 거라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상대에게 100점을 요구하는 M양은, 상대에게 몇 점짜리 여자친구일지도 생각해 보시고 말입니다. 이번 연애는 남친이 M양에게 90점을 줬는데, M양은 상대에게 51점을 줘서 헤어진 것입니다. 상대가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술 한 방울 안 마시며 M양이 바라는 거 다 해주려 노력했는데, 그런 상대에게 51점을 주는 건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또 누구라도, 나는 상대에게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줬는데 상대는 내게 바닥을 치는 점수를 주면, 괘씸하고 분해서라도 이후 마이너스 점수만 주게 되지 않겠습니까?
M양이 그 많은 원칙들의 목적을 내세우는 목적은 '행복한 연애'를 위해서 일 텐데, 그 원칙들이 지금의 '행복한 연애'를 불행하게 만들고, 나아가 파탄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만약 M양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 즐겁게 연애를 하던 중, 상대가 "내 원칙은 같이 술잔 기울이며 취해 속내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계속 술 마시기만 강요한다면, 그 원칙의 강요 때문에 결국 둘은 헤어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좋은 사람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미 만들어 둔 -상대에겐 맞지도 않는- '이상적'이라는 옷을 입히려 하다가 그를 놓치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짧게 쓰자는 다짐을 삼만 번쯤 했는데, 또 이렇게 글이 길어져 버렸다. 나도 그냥 웹에 있는 어느 사연을 편집에서 요점만 정리하는 거면 짧게 쓸 텐데, 매뉴얼은 사연은 보낸 독자가 있고 또 그 독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이야기와 맞춰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길어지는 것 같다. 반대로 매뉴얼이 자세해질수록 사연의 주인공이 아니신 분들은 남의 글 첨삭을 보는 것과 같은 지루함을 느끼실 수도 있고 말이다. 마땅한 방법을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어제 난, 예고대로 유성우를 보러 다녀왔다.
▲ 시간별로 날씨를 조회하며 고뇌한 기록들.
일기예보가 날 들었다 놨다 했는데, 나중엔 마음을 비우고 그냥 드라이브 다녀온다는 생각으로 임진각을 찾아가 봤다.
▲ 하늘을 구름으로 뒤덮이고 번개만….
유성우 구경은커녕 비 내리고 번개까지 쳐서 사진을 찍기도 어려웠는데, 그래도 번개가 예쁘기에 번개라도 담고자 촬영을 강행했다. 하지만 카메라를 꺼내니 번개는 저 멀리 떨어진 곳에만 쳤고, 결국 유성우도, 번개도 사진에 담을 수 없었다. 오늘 다시 나가면 지각생 유성우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위성사진을 보니 큰 구름 두 개가 몰려오고 있다. 어쩔 수 없이 12월에 있을 쌍둥이자리 유성우를 기약하며 마음을 접어야 할 것 같다. 근데 그땐 진짜 추운데….
14일은 부산 북항재개발구역과 대구 수성못에서, 15일은 광주 풍암호수공원과 서울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 불꽃축제를 한다고 한다. 또, 일산 호수공원에서도 15일에 음악회가 있고, 임진각에서는 14일과 15일 평화 콘서트가 열린다. 불금의 신나는 기분을 봉인만 해두지 마시고, 여러 계기들로 이어가며 풍성하게 가꾸시길 바란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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