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장르로 인정해도 될 만큼, 모태솔로남들이 동창생 여자를 짝사랑하는 사연은 꽤 많다. 이게 왜 이런 건가 하고 봤더니
-현재 연락하고 지내는 이성이라곤 그녀가 유일함.
-우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상대가 꽤나 다정한 반응해줌.
-전에 이러이러한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거기에 뭔가 있었던 거 아닐까싶음.
-간만에 얼굴 한 번 보자고 말해서 실제로 만날 수 있음.
등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살짝 눈물겨운 얘기긴 하지만 겨우
-나한테 과자를 준 적 있는, 또는 같은 버스를 타고 다녔던 여자 동창.
-날 놀렸던, 또는 짝꿍인 적 있는 여자 동창.
-반창회한다고 나가서 만나 헤어질 때 악수한 적 있는 여자 동창.
이란 것 정도의 접점을 기반으로, 모태솔로남들은 ‘이 관계에서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이란 희망을 품곤 하는 것이다.
1.짝사랑이라 정의한 채 내달리지 말자.
대략 5~6년 전 어느 날 잠깐 있었던 일을 가지곤
‘혹시 그때 걔가 그랬던 게, 어쩌면 내게….’
라며 과잉해석을 하고, 어쩌면 그 해석이 사실일 거라 믿으며 ‘상대와 연애할 가능성’을 점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다. 어떤 대원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상대가 ‘빵 먹다가 다 못 먹겠다며 준 일’을 가지고는
“그런데 말입니다. 걔는 그때 왜 제게 빵을 줬던 걸까요? 저랑 그렇게 친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라며 빨리 나도 그 심증에 동의하길 바라고 있던데, 그것 말고는 별다른 일이 있었으며 이후 지금까지 둘은 연락도 안 하고 지내는 사이였다는 점에서 그건 말 그대로 ‘배불러서 남은 빵 준 일’로 보는 게 맞다.
상대가 손에 낙서하는 장난을 쳤다든지, 문제 풀다가 물어본 적 있다든지, 별명을 지어서 불러준 적 있다든지 등의 정말 아주 작은 그 시절의 유물을 발굴해 낸 후, 내게 들고 와선
“이것 좀 보세요. 그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분명 뭔가 있었던 거겠죠?”
라는 대원들 때문에 난 일주일에 몇 번씩 깊은 한숨을 쉬곤 한다.
내가 동창생에게 다가가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건 전혀 아니지만, 저렇게 유적발굴을 한 후 그걸 근거로 다가가 곧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좀 내려놨으면 한다. 그리고 다가가더라도 과거의 인연은 그냥 그뿐인 것이라 생각하며 지금부터 새로 관계를 만들어봐야지, 상대가 ‘유일하게 연락할 수 있는 이성이자 내 생에 가장 가까웠던 것 같은 이성’이라는 이유로 ‘연애로 이어질 가능성’이 가장 높다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부분에 대해, 반드시 먼저 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외롭게 지내다가 과거에 접점이 있었던 동창생을 떠올리고는
‘그때 걔랑 진짜 그런 일이 있었지. 아 근데 왜 자꾸 생각나지? 이거 내가 짝사랑 하는 건가? 연락하고 싶고 만나고 싶은 걸 보니까, 내가 짝사랑하는 거 맞네. 노멀로그에 사연 보내서 물어봐야겠다.’
하며 사연을 보내는 대원들이 너무 많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으면 나도 “졸업앨범 펼치십쇼. 동창회 연락처 구하십쇼. 동창 밴드 가입이 답입니다.”정도의 이야기만 하면 되니 좋겠지만, 그렇게 발굴해서 연락하고 카톡 몇 번 하다가 만난다고 저절로 다 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 다가가 보더라도 그걸 ‘짝사랑’으로 못 박은 채 구애부터 할 생각하지 말고, 느슨해진 인연의 끈을 당겨 상대를 좀 더 알아가 본다는 생각으로 만나보자.
2.이건 상황에 따라 눈치껏 해야 하는 부분들인데….
사연들이 워낙 각양각색인 까닭에 가이드를 제시하기가 참 어려운데, 일단 난 상대와 연락하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 얘기를 자꾸, 그리고 너무 많이 오랫동안 하지 말 것.
을 권해주고 싶다. 초반 대화에서 둘 다 아는 동창생이나 지인들의 이야기를 하는 건 좋은 선택인데, 매번 대화할 때마다 그 주제로 너무 오랜 시간을 쏟을 필요는 없다.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내거나 궁금해하면 이야기해도 좋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의 안부까지 전부 꺼내 소개하거나 ‘걔 기억나냐’면서까지 파고들어 대화할 필요는 없다.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라면 ‘우리 둘’과 얽힌 이야기를 하는 게 좋다.
-그때 네가 어떠어떠했을 때 난 어떠어떠했다.
-그 일이 있었을 때 사실 난 이러이러한 상황이었다.
-난 그때 널 보고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했다.
-거기엔 네가 모르는 이러이러한 뒷이야기가 있었다.
정도면 충분하다. 창식이 건대에서 알바 하는데 거기 가면 주스 공짜로 먹을 수 있고, 창식이가 대학 다니다가 어찌어찌 해서 이러이러한 상황에 놓여있고, 창식이랑 나랑 같이 어울리던 용식이는 이러이러한 일을 하며 요즘 운전면허 따려고 어쩌고저쩌고 할 필요는 없단 얘기다. 그런 얘기를 하느라 막 40분씩 잡아먹으면, 대화 자체가 피곤해지며 앞으로 더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수 있다. 이쪽이 상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감추려 일부러 더 빙빙 돌려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아무말대잔치를 하는 대원들이 있는데, 그러지 말자.
그리고 내가 매뉴얼을 통해 “썸을 탈 때, 서로의 일상에 있는 사물이나 인물의 사진을 찍어 보여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한 건 맞는데, 그게 이제 막 연락하게 된 여자 동창생에게 일방적으로
“너 방은 어때? 사진 보여줘.”
라는 이야기를 하라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런 주제로 가려면 이쪽의 방을 먼저 보여주고 나서 상대의 방도 궁금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살짝만 흘리거나, 아니면 방 어디가 어떻게 생겼냐는 이야기를 하다가 상대가 ‘요 정도는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보여주는 걸 보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 다짜고짜 여자에게 방 사진 찍어서 보여 달라고 하면 경계심과 거부감부터 들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자.
더불어, 자꾸 뭘 주거나 해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가 코스트코 회원권이 없어서 이용하지 않는데 가보고 싶다고 하면 상품권이라도 구해 같이 가는 방법 정도는 사용해도 되지만, 상대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말도 안 꺼냈는데 자꾸 이쪽에서 ‘이렇게 해주면 좋아하겠지?’하며 베풀려고 들면 그건 부담이 될 수 있다. 대화 중 상대가 초밥 좋아한다는 얘기 나오면 나중에 만나서 초밥 먹을 생각 정도만 해두기로 하자. 막 오버해서 초밥 좋아하냐고 물은 뒤 좋아한다고 하면 같이 먹자고 했다가, 시간이 안 맞아 같이 못 먹게 되자 도시락이라도 사다가 배달해주겠다며 집주소 물어보고 그러지 말자.
너무 뭔가를 해주고 싶다면, 관심을 가지고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자. 상대가 한 말을 기억해주고, 상대가 시험을 본다고 한 날에 잘 보라는 메시지 하나 보내주고 그러면 되는 거다. 시험에 떨어졌다고 하면 위로의 치맥을 함께 하자고 하면서 1인 1닭을 실천하면 되는 거고 말이다. 얼른 막 뭔가를 선물해주고 도와주는 것으로 호감을 사려 하지 말고, 자주 할 수 있는 ‘간단하고 쉽지만 분명 값진’ 것들을 먼저 하자. 칭찬과 인사와 응원 같은 거!
3.쫄지 말고, 숨기지 말며, 남자답게 어깨 펴고 말하자.
내가 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무슨 국가기밀이라 숨겨야 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곧 누군가를 소개받을 것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너 좋아하니까 그 소개 안 받고 나 만나면 안 되겠냐고 말하는 게 죽기보다 어려운 건 아니잖은가. 퇴짜 맞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자꾸 눈치 보고 떠보며 쪼그라들지 말자.
“대화하다 연애 얘기가 나왔어요. 그녀는 아무래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면서, 자기 남자친구는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더라고요. 멀리 사는 제 입장에서는 참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서 저도 그녀의 말에 수긍했습니다. 사실 멀리 살고 있는 현 상황에서, 제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둘이 장거리로 평생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아직 둘이 사귀어 본 적도 없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상대의 저 한 마디에 쫄아서는 시무룩하게 있을 필욘 없는 것 아닌가. 장거리라도 둘의 관계를 잘 지킨 사례들이 있으니 그런 이야기를 풀어놔도 되고, 상대가 장거리에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걸 좀 완화하려 해도 되며, 아니면 멀리에 좋은 사람 있는데 꼭 가까이에서 찾아야 한다며 무작정 가까이 있는 사람만 만나보는 건 현명하지 않은 것 같다는 얘기를 해도 된다.
상대가 남자를 소개 받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 와중에
“어떤 사람인데? 대화는 해봤어? 서로 존대 해, 반말 해? 혹시 너 그 사람과 연애하게 되면, 내가 연락 자주 할 경우 그 사람이 좀 불쾌해하거나 싫어하지 않을까?”
라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건 참 개복치 같은 행동이다.(개복치는 속상해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물고기로 알려져 있다.) 내가 상대를 좋아하는데 상대는 소개팅을 한다고 하니 그것에 속상해만 할 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라면 내가 지금 그 사람보다 널 더 좋아한단 얘기를 해서라도 대시해야 할 것 아닌가. 늘 빙빙 돌리느라 표현도 안 하고, 소개팅 한다고 해도 ‘너 사귈 경우 내가 자주 연락하면 네 남친 될 사람이 싫어할까?’라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니, 참 매력 없다. 우리 때만 해도 참 ‘남자는 갑빠’라는 생각에 전력으로 대시했다 그만큼 매몰차게 퇴짜 맞고 그랬는데….
그렇게 간 보다가, 이게 결코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 또 막 3개월 6개월씩 조용히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또 용기를 내
“안녕? 잘 지내?”
하는 얘기만 하진 말자. 까여도 내가 까인다는 생각으로 스텝은 좀 밟아보고 까여야지, 링 밖에서 눈치만 보다가 올라가지도 않고 끝내는 건 너무 좀 그렇잖은가. 그래버리면 상대가 보기에도 이쪽이, 속을 확실히 알 수 없이 툭하면 잠수 타는 사람처럼만 보일 거고 말이다.
내가 짝사랑을 시작한 것 같다며, ‘짝사랑 중인 남자’의 포지션만을 취하며 표현도 제대로 못하고 툭하면 상심해 괴로워하는 패턴에서 벗어나자. 상대가 이쪽이란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하는데 들이대는 거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상대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호감을 가진 채 대하는 게 민폐를 끼치거나 못할 짓 하는 건 아니잖은가. 그러니 ‘잘 되어 연인이 되느냐, 아니면 못 사귀고 인연이 끊기느냐’는 극단적인 두 선택지만 놓고 고민하지 말고, 시나브로 가까워질 수 있도록 꾸준히 접점을 만들어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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