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현씨 안녕. 난 그동안 많은 허브화분을 키웠는데, 전부 죽었어. 지금 살아있는 거라고는 허브가 아닌 선인장과 산세베리아 뿐이야. 산세베리아는 외할머니께서 갖다 주셨는데 혼자 알아서 잘 번식하고 있고, 선인장은 동네 어느 할머니께서 이사갈 때 화분정리가 힘들다면서 주셨는데 역시나 알아서 잘 자라고 있어. '게발선인장'인가 하는 건데, 내 스타일은 아니라서 관심을 두고 있진 않지만 꽃까지 필 정도로 잘 자라. 물론 내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다이소에서 파는 영양제를 사다 꽂아 주는 츤데레이긴 해.
내 허브들은 왜 다 죽고 말았을까? 당연히 관심과 애정을 지속적으로 주지 않아서지. 가장 아끼던 레몬밤은 어느 날인가부터 잎이 까맣게 타들어가더니 죽었고, 모히또를 만들겠다며 본격적으로 키우던 애플민트는 모히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나서 돌보지 않았더니 누렇게 말라 죽었어.
살릴 수 없었냐고? 계속 관심과 애정을 가진 채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으면 살릴 수 있었겠지. 그런데 허브를 사올 때의 첫 마음과 달리 관심이 점점 떨어지기도 했고, 어떤 건 귀찮아서 물을 한 번에 많이 주었더니 뿌리가 썩기도 했으며, 또 어떤 건 생각만큼 빨리 자라지 않아 실망을 하다 보니 물도 안 줘서 말라 죽기도 했어. 겨울에 실내로 들여 놓지 않은 까닭에 죽기도 했고 말이야. 꾸준히 관리했다면 녀석들은 전부 살아 있겠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죽고 말았지.
내가 이 얘기를 하는 건, 종현씨가 이성을 대하는 태도가, 내가 허브들을 대했던 태도와 비슷하기 때문이야.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건지, 무엇을 어떻게 고쳐나가야하는지 오늘 함께 살펴 보자고.
1. 농구공에서 손을 떼면 어떻게 될까?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봐. 드리블을 하던 농구공에서 손을 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농구공이 몇 번 더 튀다가 멈추게 되잖아. 종현씨가 그동안 100개의 농구공을 드리블 해 본 적 있다고 해도, 계속해서 드리블을 하지 않으면 모든 공은 결국 멈추게 될 거잖아.
새로 만나는 누군가와의 관계는, 새로운 농구공을 패스 받은 것과 같아. 물론 종현씨도 처음 농구공을 받으면 드리블을 하긴 해. 그런데 그 드리블은 지속적이지도 않지. 드리블에만 비유하면 무슨 얘긴지 잘 모를 수 있으니까, 아래 리스트를 한 번 체크해봐.
- 올해, 지금까지 몇 명에게 생일축하 메시지를 보냈는가?
- 지난 주, 주말을 잘 보내라는 연락은 누구누구에게 했는가?
- 이번 주, 주말 잘 보냈냐는 연락은 누구누구에게 했는가?
- 최근 가장 친하게 지냈던 이성의 근황은?
- 반 년 이상 알고 지낸 사람과 함께 밥을 먹은 적은 언제인가?
- 오늘, 밥 맛있게 먹으라고 누구누구에게 연락했는가?
막 알게 된 처음에만 반짝 저러는 게 아니라, 그냥 꾸준히 계속 대화를 나눠야 해. 저런 드리블 없이 그냥 놔두면 인연이 끊기는 건 시간문제야.
주말 잘 보냈냐는 물음이나 밥 먹었냐는 물음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 그런데 아니야. 저건 '노크'와 같은 거라서 그 자체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지만,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며 동시에 인연의 끈을 당기는 것이기도 해. 못 믿겠다면 꽤 오랜 기간 연락 안 하고 지내던 사람에게 오늘 연락을 해봐. 단순히 오늘 한 번 연락 했다고 내일부터 서로 일상을 챙기며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어.
저런 '드리블'을 시작하면, 종현씨가 올해 들어 만난 사람이 딱 두 명이라도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어. 단, 그게 몇 주 꾸준히 연락하고 상대 SNS에 들어가 좋아요 버튼 누르다가 흐지부지 되면 안 돼. 전력질주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적어도 3개월, 계절 하나쯤은 상대와의 인연의 끈을 당긴다고 생각해봐. 초반 종현씨의 추진력은 A급인데, 지구력은 폐급이잖아. 처음에 바짝 들이대다 금방 남남으로 지내는 관계를 추구하지 말고, 오래, 길게 만나는 관계를 생각하며 상대를 대해봐.
2. 운명적인 사랑?
종현씨가 오늘, 정말 마음에 드는 상대를 소개팅에서 만났다고 해봐. 그러면 종현씨는 그녀를 위해 시간과 돈과 열정을 쓰는 게 아깝지 않지? 졸려서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그녀가 카톡을 보내오면 새벽까지 대화를 할 수 있잖아. 시간이 밤 10시라 만나기 불가능해 보이는데도, 만약 그녀가 잠깐 만나는 걸 허락한다면 당장 달려나갈 거잖아.
뭐, 좋아. 거기까진 크게 나쁘지 않아. 그런데 그러면서 상대도 종현씨와 똑같은 마음이길 바라면, 거기서부터 문제가 되는 거야. 왜? 종현씨가 상대를 생각하는 것만큼 상대가 종현씨를 생각하진 않는다고 느끼게 되면, 큰 실망과 함께 상대가 미운 듯한 감정이 들거든.
하지만 잘 생각해 봐봐. 종현씨가 상대에게 풍덩 빠진 건, 상대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종현씨가 상대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 후 그 이미지에 빠졌기 때문이잖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게 '시청자가 연예인에게 반하게 된 것'과 다를 게 없는 거야. 이건 예전에 한 번 이야기 했던 적이 있는데, 난 어느 방송인을 술집에서 만난 적이 있어. 나야 당연히 그 프로그램을 봤으니까 그와 잘 아는 느낌이 들었지.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인사를 했어. 하지만 그는 나를 모르니까 당황한 표정으로 겨우 인사만 받아주었지. 이건 당연한 거잖아. 여기서 내가
'난 그와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나랑 말 한 마디도 더 섞고 싶지 않은가 보네.'
하는 생각을 하며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다면, 그건 그가 잘못했기 때문인 거야, 아니면 내가 이상하기 때문인 거야? 내가 이상하기 때문인 거잖아.
종현씨가 이성을 대하는 방식이 딱 저래. 90%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다가갔는데, 상대가 종현씨를 잘 몰라서 50%의 호감만 가지고 대하면, 급격하게 실망하며 관계를 정리하려는 마음까지를 품고 말아. 이래버리면 종현씨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은
- 종현씨에게 관심을 가진 금사빠 이성.
밖에 없어.
만난 지 일주일 만에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하며 세상에 단 둘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 그게 바로 '운명적인 사랑'인 걸까?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그런 사람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외로움에 찌든 채 사람이나 연애가 고픈 사람만 찾아도 그런 사랑은 당장 가능해. 하지만 그런 연애를 시작하면, 머지않아 서로를 이어주던 연결고리가 '서로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이 아니라 '스스로의 외로움'이라는 걸 발견하게 될 거야. 때문에 한 쪽이 더 이상 외롭지 않으면 다른 한 쪽이 집착하게 되는 모양으로 변하거나, 둘 다 외롭지 않게 되면 서로에 대한 평가를 하다 이도저도 아닌 사이로 변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내가 아무리 이런 얘기를 해도 종현씨가 무조건 '줄리엣'을 만나겠다고 하면 방법이 없는 거겠지. 다만 내가 해주고 싶은 얘기는, 로미오가 만약
'줄리엣이 내 마음과 똑같았다면, 유모를 보내는 대신 본인이 왔을 거야.'
'나와 같았다면, 부모님의 눈이 두려워 지금 나보고 가라고 하진 않았겠지.'
라고 생각했다면, 답이 없었을 거라는 거야. 종현씨가 '잘 알지도 못 하는 사람'에게, 상대가 뭘 얼마나 어떻게 해주길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봐.
3. 제가 같이 하자고 하면 할래요?
언젠가 신문광고에 이런 글이 실린 적이 있어.
<신부 구함>
모집인원 - 1명
나이 - 27세~37세.
조건 - 신체 건강한 자. 해외여행에 결격 사유가 없는 자. 후인을 이을 수 있는 자.
연수기간 - 6개월
접수방법 - 우편접수(전화 사절)
첨부서류 - 이력서, 자기소개서, 아래 문제에 대한 답.
문제 - 1. 삶의 정의를 쓰시오. 2. 봉사의 정의를 쓰시고. 3. 그대 꿈을 쓰시오.
신랑 - 45세. 학력 무(신부가 가르쳐야 함). 농업 및 고물수집업.
내가 저 광고를 직접 본 게 아니라, 누가 사진 찍어서 올려 둔 걸 웹에서 본 거라 저게 진짜인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어. 그런데 저게 진짜라고 한다면, 그 주인공은 이런 생각을 했을 수 있지.
'내가 이런 식으로 상대가 손해인 듯한 광고를 올려두었을 때, 그 광고를 보고도 내게 연락을 해오는 사람이 진짜 훌륭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조건을 안 보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찾아온다면, 난 내 진짜 모습과 재산으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줘야지.'
만화나 영화에서라면 저런 게 아름다울 수 있어. 하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상해 보이는 거 아니겠어? 저 광고가 사실이고, 광고를 실은 사람이 현실에서도 저런다고 생각해봐. 선 자리에 나가 누군가를 만났는데, 거기서 다짜고짜 상대에게 삶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말해달라고 하고, 꿈이 뭔지 말해달라고 했다면 어떨 것 같아?
물론 종현씨가 저 정도로 이상하단 얘긴 아니야. 하지만 종현씨도, 자신을 상대에게 알리기 전에 상대가 맹목적으로 종현씨를 신뢰하고 애정을 갖길 바라거든. 인터넷 벼룩시장에 비유하자면, 물건 사진이나 물건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안 올려놓고 다짜고짜 구매자 선입금 매매 한다고 말하는 판매자 같은 거야.
종현씨는 자신이 상대에게 별 말을 안 해도 상대가 알아서 종현씨의 뜻을 알아주고, 나아가 서로 눈빛만 주고받아도 같은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길 바라지? 그런데 미안하지만, 그건 그냥 만화적 판타지일 뿐이야. 만약 그러는 상대가 있다면, 다시 말하지만 그건 '운명적인 사랑'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상대의 진입장벽이 낮거나 상대가 외로워서 그런 것일 확률이 높아. 운명적인 무언가라서 그런 게 아니라, 상대가 사탕 사준다는 아저씨 의심 없이 잘 따라가는 유형이라 그런 것일 수 있다는 얘기야.
난 종현씨가 그런 기대를 가진 채 상대를 떠보는 걸 좀 그만 했으면 좋겠어. 진심을 숨긴 채 상대에게 마음이 있나 없나 떠보지 말고, 차라리 그 시간에 상대가 종현씨의 제안에 기쁜 마음으로 승낙할 수 있게 만들어. 다시 한 번 인터넷 벼룩시장 비유를 하자면, 상품 사진을 추가하고 긴 상세설명을 적으라는 얘기야. 그런 건 전혀 하지 않은 채 '물건 사진 안 보고도 살 사람'이나 '물건에 대한 설명 안 듣고도 신뢰로 거래할 사람' 찾지 말고 말이야.
정말 별 것 아닌 며칠짜리 단기알바 할 때에도 이력서 써가고 관리자 면접까지 보잖아. 내 말은, 어떤 이성을 만날 땐 최소한 그 정도의 성의라도 갖추자는 거야. 만나서 종현씨가 어떤 사람인지, 종현씨가 잘 하는 건 뭔지, 상대를 만나서 기쁘다면 얼마나 기쁜지, 뭐 그런 것들을 말해주고 또 묻고 그러자는 거지. 더불어 만난 당일에만 딱 저러고 난 뒤 다음 날부터 구애모드로 들어가지 말고, 역시 길게 봐. 상대가 종현씨의 가장 친한 친구 이름을 알게 될 때까지, 상대가 외가와 친가 중 어느 곳의 친척들과 더 친한지를 알게 될 때까지 좀 길게 보라고. 이런 과정 없이 한두 번 만난 뒤 그때부터 상대의 마음만을 떠보려 하면, 만났던 모든 이성과의 관계는 초토화되고 결국 주변의 이성들마저 모두 멸종되게 된다는 걸 잊지 마.
종현씨, 퇴계 이황이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알아?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였대. 퇴계의 매화사랑은 유명해서, 천 원짜리 지폐에도 매화가 그려져 있잖아. 여기엔 두향과의 러브스토리가 포함되어 있어 또 흥미롭기도 한데, 그걸 여기다 적으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생략하도록 할게.
관계에 물을 주고, 가꾸고, 돌보자고. 만나는 순간 상대에게 반해 불타올랐다 사그라지는 그런 건, 종현씨 많이 해봤잖아. 그러니 이제는 길게 보고 만나며 천천히 달궈지는 관계를 만들어 보자고. 그리고 상대의 아주 작은 반응 하나하나도 휘청휘청하지 않도록 종현씨도 중심을 좀 잡고, 상대는 종현씨와 다른 삶을 살고 있으며 살아왔기에 생활 리듬이라든지, 취향이라든지, 생각 같은 것들이 다를 수 있다는 걸 기억하자고.
종현씨가 내일 저녁 같이 먹자고 했는데, 상대가 선약 있다고 답했어. 그래도 괜찮아. 그 한 마디에 완전 실망해서는
'그럼 내일 말고 다른 날 먹자고 말할 수도 있는 걸 텐데, 그 말은 안 하네. 나한테 관심이 없다는 증거겠지. 더는 연락하지 말아야겠다.'
하며 다시 '나랑 잘 맞을, 운명적인 새로운 사람'을 찾아 나서지 말라고. 지구력을 키워. 내 경우를 예로 들자면, 난 바다낚시 장비가 없기에 바다낚시를 좋아하는 A씨와 안 친했어. 그래서 그냥 아는 사이로만 지내고 있었는데, 이후 바다낚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A씨와 같이 낚시를 가는 일이 늘어나다보니 우리는 친해졌어.
이렇듯 변화의 가능성도 있는 거니까, 지금 서로의 취향과 생각과 애정도와 관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빨리 등 돌리며 관계를 끊지 말고, 나무를 하나 심어둔다는 생각으로 가꿔가 봐. 그런 나무들이 종현씨 주변에 있으면, 꼭 불타는 연애가 아니더라도 훗날 그 나무그늘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을 테니까. 종현씨도 그들에게 그런 나무가 되어주는 거고. 그게 사람 사는 거 아니겠어? 인연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너무 쉽게 뿌리 뽑지 말고, 잘 가꿔가 보자고. 알았지?
** 지난 주말, 간디(애완견)가 디스크 의심 증상으로 움직이지 못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디스크 판정을 내릴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니니 일단 약을 먹이며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언젠가 어느 독자 분께서 댓글로 '관절 문제로 고생하던 강아지도 쌩쌩하게 만드는 마법의 영양제'를 소개해 주셨었는데, 그때 적어놓질 않아서 찾질 못하고 있습니다. 혹 이 글을 보신다면, 그 영양제 이름을 댓글로 다시 한 번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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