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한 여친이 기다리게 했다고 남친이 그냥 갔다면, 남친 잘못인 게 맞다. 이것으로 사연의 주인공인 A양의 큰 의문은 풀렸을 테니 이쯤에서 마무리해도 좋을 것 같긴 한데, 뜬금없지만 A양은 혹시 ‘빨래 건조대로 도둑 때린 사건’을 아는가?
그 사건은 2014년 3월에 일어났는데, 자신의 집에서 50대의 도둑을 발견한 20대의 청년이 주먹과 발, 빨래건조대 등으로 도둑을 때려 뇌사에 빠뜨린 사건이다. 당시엔 청년의 행동이 정당방위인지 아닌지가 사람들에게 큰 관심사로 떠올랐었다. 청년이 1심에서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 받은 까닭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판결에 조소를 보내기도 했고, 도둑이 들어오면 집주인이 달아나야 하는 거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올해 5월, 그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예전 판결과 다름없이 ‘정당방위 아니다’라는 판결이었는데, 전과는 달리 꽤 많은 사람들이 그 판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된 일일까?
1. ‘빨래 건조대 도둑 폭행사건’ 판결에 대한 이야기.
처음 이 사건이 알려졌을 때,
- 집에 들어온 도둑을 발견하곤, 주먹과 발, 빨래 건조대 등으로 때려 뇌사상태에 빠지게 했다. 법원은 도둑이 더는 훔칠 의사가 없이 도망가려 했는데도 계속해서 때린 청년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라고 알려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게 정당방위가 아니면 뭐냐. 그럼 도둑이 흉기를 들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맨손으로만 싸우라는 거냐. 그럴 거면 도둑 들었을 때 집주인이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냐.”
라는 이야기를 하며 비웃거나 황당해했었는데,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난 뒤에 언론에서 다시 저 사건을 다시 소개한 걸 들여다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 집에 들어온 도둑을 발견하곤, 주먹으로 도둑을 때려눕혔다. 넘어진 도둑이 도망가려하자, 청년은 도둑의 뒤통수를 발로 수차례 찼다. 그러곤 빨래건조대를 집어 들어 도둑의 등을 수차례 때렸다. 이후 청년은 허리에 차고 있던 벨트를 풀어 도둑의 등 부분을 수차례 때렸다. 그런 폭행은 20~30분간(경찰조사에서는 20~30분이라고 진술, 법정에서는 4분이라고 진술)이루어졌고, 도둑은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사건에 대해 한 변호사가 자신의 생각을 밝힌 걸 들어보면, 그는 사람의 머리가 쉽게 깨지지 않는데, 깨질 정도로 때린 거라면 정말 상당시간 엄청난 폭행이 이어졌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감싸고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을 때리고 발로 차고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때리고 벨트까지 풀어서 때린 것이 방어를 넘어 분노를 쏟아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판결문에는 ‘방어의사를 초월해 공격의 의사가 압도적이었다’고 나와 있는데, 그 판결문에도 동의한다고 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다. 도둑이 도둑질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며 이 모든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의견부터, 도둑의 ‘의사’는 어떻게 판단하며 그럼 도둑이 가족 중 누군가를 해치기라도 하면 그때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해칠 의사가 확실히 있었네’라고 판단한 후 방어를 시작해야 하는 거냐는 의견 등이 있었다. 도둑이 도망가려하면 그 이후로는 도둑질할 의사가 없는 거니 조심히 가시라고 인사만 해야 하냐는 의견도 있었고 말이다.
이걸 두고 저 사건에 대해 가타부타 하려는 건 아니고, ‘술 취한 여친이 기다리게 했다고 그냥 간 남친, 누구 잘못?’이라는 단순한 질문을 좀 더 들어가서 살펴보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말하고자 든 예다.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자.
2. A양과 남친이 겪은 갈등의 원인과 과정은 어땠는가?
A양은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많이 취했고, 알바 끝난 남친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남친은 흔쾌히 응했고, A양을 데리러 간다고 했다. 여기까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왜 싸우게 된 걸까?
남친이 어디로 데리러 가야 하는지 장소와 시간을 알려달라고 A양에게 계속 연락했지만, A양은 폰을 보지 않았다. 취해서 정신이 없는 상태였기에 폰을 못 본 거라고 하던데, 어쨌든 30분 넘도록 남친이 연락해도 연락이 안 닿은 건, ‘A양이 폰을 안 봐서’라는 것 때문이다.
그럼 다시 연락이 닿았을 때 폰을 못 본 것에 대해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는 게 상식적으로 옳은 행동인데, A양은 어땠는가? 남친이
“전화해도 받지도 않고 톡 보내도 다 안 보고, 그게 데리러 와달라는 사람의 태도야?”
라고 하자, 그것에 빈정이 상한 A양은
“아니, 왜 성질을 왜?”
라고 했을 뿐이다. 그러자 남친은 또 남친대로 답답해선
“데리러 와달라면 당연히 가지. 근데 내가 언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는 말을 해줘야지. 연락도 안 되는 상황에서, 난 그 덥고 힘든 상태로 밖에서 계속 기다렸어. 그런데 성질이냐니.”
라는 이야기를 했고, 이후 “알아서 갈게.”, “다 자기 마음대로야.”, “내가 뭘 어쨌는데?”, “그래 알아서 가.”라는 이야기가 오가다, A양은 욕을 하고 말았다.
A양은 이별의 원인이 된 저 사건에 대해
-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술 취한 여친을 두고 그냥 갈 수 있나.
- 아끼고 배려해주는 게 사랑인 건데, 남친에게 그런 모습이 안 보였다.
- 저 일로 속상해서 울었는데, 남친은 내가 우는 것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 내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하지 않는 남친에게 실망했다.
라고 내게 말했는데, 무슨 마음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 건지 나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남친에게 숫자욕 동물욕까지 한 상황이라면 애정이 식는 것을 넘어 오만 정이 다 떨어질 수 있는 거다. 남친 입장에서 봤을 때 자신은 A양 연락 받곤 알바 끝난 뒤 밖에 나가 계속 연락시도하다 연락이 닿지 않아 집에 간 피해자인데, 그 와중에 A양으로부터 ‘X발’, ‘X새끼’라는 말까지 들으니 그냥 어이가 없을 수 있다.
“말 함부로 한 것, 욕한 것에 대해서는 저도 정말 반성하고 있어요.”
A양이 한 행동은, 반성한다고 수습될 수 있을 정도의 레벨이 아니다. 욕과 더불어 “넌 누굴 만나도 맨날 이러다가 헤어지고 말 거다”, “평생 그렇게 살아라.”, “넌 최악이다. 너랑 만난 걸 후회한다.”라는 이야기까지 했는데, 둘의 사이는 그 시점에 박살난 거다.
남친도 사람이고, 휴먼이고, 닝겐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응?) 남친이 친구들이랑 술 마시면 A양은 못마땅해 했을 것이고, 그 와중에 A양보고 데리러 좀 와달라고 했다면 A양은
‘나랑 안 놀고 친구들이랑 술 마시는 것도 짜증나는데, 어디 감히 지금 나한테….’
라는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이런 부분이 좀 동등해지고 나서야 아껴주고 배려하는 연애가 가능한 거지, 상대의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고, 확인하려고만 하고, 부족하다고 탓하기만 하려다가는 상대의 로그아웃을 경험하게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3. 서운한 점을 말하다 욱 해선 폭발하게 되는 패턴.
무엇이 불만인 건지 정확히 모르겠으며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을 땐, 충분히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상대에게 말하는 게 좋다. 예컨대 내가 A양의 남친이고 A양과 만나던 중 소외감을 느꼈다면, 난
“친구에게 전화가 오면 너는 옆에 내가 있다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계속 통화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소외되는 기분을 느껴.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갔을 때도, 너는 다 아는 친구들이라 즐겁겠지만, 나는 그냥 멍하니 앉아서 이야기만 듣고 있는 느낌이야. 같이 있을 때, 이런 부분들에 대해 나를 좀 배려해줬으면 좋겠어.”
라는 이야기를 할 거다.
그런데 내가 저렇게 정리해서 말하진 않고, A양이 남친에게 했듯
무한 – 서운한 마음이 드는데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한 –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너도 어렴풋이 알 것 같지 않아?
A양 – 글쎄. 왜인 것 같은데?
무한 – 그냥 좀 나한테 소홀한 것 같고. 신경 안 쓰는 것 같아.
A양 – 아니, 우리 오늘도 잘 만나고 들어왔잖아.
무한 – 모르겠어. 그냥 날 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그래.
A양 – 너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보는데.
무한 – 뭐가?
A양 – 네가 생각하는 거.
무한 – 알겠어. 아무튼 좀 소중하게 생각해줘.
A양 – 응응 당연하지.
(잠시 후)
무한 – 잠이 안 오네. 마음이 힘들어. 눈물도 나고, 힘들다. 날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A양 – 어떻게 도와줘야해? ㅠㅠ
무한 – 아니야 그냥 자려고
A양 – 알았어. 자보도록 해요.
무한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A양 – 왜?
무한 – 너는 원래 내가 속상하고 마음 아픈 거엔 관심이 없었지.
A양 – 아니야. 하, 왜그래?
무한 – 왜 그러냐고? 아니다. 그만할게.
A양 – 그만하라는 건 아니고, 여튼...
무한 – 내가 그만 한다고 하니 넌 속 편해하는 것 같다?
무한 – 내가 진짜 허구한 날 이러는 것도 아니고 참다 참다 얘기하는 건데
무한 – 넌 내 얘기 듣고 싶어 하지도 않고 피하고만 싶어 해.
라는 식의 대화만 한다면, A양도 고구마 세 개 먹고 물 안 마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저러다 폭발해선 결국
“너는 너밖에 몰라. 네 마음 밖에. 남의 마음이 어떤지는 모르지.”
라는 이야기를 하면, A양도 이 전쟁 같기만 한 연애를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물론 남친이 A양의 서운함을 좀 더 잘 받아줄 수도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이 매뉴얼은 A양을 대상으로 작성되는 까닭에
- 상대가 당장 대답하거나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닌, 막연한 이야기만 하면 상대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수 있다. 그러니 콕 집어서, 무엇이 어떻게 서운하며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으면 한다.
라는 이야기를 적어두도록 하겠다. 더불어 말 꺼내 놓고는, “아니다.”, “됐다.”라는 식으로 혼자 등 돌리는 건 둘 모두의 감정만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도 꼭 기억해 두길 바란다.
언젠가 매뉴얼을 통해
“썸 탈 때 상대가 구애하던 열정, 연애 초반의 호의와 헌신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런 걸 바라고 사귀는 건데, 그러면 사귄 이후 그게 다 없어지는 거라고 생각해야 하나요?”
라는 댓글이 달린 적 있었다. 오늘 사연의 A양도 남친이 연애 초반처럼 열정적으로 헌신하던 게 줄어드니 점점 서운함을 느꼈던 건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바라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밝히고 싶다.
남친이 술자리 가면 인증샷 찍어 보내주며 안심시키고, 맛있는 거 먹게 되면 포장 해다가 맛 보여주고, 이것저것 좋은 게 있으면 선물해주고 했다면, 이쪽도 박자를 맞춰서 상대에게 베풀어야 한다. 상대는 계속 그렇게 호의와 헌신을 보이는데 이쪽은 그걸 받기만 한 채 술은 다른 사람과 마시고 SNS에서 지인들 챙기고만 있으면, 그 누구라도 ‘내가 이런 애한테, 지금 뭐하러 이러고 있는 거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상대는 이쪽이 걱정할까봐 술자리에서 인증샷 찍어 보내는데, 이쪽은 그저 술 취해선 데리러 오라고 해놓곤 연락두절 되었다가, 왜 성질 내냐며 욕이나 해선 안 되는 거다. 이걸 두고
“전화 안 받아서 자기 기다리게 했다고 집에 쌩 가놓곤, 온갖 화를 내는 남친한테 너무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알바 끝나서 피곤했고 또 날이 덥기도 했지만, 평소에 남친은 알바 끝나고 친구들이랑 PC방에 가서 몇 시간씩 놀기도 하거든요. 그런 체력이 있으면서 제가 조금 기다리게 했다고 가버리다니….”
라는 이야만 하고 있으면 답이 없다.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상대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라는 이야기를 할 뿐이라면, 상대는 결국 지치게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이제 두 밤만 자면 명절이자 연휴다. 다들 조금만 더 힘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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