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사람들의 사연이 오면, 참 읽을 맛이 나서 좋다. 특히 막
처럼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문장을 읽을 때면, 문어체가 불러오는 특유의 상상력이 자극되며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저 문장을 작성하는 게 팬티바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겠지만, 문장만 읽을 땐 좌절감을 느끼는 남자가 상처를 핥으며 억울한 눈빛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고 뭐 그렇다. 은정, 은정.
라며 끝까지 감성공격을 하고 있는 상대에게 휘둘리고 있는 은정. 그런 은정씨를 위해, 오늘은 감성돔 낚시를 준비하고 있는 내가 나서기로 했다. 잡어 퇴치를 위해서는 현재 사용 중인 채비를 바꿔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마음으로, 그렇게 작성해 볼까 한다. 출발해 보자.
1.왜 그런 남자만 만나게 되는가?
남자는 그냥, 남자다. 은정씨는 이런 선문답 같은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적었는데, 내가 이렇게만 얘기해도 은정씨는
이라며 염화미소 같은 걸 지을 것 같다.
내가 뭐 아직 말한 것도 없는데 혼자 다 이해하고 끄덕끄덕 해버리는, 바로 그 지점이 문제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이해는 일단 충분히 상대의 얘기를 들어보고 해야 하며, 상대에 대한 판단은 상대를 좀 겪어본 뒤 해야 한다. 상대에 대해 알게 된 것이라고는 아직 10%도 안 되는데, 거기다 이쪽이 혼자 마련한 90%의 의미부여와 상상과 짐작과 예측을 갖다 붙여선 그걸 상대라고 믿으면 곤란하다.
이번 상대와 모임에서 만났을 때, 처음 상대를 보고 은정씨가 한 말을 보자.
상대의 첫인상이나 이미지 같은 걸 갖는 건 이상한 게 아니지만, 그 시작에 ‘특별함’이 좀 많이 부여되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그 이후의 모임을 가진 후 은정씨가 한 말도 보자.
모임에서 상대를 두세 번 정도 봤을 뿐인데, 이미 판타지가 투텁게 입혀졌다는 걸 볼 수 있다.
난 꼬꼬마시절 수련회에 갔다가 로비에 내려가 몰래 혼자 음료수 뽑아먹으려고 했는데, 수련회장에 있는 자판기가 늘 그렇듯 바가지요금을 달고 있는 까닭에 500원이 부족해 못 뽑아먹은 적 있다. 그래서 바람이나 좀 쐬고 들어가려고 바깥 계단에 가서 앉아 있었는데, 그걸 보고는 문학소녀였던 한 친구가 훗날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니 난 고독을 느끼는 섬 뭐 그런 게 아니라 500원 부족해서 음료수 못 뽑아 먹고는 잠깐 앉아 있었던 건데….
이렇듯 혼자 판타지를 덧씌워가며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상대는 분명 내가 상상하는 그런 사람일 거라 믿어버리면, 이후엔 ‘알고 보니 그게 아님’을 깨닫는 일만 펼쳐질 수 있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노멀로그의 사연 신청서를 작성할 때, 상대에 대한 사실관계를 채워 넣는 부분엔 겨우
-~으로 추정.
-~한 것 같음.
이라고 밖에 적어 넣을 수 없으면서, 그런 ‘사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은 상대보다 상대를 더 잘 알고 있다는 듯 얘기하면, 그건 100% 이쪽의 판타지를 상대에게 덧입힌 것일 뿐인 거다. 이러는 것과 동시에 상대가 내 이상형과 가까우니 일단 상대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며 어떻게 하는지 보겠다고 할 경우, 결국 지 마음대로 구는 상대에게 상처 받는 건 필연적인 일임을 잊지 말자.
2.뜬금없이 솔직하다고 해서 특별한 건 아니다.
뜬금없는 솔직함은, 99.82%의 확률로 개수작일 가능성이 높다. 이제 겨우 두세 번 본 사람이 다짜고짜
라는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안 봤는데, 평소에 이러고 다니세요?”라곤 차마 못 물어도 ‘쟨 내 생일보다 생물학적 특징이 더 궁금한가보네’하는 생각 정도는 해야지,
하고 있으면 곤란하다. 그 뜬금없는 솔직함을 ‘특별함’으로 해석해 ‘내 예상대로 역시 얜 평범한 사람은 아니야’하고만 있으면 더더욱 곤란한 것이고 말이다.
저런 식으로 수작을 부리는 사람을 처음 만날 경우 당황할 순 있다. 그래서 대체 이 상황이 무엇이며 어떻게 대처해야하는 건지, 상대는 어떤 생각으로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그것 역시 이후에 상대가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은정씨의 상대는 어땠는가?
-차에 가서 잠깐 스킨십 하자고 말하기.
-거절당하자, 다음 기회에 똑같은 방식으로 불러내 스킨십 시도하기.
은정씨가 부여한 여러 가지 의미를 다 걷어내고 이렇게 사실관계만 보면, 상대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게다가 그 ‘솔직함’을 앞세워 은정씨를 휘둘렀던 상대는, 스킨십 이후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또 은정씨를 휘두르지 않았는가.
상대가 ‘솔직함’이라며 말하고 있는 것들은, 간단히
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저 밑밥을 깔기 위해 무슨 과거에 트라우마가 있어 자신은 사랑을 모른다느니, 여러 사랑을 해봤는데 사랑이라는 건 환상 같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사례가 생각보다 많다.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두세 번 얼굴 보고는 말로 혹하게 만들어 스킨십이나 하려는 수작일 뿐인데, 그게 무슨 특별함과 솔직함과 보통의 감정과는 다른 고차원적 고찰에 의한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이다.
이런 말에 혹해선 ‘아직 아무 것도 모르지만 일단 솔직하게 말하니까 믿어보자’고 할 경우, 이후 ‘솔직히 난 이게 사랑이 아닌 것 같다’거나 ‘솔직히 내겐 너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이야기, 또는 ‘솔직히 더 마음이 가는 사람을 만났다’ 따위의 이야기를 듣곤 주화입마에 빠지게 될 수 있음을 기억해 두자.
3.상대의 궤변.
무책임과 회피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대개, 궤변과 관련해선 만렙을 찍은 경우가 많다. 내가 지금까지 한 얘기를 은정씨가 들고 가선 상대에게 따져도, 상대는
은정. 내 마음이 궁금하면 차라리 나에게 묻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우린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아니면 그 블로거에게 말했듯, 은정의 의심과 불안을 전부 내게 말하지 그랬어요. 그럼 내가 해결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저는 적어도 은정에 대해 마음대로 짐작하거나, 혼자 결론을 낸 뒤 통보하진 않았다는 말만 적어둘게요. 안녕.”
이라는 말로 쉽게 빠져나갈 것이다.
그럼 또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쪽의 의심과 상상과 짐작 때문에 이 관계가 전부 틀어져 버린 것 같은데다, 혹시 이제라도 사과하고 매달리면 ‘저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상대를 돌려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급해질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이제야 꺼내놓는 그 ‘의도’같은 건 썸을 타는 동안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고, 상대는 만날 약속을 잡아 놓고도 그냥 넘어간 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그저 없는 사람처럼 지내다가 외롭고 심심한 어느 새벽에나 연락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잊지 말자. 마음은 행동으로 드러나는 까닭에 그간 상대가 보인 행동을 보면 어떤 마음인지를 알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해 실망을 전하자 확인할 방법 없는 ‘의도’를 내세우며 그게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에 넘어가지 말자.
라고 팩트를 말해도, 궤변에 능한 상대는
라며 이쪽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이 경우, ‘벌어진 일들’에 대한 대화라기보다는 확인할 방법 없는 ‘상대의 진심’, ‘상대의 의도’만을 기반으로 한 링에서 ‘난 그게 아니었으니까 한 대’, ‘내가 이렇게 말해도 못 믿으면 믿지 못한 건 너니까 한 대’ 하며 영혼이 털릴 때까지 맞을 수 있으니, 그렇게 맞아가면서 이제야 상대의 진심을 안 것 같고 후회된다며 사과하고 매달리진 말자.
연락두절 된 채 지내던 이유를 ‘나에 대해 뭔가 화가 나서 연락을 안 하는 거라 생각해 고민하느라 아무 말도 못했던 것’이라 말하는 멍멍멍 소리까지 다 들어주고 있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건 그냥 상대가 변명과 궤변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이쪽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니, 끝까지 이쪽을 그렇게 기만하는 비겁한 사람에게 혹시 아직 손톱만큼의 애정이 있진 않을까 하는 기대는 하진 말자.
끝으로 은정씨에게 하나 당부하고 싶은 건, 스스로도 좀 조심하고, 거절하고, 그때그때 드는 생각을 상대에게 확실히 말하자는 거다. 일단 별 의사표현 없이 다 따라가 보고 난 뒤 “여긴 제가 가려고 했던 곳이 아닌데 왜 이런 곳에 온 거죠?”하다간 매번 곤란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 가보다가 이 길이 아닌 것 같으면 아닌 것 같다고 말도 하고, 상대가 가자는 곳이 싫으면 싫다고도 말해야지, ‘일단 믿고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올인 부터 하면 다 잃고 난 뒤에야 잘못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일단 다 따라가 보기로 하는 건, 상대로 하여금 이쪽을 주관도 없고, 판단력도 없고, 그냥 부르고 싶을 때 나오라면 나오는 쉬운 사람으로만 여겨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자. 그게 다 상대에게 호감과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고 속으로는 ‘어떻게 하는지 봐야지’하는 생각을 품고 본 거라고 해도, 겉으로 드러난 그런 모습만 본 상대는 결국 이쪽을 얕잡아보거나 기만하려 들 수 있다. 상대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존중해보는 것 좋지만, 그렇다고 이쪽이 바보인 척 네네네네 하고 있을 필요까진 없다. 그러니 속으로 ‘뭐지 이시키?’하는 순간이 찾아왔음에도 겉으로는 헤헤네네 하며 굳이 막장까지 다 가서 확인하려 하진 말자.
자 그럼, 난 감성돔 낚시를 위해 공부해야 할 게 많아 바쁘니,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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