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양은 우선, K양의 회사 이름을 비밀댓글로 좀 남겨주길 바란다. 회사 이름을 알려주면, 내가 K양의 회사에 전화해서 일 안 하고 하루 종일 서로 연락하는 직원이 둘 있다고 제보를 할 생각이다. K양과 그 남자직원. 내게 보낸 카톡대화 이외에, 두 사람은 회사에선 다른 메신저로도 대화를 나눈다고 했는데, 그러면 뭐 둘은 거의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는 거라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이쯤 되면 더 볼 것 없이 일단 사귄 뒤 상견례 하고 결혼날짜까지 잡아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이 사연은 K양이 상실감과 배신감을 느끼며 무너지는 것으로 막이 내리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아래에서 함께 살펴보자.
1. 너무 상대만을 위하면 생기는 문제.
K양은 타인의 기분을 잘 캐치하는 재능이 있으며, 그렇게 캐치한 상대의 기분을 염두에 둔 채 분위기를 맞춰주려 노력한다. 리액션 역시 훌륭해서, 아마 내가 K양과 대화를 나눈다면 나 역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게 될 것 같다. K양은 내가 누군가에 대한 불평을 해도 내 편을 들어 이야기를 해줄 것이고, 내가 우쭐해 하는 모습을 보여도 멋있다고 해줄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 재능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너무 과하게 사용하기에 문제가 되는 건데, K양은 계속해서 상대를 인터뷰 하듯 대하기만 하며 K양 스스로에 대해서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고 만다. 상대가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K양은 그에게
“지금 완전 신나겠네? ㅋㅋㅋㅋㅋㅋㅋㅋ”
“준비는 잘 했어요?”
“공항이에요? ㅎㅎㅎㅎㅎㅎ”
“장시간 뱅기타기 힘들었죠? 와이파이 잘 터지나 봐요?”
“너무 좋아서 거기 불법체류 하고 싶은 거 아님? ㅋㅋ”
“잘 도착했네? 풋 ㅋㅋㅋㅋㅋ”
등의 이야기를 했는데, 저게 서로 핑퐁핑퐁 주고받는 거라면 곧 핑크빛 러브러브가 시작될 것을 암시하는 거라 할 수 있지만, 그냥 8할 이상 일방적인 K양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긍정적으로 보기가 어렵다.
게다가 어떤 대화의 K양의 말들에선 ‘상대를 주제로 한 질문’을 제외하고 나면
“난 놀 사람 없어.”
“내 말에 대한 반응, 귀찮아서 대충 저렇게 한 거지?”
“카톡 답하지 말고 신나게 놀아라.”
“앞으론 심심해도 카톡 안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삼.”
등의 말들이 남는 까닭에, 상대는 K양과 이야기를 나눌 때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대화를 부탁 받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상대는 자연히 K양과의 대화를 귀찮아하게 될 수 있는 것이고 말이다. K양의 재능은 상대에게 관심과 호감을 전달하는 것에 분명 빛을 발하지만, 그러느라 ‘K양’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 또는 상대의 대답을 듣고자 질문만 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리면, 그냥 상대에게 인터뷰 하려는 팬클럽 회장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2. 그러다보니, 가끔씩 폭발.
위와 같은 방식으로 상대를 대하다보니, K양은 자신만 상대를 궁금해 하는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상대가 어느 땐 신이 난 채 얘기하다가 또 어느 땐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가끔 폭발하곤 한다.
폭발할 때 K양을 보면 정말 다신 상대를 안 볼 사람처럼 관계를 팽개쳐 버리거나 비꼬아서 말해버리는데, 그 모습이 상대에게 다정하게 말할 때와는 완전히 다르며 극단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씨’라는 호칭부터 ‘니가’라고 바뀌고 말이다.
“그래서 니가 위선자라는 거다.”
“니가 그리 말하잖아.”
“그래 놀라고. 놀아라.”
K양은 당연히 이게 그 순간의 감정에 집중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이걸 한 발짝 떨어져 종합적으로 보면, 평소엔
“심남씨~ 우쭈쭈주~”
하다가, 기분 상하는 날엔
“확 마, 니 장난하나?”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미 상대도 K양이 이렇게 폭발한다는 걸 잘 알기에, 그런 기미가 보이면 일단 맹목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해서 얼른 진화하려 하거나, K양이 폭발하는 순간엔 대화를 멈춘 채 그 자리에서 피해버린다. 그랬다가도 다시 K양이
“삐쳤나?”
하며 말 걸어오거나 자신이 먼저 화 낸 것에 대한 설명을 하러 말을 건다는 것 역시 알기에, 그러면 그냥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답해주며 예전처럼 수다친구가 된다.
K양은 이걸 ‘티격태격하다가도 앙금이 남지 않고 다시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고 내게 설명했는데, 그게 K양이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를 수 있다. 열 받아서 확 달아올랐다가 식은 사람은 K양 한 사람이다. 때문에 난 이걸, 둘이 티격태격했다기보다는, K양이 폭발하면 상대가 잠시 몸을 피하고, 그 뒤에 K양 마음이 좀 잔잔해지면 그때 기분 풀고는 다시 상대에게 다가갔던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3. 그래서 호감인가요, 어장인가요?
상대가 이전에 연애할 땐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해서, 그리고 이별 후에는 소개팅으로 만난 여자나 같은 모임에서 호감을 느낀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 K양이 그 얘기를 다 들어주며 리액션까지 하는 걸로 봐서는, ‘친한 직장동료라서’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전에도 이야기 한 적 있지만 ‘아는 여자와 친하게 지내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 타입’의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긴 한데, 내가 솔로부대원이며 현재 또래의 이성 직장동료와 가깝게 지낸다면, 우린 오늘 저녁 꼼장어를 먹으러 갈 것이다. 이게 이성으로서의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친구에 가까운 동료로 지내는 사이라 그런 거다.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이렇게 지내는 걸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러는 거다. 서로에 대해 웬만한 친구보다 잘 알며 일주일에 다섯 날을 공유하다 보면, 저절로
“무한씨 쉬는 날이라 회사에 없으니까 우울하다. 나 재밌는 얘기 좀 해줘.”
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럼 난
“그거 앎? 우리 엄마가 오늘 아침에 오색딱따구리 주워옴.”
이라는 얘기로 지루한 상대의 일상에 오색딱따구리 하나 넣어드리는 거고 말이다.
K양과 상대의 관계도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K양은 자신과 친한 이성친구들보다도 상대와 더 친밀한 사이가 되니, 혹시 이게 호감이고 관심이며 사랑인 건가 하며 마음을 쏟게 된 것 같다.
“그러면, 회사에 다른 여직원도 있는데 왜 하필 저인 거죠? 그리고 여행 다녀올 때 다른 직원들 것과 달리 제 것은 좀 특별했는데, 이런 건 의미 없는 건가요?”
그게, 저렇게 지내는 건 ‘잘 받아주는 사람’에게 통하는 까닭에, 도도하게 굴거나 같이 드립을 교환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면 가까워지기가 어렵다. 밀란 쿤데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메뚜기 먹어 봤냐고 물어보면 질색하는 반응만 돌아올 수 있으니 말이다. K양의 경우 내가 메뚜기 먹어봤냐고 물으면, “메뚜기 받고, 방아깨비 더.”라며 잘 받아줄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보통의 직원들 것과 달리 K양에게만 특별한 선물을 사다준 건, K양과 그가 다른 직원들과의 관계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K양과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으며 우리가 친하게 지냈다면, 난 필리핀에 다녀올 때 다른 사람들 선물로는 건망고를 사왔겠지만, K양 선물로는 면세점에서 5만 원 이하의 상품을 사다 줬을 것 같다.
“왜 콕 집어서 ‘5만 원 이하’인 거죠? 무슨 의미가 있는 액수인가요?”
김영란법 때문에 그렇다.(응?)
K양은 내게
“이게 어장관리를 당하고 있는 거라면 제 나이도 나인지라 시간낭비하기 싫고 가능성이 보인다면 앞으로 어떻게 관계를 이어가야할지 고민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난 이 관계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길 권하고 싶다. 친한 건 좋지만, 일방적으로 상대의 이성문제, 개인사, 업무적 스트레스까지를 다 받아주고 있는 건 K양의 입장에서 엄청난 낭비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K양이 물어보든 안 물어보든 상대는 그런 것까지 다 미주알고주알 얘기하지만, K양이 외롭고 심심할 때 그는 자신의 생활을 즐기느라 바쁠 뿐이니, ‘친한 동료이자 친구’라는 걸 ‘연애로 이어질 가능성’으로 생각해 그걸 다 받아주고 있진 말았으면 한다.
상대는 밖에서 다른 이성에게 호감을 품기도 하고, 또 소개팅을 해 몇 번 데이트도 하고 있잖은가. 그렇게 자기 살 궁리는 밖에서 다 하고 그것도 모자라 충성까지 하고 있으면서, 여기 와선 밥만 먹겠다는 사람에겐 밥을 안 주는 게 맞는 거다. 일부러 관계를 끊거나 의식적으로 매정하게 대할 필요는 없지만, 그가 왔다고 해서 밥상 다 차린 뒤 젓가락질까지 대신 해 주지 말고, 그냥 둘 다 여건이 될 때 마주 앉아 밥 먹는 것 정도로만 그를 대했으면 한다.
오늘 준비한 얘기는 여기까지다. 자 그럼,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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