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라면의 유통기한이 적어도 한 2~3년은 되는 줄 알았다. 때문에 두어 박스 사 놓고 쟁여둔 채 느긋하게 먹어도 되는 줄 알았는데, 언젠가 세일하는 라면을 두 박스 샀더니 유통기한이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었다. 20개짜리 두 박스면 40개인데, 그걸 60일 안에 먹어야 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건 우리 같은 내배엽의 태양인들에게는 일도 아니라서 한 달 컷으로 두 박스를 비우긴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당시 라면의 유통기한이 얼마나 되나 검색을 하다 평균 겨우 6개월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 어머니께선
- 뜯지 않았으면 괜찮다.
- 냉장고에 있었으면 괜찮다. 만약 얼렸다면 유통기한은 무한대다.
- 유통기한은 숫자에 불과하며 유통에만 관련된 기한이다.
- 선재(엄친아) 엄마는 요플레 유통기한 한 달 지난 것도 먹는다.
- 그걸 왜 버려? 놔 둬 엄마가 먹게.
라고 하시지만, 여하튼 몇 년은 될 줄 알았던 라면의 유통기한이 고작 6개월이라는 것에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뜬금없이 라면의 유통기한 이야기를 한 건, 사연의 주인공인 G양에게
“라면도 유통기한이 6개월인데, 썸을 막 1년 반씩 타면 되겠습니까?”
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G양은 상대의 ‘확실한 의도’를 알아내려 혼자 너무 많은 고민을 했고, 상대는 자연스레 다가오는데 그것에도 부담을 느꼈으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에 ‘상대와 사귀어봤자 그 결과가 부정적일 가능성이 높은데….’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접었다 폈다 하기만을 반복했다.
천천히 친해지며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조심스레 관찰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다가오는 상대를 밀어내면서까지 그러는 건 상대에겐 ‘거절’의 의미로 느껴질 수 있다. 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몇 가지 살펴보자.
상대가 도와준다고 함 -> G양은 호감인지 동료애인지를 구별하려 듦
상대가 선물을 주려함 -> G양은 부담스러워서 거절함
상대가 낯선 장르의 음악을 소개함 -> G양 혼자 공연 찾아감
상대가 술에 취해 메시지 보냄 -> G양은 카톡방에서 나오며 철벽을 침
이래버리면, 방법이 없다. G양은 상대가 다른 사람과 소개팅을 한 뒤 그 사람과 썸을 타는 듯 보이는 지금도
“한 일이 년 뒤를 생각하며 지금은 상대와 그냥 친한 친분만 유지해야 할까요? 멀리 보고 장기전으로 생각하면서요?”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혹 상대가 6월에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주면 어쩔 생각인가? 이게 막 그렇게 당장은 침만 발라 놓고 2년 후에 뭘 어쩌겠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G양의 바람대로 2년쯤 묵히는 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때가 되어 아무 고민 없이 일사천리로 해결될 거란 보장이 되는 것도 아니잖은가.
G양의 입장에서는 느긋하게 천천히 상대만을 관찰하고 있으니 상대가 다른 사람과 썸을 타거나 G양에게 보였던 호의와 친절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면 ‘배신’처럼 느껴지겠지만, 상대 입장에서 보면 그러는 게 당연한 일일 수 있다. 상대가 다가와도 G양은 잘 받아주지 않으며 밀어내는데, 그러면 상대도 다른 사람을 찾아야지 G양만 바라보며 기약 없이 썸만 타고 있을 순 없는 것 아니겠는가.
사연 속 G양의 태도 전반에선
- 상대도 나와 같은 처지가 될 것. 나랑만 친하며, 나처럼 외롭고 심심할 때가 있고, 그러면서도 나만 바라보는 모습으로 진심임을 확실히 증명할 것.
을 원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는데, 그래선 안 된다. 상대가 내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계속해서 내게 구애만 하길 바랄 게 아니라, G양이 그 울타리를 거두고 상대의 삶 안으로 뛰어들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연애를 해도 둘이 서로의 세계 곳곳까지 탐험할 수 있는 거지, 지금과 같은 태도로는 연애를 시작해도 딱 그 관계에만 고립된 채 날 외롭지 않게 만들어 보라는 요구만 하게 될 수 있다.
G양은 상대를 관찰하고 상대의 의도를 알아내는 것에 열중하느라 상대에게 이렇다 할 긍정의 신호도 보여주지 않았고, 때로는
‘그래, 결혼까지 잘 될 확신이 없으면 회사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야지. 사내연애는 안 돼.’
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접기까지 했었다. 그 결과 이제는 상대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겼고, 그는 더 이상 외로워하지 않으며 이전처럼 풀 죽은 모습도 보이지 않고, 또 솔로끼리 뭉치자고 외치던 전과 달리 칼퇴해서 소개팅녀를 만나러 가버리게 되었다. G양은 퇴근시간 주차장에 상대의 차가 빠져나간 자리를 보며 지붕 쳐다보는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고 말이다.
“예전에는 같이 점심을 먹게 될 경우 제가 다 먹을 때까지 상대가 기다려줬는데, 며칠 전에는 제가 먼저 가서 좀 쉬라고 하니 기다려주지도 않고 그냥 가더라고요.”
그렇게 계속 ‘밀어내기’와 ‘마음과 반대로 말하기’를 사용해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려 하면, 점점 상대는 밀려나가고 말 뿐이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고백이라도 해보고 접을까요? 제 생각에 고백하면 까일 가능성이 85% 정도 되는 것 같은데요. 근데 자꾸 나머지 15%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어져요. 이미 틀렸으니 그냥 접는 게 나을까요? 보통 이런 사례일 때 결과가 어떤가요?”
비슷한 상황에서 대개는, 상대의 소개팅 진행상황을 물어가며 연애상담 모드로 진입했다가 알아서 마음을 접는 방향으로 흐르곤 한다. 또, G양은 고백 성공률을 15%로 봤지만 현실적으론 보통 1.5% 미만이며, 이미 상대에겐 이쪽이 ‘동료’로 굳혀져 있거나 상대가 소개팅녀 외에도 다른 이성에게 마음이 옮겨갔다가 최종적으로 소개팅녀에게 간 것인 경우도 있다.
난 G양의 경우도, G양이 ‘철없고 웃긴 오해’라고 말한 사건으로 상대에게 철벽을 치거나 가끔씩 ‘연애는 무슨 연애’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접었을 때, 상대 역시 그걸 한계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접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동시에 둘의 관계를 ‘직장에서 제일 친한 동료’ 정도로 설정하게 되었고, 이후의 친절은 동료로서 베푼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상대가 보인 호의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었던 것이었다면 지금은 G양이 먼저 말을 꺼내야 그가 ‘응답’의 형태로 그런 호의를 보일 뿐이던데, 이 정도면 그 결이 완전히 다르다고 봐야하는 게 아닌가 싶다.
G양이 어차피 내 조언은 ‘많은 연애 블로거들의 조언 중 하나’로만 여기겠다고 했으니 나도 편하게 말하자면, 난 이 썸의 유효기간이 이미 지났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상대가 어떻게 들이댔었는지를 다 접고 ‘지금 이 순간’을 기준으로 보면, 둘은 동료로서 교류할 뿐이며 상대는 현재 다른 이성과 썸을 타고 있는 중이니, G양의 고백은 뒷북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만약 제가 지금 고백했으면 상대가 절 선택했을 테지만, 고백을 안 해서 영영 놓치게 되는 거라면요?”
정말 상대를 놓칠 수 없을 정도로 G양의 마음에 애정과 호감이 있는 거라면, 누가 뭐라든 고백을 하면 된다. 다만 지금의 G양은 ‘되면 한다’의 마음이 강하며, 사내연애가 될 경우에 대한 불안도 있고, 상대와의 미래에 대한 뚜렷한 자신도 없으며, 상대에게 실망하거나 앞선 걱정으로 여러 번 마음을 접은 이력도 있으니, 진짜 상대가 보고 싶고, 대화하고 싶고, 만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지 G양의 마음도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돌아본 뒤 선택하길 바란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상대가 날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다른 여자와 잘 되는 것 같아서’ 조급증이 들어 고백하려는 거라면, 고백은 안 하는 게 낫다고 적어두도록 하겠다.
▼ 코너명은 <천오백자연애상담>인데 자꾸 길어져서 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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