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에도 파주에 있는 주유소 여러 개를 소유하고 있다든지, 일산에 아파트 단지 몇 개를 지어도 될 정도의 땅을 가지고 있다든지, 이름 대면 누구나 알 기업의 부사장 자녀라든지 하는 ‘부자지인’들이 있다. 가깝게 어울리는 건 아니고 서로의 경조사가 있거나 무슨 모임이 있으면 한 번씩 보는 사이인데, 부자지인 중 하나인 A군이 했던 이야기가 아직도 내 기억에는 또렷하게 남아 있다.
“여친한테 용돈으로 100만원을 줬어. 이제 그걸 어떻게 쓰는 지 봐야지. 얘가 계획성 있게 쓰면 비전이 있는 거고, 흥청망청 쓰면 미래가 뻔한 거겠지. 그걸 보고 판단할 생각이야.”
내가 생각했을 때 그건 기만인데, A군은 자신이 그런 함정을 파놓곤 필터링을 한다는 것에 뿌듯해 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그 테스트로 옥석을 가려낼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말이다.
당시 A군의 여친은 그 돈을 못 쓰겠다며 한 번 사양했지만, A군이 ‘선물’로 생각하라는 말에 가방을 샀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헤어졌다. 그 후에 만난 여자는 사양도 않고 그 돈 다 쓴 뒤 또 용돈을 타려고 하다가 차였고, 이후 몇 번의 여자를 더 거친 후 A군은 몇 해 전 결혼했다. 그땐 내가 한창 밤하늘 올려다보며 별자리 공부하던 때라 A군과 만나지 못해, 아내가 된 그 여자 분이 어떤 테스트를 통과한 건지는 전해 듣지 못했다.
1. 부자들도 자신이 뭘 얼마나 베푸는지 안다.
상대가 자신이 찰 2,400만 원짜리 시계를 사는 건 사는 거고, H양에게 120만 원짜리 노트북을 사주는 건 사주는 거다. 2,400만 원짜리 시계를 사는 사람에게 120만 원짜리 노트북을 사주는 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상대에게도 120만 원은 120만 원이다.
그냥 여느 연애와 다를 바 없는데 남친이 돈만 더 많을 뿐인 게 아니다. 상대는 자신이 보통 남자들이 베풀 수 없는 호의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자신은 자기 편의대로 행동해도 이해받아야 한다고 여길 수 있고, 이런 자기와 만나는 걸 여친은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언젠가 다른 매뉴얼에도 소개했지만, 부자 남친이 가방을 사주며
“네가 나 안 만났으면 언제 이런 거 들어보겠냐.”
라고 말한 사례도 있지 않은가. 그 따위로 행동해도 여친은 속으로만 기분 나빠할 뿐 차마 이별까지 각오한 채 항의하지 못하니, 상대의 무시와 멸시, 그리고 심술을 온 몸으로 경험하며 만나게 되곤 한다.
전에 H양의 사연으로 매뉴얼을 발행했을 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적했던 것이 바로 저 지점이다. 상대의 오만함과 거만함이 사연 전체에서 보이는데, H양은 ‘돈이 주는 편안함에 물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며 그걸 다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쁘게 말하자면 기십만 원짜리 밥 얻어먹곤 상대가 까라면 까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던 건데, 난 헤어짐을 권했지만 H양은 반년이나 더 그 자리를 지키며 상대를 만났다.
만나기로 약속했다가도 상대가 아무 핑계나 대며 약속을 취소해도 H양은 소심하게 불만을 표현했을 뿐이고, 상대는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그걸 말로도 듣지 않은 채 계속해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하루 종일 자기 물건 사러 쇼핑하면서 H양을 달고 돌아다닐 뿐이었고, 자기 가고 싶은 곳에 H양을 데려가 배경으로 세워뒀을 뿐이다. 그러다 H양이 항의하면 자신이 지금까지 해준 게 얼만데 감사한줄 모른다며 알아서 집에 가라고 했을 뿐이고 말이다.
존중과 배려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상대에게서 떨어지는 콩고물에 눈이 멀어 있으면, 결국 사람대접도 못 받으며 질질 끌려 다닐 연애를 할 수밖에 없다. 내 지인 중 몇이 부자지인들에게 들러붙어 자신의 벨까지도 빼 놓고는 비위를 맞추는 것처럼 말이다. H양의 경우 노트북 하나를 제외하면 뭐 딱히 받은 것도 없으면서 상대에게 배은망덕한 무개념녀 취급을 받으며 그동안 버텨온 것 같아 내 마음이 좀 쓰리다.
2. 부자 특유의 심술에 대한 이야기.
물론 전부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내 주변의 부자지인들을 살펴보면
- 호의를 베풀며 마음을 얻곤, 상대가 호의를 기대하면 싹 거둬버리기.
라는 심술을 부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쉽게 말해,
- 넌 그저 내가 베풀면 감사하게 받아야 하는 거지, 네가 뭔갈 요구해선 안 된다.
라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부자 남친이고 H양이 내 여자친구라고 해보자. 난 내가 회원권을 가지고 있는 콘도에 H양을 데려가 실컷 놀게 해준다. 뭐 싸갈 필요 없이 근처 비싼 식당에서 상다리 부러지도록 음식을 주문해 먹이기도 하고, 근처에 있는 액티비티 중 H양이 좋아할 만한 걸 잔뜩 예약해 즐기도록 해준다. H양은 나중에 자기 친구 커플들과 이곳에 함께 놀러오자는 얘기를 하고, 난 알았다고 답한다.
그래서 H양은 친구들에게 전부 이야기 한 뒤 약속까지 다 잡고 나 역시 그때 가자고 대답은 했는데,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난 출발을 며칠 안 남겨 놓곤 못가겠다며 그 친구들과 알아서 다녀오라고 대답을 한다. 아니면, 같이 가긴 가되 내 콘도는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내가 제공할 콘도만 빠져도 자기들끼린 뭘 어쩔 수 없어 곤란해 하는 상황을 보고 싶기도 하고, 내가 호의를 안 베풀고 의무만 다하겠다는데 나더러 뭐라 할 수 없는 상황도 만들어 보고 싶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골탕 먹이는 거라 생각하면 되겠다. H양의 사연에서도
- 남친이 별장 데려갔다가 ‘태워 오고 놀게까지 해주지 않았냐’며 알아서 가라고 말함.
- 늘 자신이 내다가, 어느 날은 비싼 술집에 가서 실컷 먹은 뒤 더치페이 하자고 말함.
- 네가 날 만나러 와도 난 데려다 주느라 왕복, 내가 가도 왕복운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함.
등의 부분에서 그의 심술이 드러난다. 과한 호의를 베풀긴 하지만, 받는 쪽이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면 단번에 싹 거둬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건 연인뿐만 아니라 부부사이에도 발생하는 문제로, 고소득자인 남편이 전업주부인 부인에게 결혼 초기엔 월 천만 원의 생활비를 주다가, 이후 정신 못 차린다며 최저 생계비만 주며 그것마저도 세무조사 하듯 철저히 감시하는 사례도 있다. 내 주변에도 이런 부부가 있는데, 부인은 머리를 미용실 가서 감을 정도로 사치하며 살다가, 지금은 남편으로부터 이혼위협을 당하며 정신과 치료를 받는 중이다.
이 부분에 대한 ‘대처법’이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긴 한데, 여하튼 이런 상황까지 오는 걸 방지하거나 이런 상황에 놓였을 때 상대의 심술에 그대로 노출되지 않는 방법은, 상대에게 완전히 의지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연을 하나 예로 들자면 H양처럼 부자남친을 만나 거의 모든 돈을 상대가 다 쓰는 데이트를 하던 여성대원이 있었는데, 그 대원은 거기에 완전히 젖은 나머지 나중엔 상대를 만날 때 지갑도 들고 나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당장 지폐가 없다며 주차비 내게 몇 천 원만 달라고 했는데, 여자는 지갑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얼마 후 데이트에서는 일부러인지 남자가 “오늘은 자기가 좀 계산해줘.”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도 그녀는 지갑을 안 들고 나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결국 차이고 말았는데, 풍족하게 즐기던 시절이 그리워 그를 잡으려 했지만 그는 그녀를 기생충처럼 취급했을 뿐이다.
상대 돈으로 노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으면 곤란하며, 내 돈 아까운 거 아는 것처럼 상대 돈 아까운 것도 알아야 한다. 상대가 돈 많고 돈 잘 쓰니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권리처럼 여기며, 상대 돈으로 놀러 간 곳에서 자기 몫의 돌아올 차비만 부담해도 파산의 위험이 있는 상태로 지내면, 상대의 심술 한 번에도 곧바로 초라하고 우스워질 수 있다. 혹시나 상대가 이쪽 돈으로 부담하라고 할까봐 눈치 보며 쩔쩔 매는 건 필연적인 일이 되는 거고 말이다.
3. 이 연애를 통해 H양이 배워야 할 것들은?
H양은 상대에게 거의 모든 것을 다 맞춘 걸 자신의 ‘이해와 희생과 배려’라고 하는데, 상대가 그러는 건 다 받아줘야 하지만 이쪽이 그랬다간 당장 헤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면, H양이 하는 건 ‘이해와 희생과 배려’라고 할 수 없다.
‘이해와 희생과 배려’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상대가 하는 행동을 H양이 했을 때에도 큰 문제가 없어야 한다. H양의 연애는 어땠는가? 상대는 자기 마음대로 데이트약속 취소해도 H양이 이해해야 했지만, 반대로 상대가 어디 가자는데 H양이 안 간다고 하면 곧바로 험악한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H양은 그게 상대가 부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H양이 남친에게 잔소리를 전혀 하지 않으며 전부 이해해주는 타입이라 그렇다고 하던데, 난 거기에 대해선 더 깊이 들어가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이유가 뭐든 그 태도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건 그냥 수동적이며 순종적인 거지, ‘이해와 희생과 배려’라고 하긴 분명 어려운 태도이니 말이다.
그리고 상대가 돈을 쓰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 ‘감사한 마음’만 가지는 것은 필요 없다. 데리러 오고 데려다 줄 때마다 빼먹지 않고 고맙다고 말하고 뽀뽀를 해주었다든지, 상대가 베푸는 호의에 H양은 그만큼 보답할 수 없는 걸 미안해했다든지 하는 건 다 필요 없으니 넣어두자. 그걸 표현하려면 무엇보다 상대가 그저 기분 내며 돈을 쓰려고 할 때 막을 줄 알아야 하고, 뭔갈 해주겠다고 할 때 거절할 줄 알아야 하며, ‘돈 많은 네 돈’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우리 돈’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고 택시를 타야 하는데, 택시비가 비쌉니다. 왕복 12만원인데, 부자인 남친이 운전하는 게 귀찮다면 타고 가라고 택시비 한 번 대줄 법도 한데, 택시비 한 번 안 대줬습니다. 제가 그런 걸 바란 것도 아니었고, 주변에서 지인들이 너무 한다고 말해도 저는 남친 편을 들어 변호해줬습니다.”
그 ‘택시비 한 번 대줄 법도 한데’라는 생각 대신, H양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만남을 조율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을 했으면 한다. H양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겠지만, 상대 입장에서 보자면 본인도 계속 그렇게 오가는 것이며 만나면 98% 이상 자신이 데이트비용을 다 부담하지 않는가. 이쪽에서 단순히 ‘돈도 많은데 택시비도 안 주네’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앞서 말했듯 부자인 상대에게도 돈은 돈인 까닭에 데이트비용에 차비까지 대주며 만나는 건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H양의 말을 보자.
“최근에도 남친은 뭐 제 돈 아니라 상관없지만 2400만원짜리 시계, 100만원짜리 팔찌 등을 구입하러 다닐 때 저를 데려갔고 맛있는 저녁을(여전히ㅎㅎ) 사주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불만은 전혀 없어요. 제 돈 아니니까요.”
이 정도면, 연인이라고 할 수 없는 거다. H양에게 상대란 사랑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후원자에 더 가까우며, 상대가 어떤 허튼 짓을 하든 당장 H양에게 맛있는 저녁만 사준다면, H양은 웃어줄 뿐인 것에 불과하다. 저 짧은 문장에 두 번이나 등장하는 ‘제 돈 아니니까요’라는 말이, 이번 이별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정리하자. H양은 남친과 헤어진 후 자신도 오히려 홀가분해지고 마음도 편해졌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며, 동시에
“하지만 헤어지게 된 마지막 사건을 돌이켜보면, 남친이 제가 남자친구의 호의를 당연시 한다는 말에 대한 죄책감? 괴로움? 같은 것이 들어 괴롭습니다. 제가 정말 그랬나요? 남친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제가 이상한 거라고 했다던데,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입니다. 제가 관계유지에 노력을 쏟아 부었던 만큼 서운함이 남는 것도 어쩔 수가 없고요. 제가 이 만남을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라는 이야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노력’이라는 지점의 초점이 잘못 되어 있었던 거다. 남친이 차로 데려다 주는 것에 대해 H양은 고맙다고 말하고 뽀뽀도 해주고 항상 웃었다고 했는데, 남친이 바랐던 것은 그런 ‘호의를 받고 난 뒤의 보상’이 아니라 ‘호의를 거절할 줄 아는 모습’이었던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피곤할 테니 오늘은 내가 알아서 갈게. 오빠 얼른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집에 가서 연락할게.”
하는 말 한 마디를 바랐던 건데, H양은 단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한 적 없이 일단 호의를 받고 나서 웃는 얼굴로 뽀뽀해주는 것으로 보상을 다 한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제 돈 아니니까요’라는 이야기나 ‘택시비 한 번은 대줄 법 한데’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의 마음이 H양 속에 자리 잡고 있으니, 상대의 사정을 먼저 살피는 저런 ‘진짜 배려’가 나올 리는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상대가 오늘 나가기 귀찮으니 내일 보자고 말하는 걸 맹목적으로 이해해주는 게 배려가 아니라, 저런 게 진짜 배려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다음번에 연애를 할 땐, 상대와 ‘우리’가 되는 것에 더욱 힘쓰길 권하고 싶다. ‘우리’가 될 수 있다면, ‘받는 것과 주는 것’을 머리로 계산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며, 내 배고픔보다 상대 배고픔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나를 위해 쉽게 쓰지 못 하는 돈도 상대를 위해서는 쓸 수 있게 된다. 상대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어느 팝송 가사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가장 달콤한 빚을 말이다. I ow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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