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수씨, 이건 너무하잖아.
- 여자 후배가 여자친구 사귀어 본 적 있냐고 물어봄.
- 여자 후배가 선톡을 해옴.
- 여자 후배가 밥 먹자고 한 뒤 같이 걸으며 팔짱을 낌.
- 여자 후배가 카페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함.
- 여자 후배가 사주고 싶었다면서 밥값도 냄.
이게 ‘그린 라이트’라는 걸 모른다면, 근수씨는 ‘연애 색맹’인 거야. 상대가 이것보다 더 ‘관심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해? 후배가 근수씨 집에서 라면 먹고 가도 되냐고 물어보기라도 해야 ‘아, 확실히 관심이 있구나’하는 거야?
파란 불 들어온 지 한 달 보름이 넘었는데, 이 시점까지
“상대가 저한테 호감을 가지고 다가온 것인지 궁금해요.”
라는 얘기만 하고 있을 거라면, 연애는 접고 그냥 기술 배워야 하는 거야. 여자 후배는 저렇게까지 대시를 했는데, 근수씨는
“혹시 제가 연락을 했다가 우리 대학 대나무 숲에 카톡 캡쳐해서 올라갈까봐 걱정됐어요. 치근덕거리진 말아야지 하면서 연락을 안 했고요.”
따위의 얘기만 하고 있어. 근수씨가 모태솔로라고 해도 이건 너무한 거잖아. 상대에게 근수씨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게 분명한 거면, 왜 근수씨가 먼저 제안한 것에 대해서 상대가 거절하기도 했냐고? 아래에서 얘기해줄게. 딱 봐봐.
1. 호감이 있는 것 같은데 거절하기도 하는 이유는?
근수씨가 상대에게 연극 보러 가자고 말한 게 언제야?
- 중간고사 전전 날.
이러니까 상대가 시험공부 해야 한다고 대답한 거잖아. 뭔가를 제안할 거라면 상대의 사정까지 고려해야 하는 건 기본이야. 근수씨가 내일 이사하는데 내가 오늘 밤 낚시 가자고 해봐. 그럼 근수씨도 거절하는 게 당연하잖아.
시험 끝나고 상대가 공부하자는 말 안 하니까 근수씨는 뭔가 허전했어. 그래서 상대에게 연락해 공부 하러 가자고 했지. 그 말에 상대는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공부 같이 못 할 것 같다고 했고. 이것도 봐봐. 타이밍도 엉망이고 주제도 엉망이야. 차라리 이때 연극 얘기를 하고 저 위에서 공부 얘기를 했어야지. 근수씨 나름대로는 용기내서 한 요청일지 모르겠지만, 시험 끝났는데 공부 같이 하자는 거 뒷북이잖아.
시험 전 같이 공부할 때 분위기가 어땠는지도 한 번 봐봐. 상대가 근수씨에게
“오빠 너무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라고 했지? 근수씨 진짜 공부만 했잖아. 아니, 공부할 목적으로 만난 거라고 해도 사람이 같이 있으면 밥도 먹었냐고 물어보고, 공부 잘 되냐고도 물어보고, 잠깐 머리 식힐 겸 커피 한 잔 하겠냐고 청하기도 하고 그래야지. 그 와중에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해 책 막 300페이지씩 읽고 필기하고 그러면 상대는 싱숭생숭한 채 계속 있어야 할 수 있잖아.
근수씨가 상대에게 먼저 다가가려 밥 먹자는 얘기를 했을 때도 봐봐. 근수씨는
“제가 밥 먹자고 하면 상대에겐 이미 먹는 중이다, 먹으러 가는 중이다, 친구랑 먹기로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제게 관심이 있다면 선약이 있더라도 깨고 왔을 텐데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앞으론 상대와 밥 먹고 싶으면 무조건 하루 전에 얘기를 해. 머뭇거리다 밥 때 다 지나서 밥 먹자는 얘기를 꺼냈다가 상대가 먹고 있다고 하니 실망하지 말고. 알았지? 밥 말고 다른 것도 마찬가지야. “이따 저녁에 치킨 먹을래?”라고 말하지 말고, 그 전날 말해. 꿍해서는 선약을 깨고 오네 마네 하지 말고, 선약이 있는지를 먼저 물어. 알았지?
그리고 전화는 무조건 다정하게,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 상대가 전화 했을 때 근수씨는
“어. 왜?”
라고 받았지? 저렇게 받은 이유에 대해 내게는
“저는 동성 친구끼리도 급한 상황 아니면 전화를 일체 안 해서 당황했어요. 상대는 제 반응에 당황했는지 먼저 끊는다고 말해서 어색한 상태로 있다가 끊었고요.”
라고 말했고. 본인은 저렇게 전화 받아 놓고, 상대에 대해선 선약 안 깬다고 관심이 있네 없네 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스킨십도
“저는 허락 없이 다른 사람 몸에 손을 대는 것에 민감해서 일체 손을 대지 않았어요.”
라는 얘기만 하지 말고, 상대가 옷깃을 잡고 걸으려고 하면 근수씨가 손을 잡아줘. 그런다고 상대가 고소하는 거 아니니까, 잡아. 그리고 상대가 근수씨 옷깃을 잡은 건, 같이 걸을 때 근수씨가 떨어져서 걷거나 혼자 빨리 걸어버리니까 잡는 거잖아. 근수씨가 차도 쪽으로 걸으라는 뭐 그런 얘기까진 내가 안 할 테니까, 그렇게 혼자 가지만 마.
“전 이 나이가 되도록 연애경험이 없습니다. 집착 같은 짝사랑만 네 번 했어요.”
핑계는 그만 대고 해야 하는 걸 해. 전과 다른 상황으로 만들고 싶다면 매번 해오던 행동과는 다른 행동을 해야 하는 거잖아. 그간 그렇게 살아왔다는 핑계만 대며 같은 모습을 고수하면,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겠지.
근수씨가 다른 사람을 짝사랑 할 때 상대에게 보였던 관심과 애정의 1/10만 후배에게 보였어도 후배는 기뻤을 거야. 그런데 근수씨는 위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은 ‘최악의 모습’만을 상대에게 보여줬잖아. 이쯤 얘기했으면 근수씨도 이제 감 잡았으리라 생각하는데, 이게 또 감 잡았다고 금방 다 해결되는 건 아니야. 그간 해오던 습관에서 한 번에 벗어나기도 어려울 뿐더러, 안 해본 걸 하려다 보니 의욕만 앞서 실수할 수 있거든. 이 부분에 대해선 아래에서 또 자세히 설명해줄게.
2. 그럼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금 일산에선 꽃 박람회가 한창이야. 이럴 땐 꽃 박람회 가봤냐고 물어보면서 같이 일산구경을 한 번 해도 괜찮아. 일산이 좋은 게, 특별난 건 없지만 대부분 상향평준화 되어서 음식이든 교통이든 문화공간이든 꽤 잘 되어 있거든. 너무 복잡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뭐가 없어서 헤맬 일도 없으니, 요 정도의 조건이면 데이트하기 괜찮을 거야.
데이트 신청은 위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상대의 편한 시간’을 물어본다는 생각으로 하면 돼. 그렇다고 “너 언제 시간 괜찮아?”라고 막연하게 묻진 말고, “금요일이나 토요일 중 언제가 괜찮아?”정도로 물으면 될 거야.
그리고 데이트 약속을 했으면, 약속을 정한 날과 약속한 당일 사이에 연락을 해. 약속 잡았으니 당일에 “우리 이따 보는 거지?” 같은 거 절대 하지 마. 근수씨 상대랑 치맥먹기로 했을 때 저런 질문을 세 번이나 해 약속 미뤄졌던 거 기억하지? 약속 잡은 후 침묵하고 있다가 당일에 연락해서 저런 말 하다간, 또 3주가 그냥 갈 수 있어. 그러니 제발, 꾸준히 연락을 해. 약속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아, 둘이 만나는 거 어색하다고 또 상대보고 “친구들이랑 같이 나와도 되고.” 따위의 말도 하지 말고.
만나서는, 아무래도 근수씨의 대화 패턴 상
“이렇게 여자랑 멀리까지 와본 적 처음이다.”
“여자랑 이렇게 하루 종일 있어본 적 없다.”
“교외 데이트는 처음이라 뭘 입고 나오면 좋을지 몰라 이걸 입고 나왔다.”
등의 이야기를 할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얘기로 빙빙 돌릴 필요 없으니 그냥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고등학교 시절엔 어땠는지, 지방에 있는 집 근처 분위기는 어떤지, 근수씨의 학창시절은 어땠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돼. 그러면서 자연히 다른 가족들이나 친척 얘기로 넘어가거나 친구들 얘기로 넘어가도 되고.
함께 먹을 메뉴를 정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상대를 배려하지 마. 근수씨가 먹고 싶은 걸 상대에게 함께 먹자고 제안해. 앞으로 세 번까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이렇게 해. 알았지? ‘상대가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은 건 아예 생각하지 마. 그건 나중에 먹어도 되니까, 무조건 근수씨 먹고 싶은 메뉴로 결정해. 일단은 이렇게 해야 소극적이고 갈팡질팡하는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집에 돌아올 때에는 상대가 멀리 사는 것도 아니니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들어와서는 ‘상대에게 연락이 오냐, 안 오냐’를 고민하지 말고 먼저 전화해. 상대는 톡으로 얘기하는 것보다는 전화통화가 좋다고 말한 적 있으니, 통화를 해. 카톡 하다가 대화 끊긴다고 해서 톡 방 나가버리는 건 이제 그만 하고.
리드라는 게, 대단한 게 아니야. 그간 “넌 뭐 하고 싶어?”라고만 물었다면, 거기다가 하나만 더 추가해 리드할 수 있어. “난 ~하고 싶은데 넌 어때?”정도로, 또는 “~하러 가자.”정도로 이야기를 꺼내면 되는 거야. 밥 먹으러 들어갔을 때 “어디 앉을까?”라고 묻는 게 아니라, “창가 쪽에 앉을까?”정도로 물으면 되는 거라고. 막 뭘 보여주고, 사주고, 이벤트 같은 거 안 하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니까, 근수씨가 상대를 초대했다고 생각하며 진행해봐. 그럼 잘 될 거야.
끝으로 하나 더. 근수씨는 내게
“그런데 밥 먹기로 했을 때, 상대가 전에 함께 밥을 먹었던 A양과 B양을 부르는 건 어떠냐고 제게 물어봤거든요. 이건 왜 그런 건가요? 그리고 날짜 다 잡고 나니까, 갑자기 자긴 빠진다는 거예요. 다른 애들이랑 잘 놀다 오라면서요. 그래서 제가 잡긴 했어요. 꼭 나오라고. 그러니까 또 바로 나오겠다고 하긴 했는데, 이렇게 오락가락해서 좀 헷갈려요.”
라고 물었는데, 그건 전에 근수씨가 잘못 얘기한 것 때문에 그런 거야. 처음 상대와 밥 먹었을 때 근수씨는 어색할까봐 친구랑 같이 와도 된다고 했지? A양이랑 B양 데려와도 된다고. 그 모임에선 상대가 밥을 샀어. 그러고 나서 또 밥 먹자고 했을 때, 근수씨는 역시 A양과 B양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지? 근수씨는 그걸 ‘단 둘이 있을 때 어색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한 말이지만, 상대 입장에서 보자면 A양이나 B양 중 근수씨가 호감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잖아.
때문에 난 그녀가 “저는 이번에 빠질게요. ”라는 이야기를 던져 근수씨 반응을 보려 한 거라 생각해. 그런데 다행히 근수씨가 꼭 나오라고 말했고, 상대는 그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바로 나가겠다고 대답했잖아. 이런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앞으로는 어색하든 어렵든 되도록 단 둘이 만나봐.
나도 여린마음동호회 회장이라, 처음으로 이성과 단둘이 밥을 먹을 때 입만 한 열 번은 닦은 것 같아. 숟가락에 붙은 밥풀에까지도 신경을 썼고 말이야. 처음엔 그랬지만 지금은 짬뽕국물 튀겨가면서도 신경 안 쓰고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근수씨도 곧 그렇게 될 거란 얘기를 해줄게. 나중 되면 막 손으로 집어 먹는 것도 자연스러워져. 상대에게 내 음식을 덜어주거나 서로 쌈 싸주는 건 일도 아닌 게 되고 말이야. 그러니까 긴장과 고민은 내려놓고, 만나서 맛있는 것부터 먹으며 놀자고.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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