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규씨 이것 봐봐. 내가 이 사연 읽다가 놀라서, 주말인데도 이렇게 매뉴얼 작성을 시작하게 됐어. 그러니까 지금 이 관계가 썸이 맞냐 아니냐가 중유한 게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가 있어. 그건 바로,
-처음부터 얼마 전까지의 분위기는 분명 좋았는데, 얼마 전부터 은규씨가 점점 찐득하게 들러붙는 느낌으로 상대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중.
이라는 문제야. 한 보름 전과 비교해 지금 상대에게서 답장 오는 템포가 느려졌지? 저녁을 건너뛰고 다음 날 아침에야 오기도 하고 말이야. 이거 이대로면, 상대에게서 “근데 사실, 저녁이나 주말에 연락하시는 게 좀 불편해요.”라는 반응이 2주 내로 나올 각이거든.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은규씨는 아마
“그럼 썸이 아니었던 건가요? 몇 주 전까지는 잘 받아주고 상대가 먼저 말 걸기도 했는데, 왜 그렇게 갑자기 바뀌는 거죠?”
라고 할 것 같은데, 그 이유와 함께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바로 이야기 시작해 볼게. 출발!
1. 자꾸 확인받으려는 남자는 비호감이다.
여린 마음을 가진 남자들이 ‘대 변혁기’를 거치기 전 가장 많이 하는 게 뭐야? 물론 짝사랑도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 많이 하는 게 ‘떠보기’거든. 떠보기는 스마트폰과 엄지손가락만 있어도 할 수 있어. 예컨대 부쩍 자주 연락하게 된 이성에게
“내가 퇴근 이후에 연락하면 역시나 좀 부담스러운가…. 칼같이 쉬라면서 끊는 걸 보니 ㅎㅎㅎ”
따위의 카톡을 보내곤, 그녀가 저 얘기를 부정해주길 기다릴 수 있지. 저 말에 대해 그녀가
“아아 아녜요. ㅎㅎ 운전도 하셔야 하고, 전에 퇴근 후에는 집을 느끼며 쉰다고 하셔서 ㅎㅎ”
라는 대답을 해주면,
‘오께이. 좋았어! 상대는 나름대로 날 배려한다고 쉬라고 한 거였어. 내가 연락하는 게 싫어서라거나 직장과 관련된 사람으로 한정 지어서 그런 게 아니라, 딴에는 조심스레 배려한다고 그런 거였어. 이제 마음껏 연락해도 된다! ㅎㅎㅎ’
하며 “이모, 여기 김칫국 두 그릇이요~!”할 수 있잖아.
그런데 저렇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후 상대가 그걸 다시 부정해주길 바라는 태도는, 상대에겐 피곤한 일로 느껴질 수 있어. 반복되면 그저 ‘징징거림’으로 느껴질 수 있고, ‘기-승-전-떠보기’가 되는 대화에 흥미를 잃게 될 수도 있지.
몇 주 전까지는 상대와의 대화가 괜찮았지? 그땐 은규씨가 저런 떠보기를 하지 않았어. 때문에 괜찮은 선배 직원처럼 보였는데, 안타깝게도 조금씩 더 친해지며 대화의 빈도가 늘어나니 은규씨는 자꾸 저런 태도를 보이며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려 하네? 상대는 이전과 다를 것 없이 리액션을 해주는데, 거기에 대고 은규씨는 “에잇 너무해.”라거나 “안 온다고 할 줄 알았음.”이란 뉘앙스로 자꾸 다리를 걸려고 하잖아. 이러면 상대는 피로해지게 되고, 말만 섞었다 하면 자신이 달래주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하니 대화에 흥미를 잃을 수 있으며, 알맹이 없이 자꾸 떠보기만 하는 은규씨의 태도를 부담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다는 걸 잊지 말자고.
2. 심심해하며 할 것 없는 남자로 보이면 무매력….
은규씨 소싯적에 짝사랑 좀 해봤지? 짝사랑 좀 해봤던 사람들은 분명 좀 다른 게 있어. 밑장을 빼면 소리가 다르듯, 짝사랑 좀 해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아도 되는 지점’에서도 기가 막히게 심심해하며 할 것 없는 남자로 보이는 위치를 찾아가거든.
쉬는 날에 웹툰을 보는 취미가 있다고 해봐. 그러면 보통의 사람들은, 상대가 뭐 하냐고 물었을 때
“신작 웹툰 나와서 보고 있어요. 역사물인데, 흥미롭네요. 혹시 보는 웹툰 있어요?”
라며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가곤 해. 하지만 짝사랑 좀 해본 사람은, 상대가 뭐 하냐고 묻는 좋은 기회가 와도
“웹툰이나 보고 있다는…. 은지씨는 뭐해요? 피자? 와 좋겠다. 부럽다.”
정도의 반응만 보이며 스스로 매력을 다 깎아 먹곤 해. 그러면서 소제목 1번에서 말한 떠보기를 발동시켜선
“나중에 나랑도 피자? ㅎㅎ 둘이 먹는 건 좀 아니려나? 사람들이랑 같이 봐도 되고요. 우리 동네 맛있는 피자집 있는데, 언제 한 번 같이? ㅎㅎㅎ 아 ㅎㅎㅎ 안 온다고 할 줄 알고 있었어요. ㅎㅎㅎ”
하며 그냥 찐득하게 굴 뿐이지. 이렇게 비교해서 보니까, 은규씨가 그간 무엇을 어떻게 망쳐갔던 건지 좀 보이지?
저 위에서도 말했지만, 처음에 은규씨는 뭔가 좀 있어 보이는 선배였어. 나름의 취미생활도 있는 것 같고, 자신만의 철학으로 호불호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지. 그런데 상대가 리액션을 해주면 해줄수록, 은규씨는 신이 나서는 막 너무 나가기도 했고, 딴에는 웃기려고, 또는 겸손해 보이려고 한 이야기들이 은규씨를 점점 ‘무매력남’으로 보이게 만들고 말았어.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은규씨가 좀 겁이 많은 까닭에 스스로 조심하고 절제해 아주 엉망을 만든 건 아니니, 지금부터라도 ‘나 심심해 놀아줘’의 태도에서 벗어나 ‘나 재미있는 거 하고 있어. 같이 할래?’의 느낌으로 다가가 보길 바랄게.
3. 움직여 이 사람아. 움직여!
은규씨가 신청서에 이렇게 적었잖아.
“제가 그분이 있는 지역으로 가면 만나는데, 제가 저희 동네로 놀러 오라고 하면 안 오려는 거 같아요 ㅠㅠ”
저 이야기를 내 지인 자스민(41세, 필리핀)이 들으면, 아마 “이꺼 씰화냐? 사랑 많이 있어 때문에 그러는 거? 난 몰랐찌.”라는 이야기를 할 것 같아. 마닐라에서도 저러진 않거든. 좋아하는 사람에겐 망고라도 사 들고 가서 산미겔 한 잔 같이 하자고 하는 게 정석인데, 은규씨는 상대에게 ‘우리 동네 놀러오면 밥 사줄게요’하면서 오라는 이야기를 하고, 또 상대가 나중에 간다고 하니까 ‘잉잉 ㅠㅠ 나한테 큰 호감 없어서 안 오는 듯 ㅠㅠ’하고 있잖아.
그러는 거 아니야. 딱 봐봐. 은규씨가 상대 동네로 갔던 날, 상대는 일이 생겨 그 약속을 취소해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규씨에겐 말도 안 한 채 만나러 나왔지? 은규씨는 나중에야 동료를 통해 그녀가 그렇게까지 했다는 걸 알았고 말이야. 이것만으로도 그녀가 이 관계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큰 마음을 쓴 긍정적 신호라고 해석해야 하는 건데, 은규씨는 거기서 더더더더 확실하게 확인받고자 상대에게 오라는 얘기나 하고 있잖아.
은규씨 쉬는 날 뭐해? 별 거 안 하지? 그러면 인터넷 창 열어서 상대 사는 곳 쭉 한 번 둘러봐. 그러다 보면 그 동네 대표 식당들도 알 수 있고, 원주민도 잘 모르는 신박한 장소들도 알아낼 수 있거든. 기본적으로 그 동네 돈가스, 스테이크, 해장국, 주꾸미, 삼겹살, 스파게티, 파스타, 짜장, 짬뽕, 닭갈비, 비빔밥, 라면, 회, 치킨, 떡볶이, 초밥, 냉면, 부대찌개 집 정도는 파악해 둬야 해. 상대가 빵 좋아하면 유명 제과점 돌며 빵지순례도 할 수 있고, 삼청동, 가로수길, 경리단길, 뭐 갈만한 곳 많잖아.
내가 ‘연애 전, 솔로부대 복무시절이라고 해서 가만히만 있지 마세요’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그냥 집에서 웹툰과 미드만 보다 보면, 나중에 썸을 타며 데이트를 할 때에도 뭘 해야할지 모를 수 있어. 겨우 막 검색해서 토요일 저녁에 만나 갈 만한 식당 알아내긴 했는데, 딱 가보면 예약도 안 하고 가서 거기 막 세 바퀴씩 돌다 서로 발 아파져선 아무데나 보이는 곳 들어가자고 할 수도 있고, 딱 그거 하나만 알아두고 간 까닭에 밥 먹고 나선 ‘이제 뭐 하지?’하며 멘붕을 겪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좀 움직여. 상대와 꼭 연인이 되지 않는다 해도 만나며 겪게 되는 경험이 은규씨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이불 속에서 폰 붙든 채 상대의 반응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밖에서 상대와 만나 데이트를 해. 알았지?
너무 막 인위적으로라도 멋진 남자처럼 보일 필요는 없어. 내게 익숙한 모습이 아닌데, 일부러 누군가를 따라 하려다 보면 오히려 정작 내 모습은 못 보여주고 연기만 하다가 끝날 수 있거든. 하지만 상대에 보여주는 ‘내 모습’이라는 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잼난 웹툰이 있길래 보고 있어요’가 아니라 ‘웹툰이나 보며 시간 보내는 중’이란 식의 모습이라면, 그건 반드시 교정할 필요가 있어.
끝으로 하나만 더 말하자면, 은규씨의 경우는 ‘상대가 관심을 보이는 흥밋거리’에 대해 너무 깊게 들어가는 문제가 좀 있거든. 예컨대 상대가 강아지에 관심을 보이면 막 우리집 강아지 데려가서 보여주려고 하고 강아지 이야기로 이어가려고 한다거나, 상대가 어떤 가수 좋아한다고 하면 그 얘기를 주제 삼아 상대를 ‘그 가수 얘기라면 365일 24시간 관심을 보이는 사람’으로 생각한다거나 하는 문제 말이야.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건 그냥 좋아하는 거지 막 거기에 미쳐있는 상황이 아닐 수 있으니, 그게 해답이라 생각하며 너무 그쪽으로만 쏠리진 않았으면 좋겠어.
이제 좀 대략 감이 오지? 그 감 잃지 말고 은규씨부터 이 관계를 편안하고 즐겁게 생각하며 대화에 임해봐. 은규씨가 경직된 채 대화에 임하거나 상대의 호감만 확인할 생각으로 다가가면 그게 전부 부담으로 치환될 수 있으니까, 참 예쁘고 내 말에 리액션 잘해주는 동네 동생과 재밌는 얘기 나눈다는 생각으로 힘 빼고 다가가 봐. 그러다 걸림돌을 만나면 또 내게 사연을 보내면 되니까, 걱정은 내려놓고 일단 만나 봐.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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