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 바름과 조심성이, 갖추고 있으면 분명 좋은 덕목이긴 하다. 그런데 그게 다른 조건과 결합해
-예의 바름 + 수동적
-조심성 + 생각만 많음
-예의 바름 + 조심성 + 속내를 숨김
등의 상황이 되면, 얘기가 좀 달라질 수 있다. 아무 실수도 하지 않으려 ‘완벽하게 안전한 이야기’만 하다가 그저 자리 뜨면 사라질 지루한 안부 인사만 나누게 될 수 있고, 조심스럽게 다가간다며 맹목적으로 상대에게 호의적이기만 한 모습을 보여주다간 이쪽의 진심을 오해받거나 아무 긴장감도 없는 사이로 흘러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난 특별히 실수하거나 잘못한 것 없는 것 같은데, 왜 잘 안 되는가?
를 묻는 대원들의 사연을 보면, 실수하거나 잘못한 것이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매력적이라거나 잘한 부분도 찾기 힘들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며 지극히 평범한 대화만 오가며, 그 자리에 굳이 이쪽이 아니라 다른 누굴 갖다두든 그냥 다 그럴 것 같은 느낌만 드는 거라 할까. 이 지점에서 한 발짝 나아가기도 어려워하는 대원들을 오늘 함께 도와보자.
1. 내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만 하지 말고, 상대의 기준도 보자.
예의 바른 건, 스스로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거나 말과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의 가치관이 분명하게 서 있기에 가능한 것일 수 있다. 때문에 그런 대원들이 하는 얘기를 듣다 보면, 상대의 그것들에 대해서까지 너무 세밀한 부분까지 다 살펴 가며, ‘이건 무슨 의미?’라는 걸 찾아내려 하는 걸 볼 수 있다.
예컨대 내가 누군가의 썸남이며, 그녀에게 “아 근데, 선배님이라고 자꾸 부르니까 어색하다. 그냥 편하게 불러도 될 것 같아.”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보자. 그럼 보통의 경우 “아 그래요? 그럼 오빠라고 부르면 되나? ㅎㅎㅎ” 정도의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레 호칭정리를 하기 마련인데, 예의 바르고 조심성이 많은 대원들 중 하나는, 실제로 같은 상황을 겪고 내게
“오빠라고 불러달라는 소리인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갑작스런 그 말에 놀라기도 했고, 그랬다고 해서 오빠라고 부르면 너무 쉬워 보일까 봐 아무 대답도 안 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니 이게 상대가 “오빠 믿지?”를 시전한 것도 아니고 그저 호칭정리나 좀 하자는 건데, 여기서부터 힘겨워하면 그건 좀….
또, 3주 전에 카톡으로 한 번 대답한 걸 상대가 기억 못 하고 오늘 다시 물었다고 해서 그것 하나로 상대의 진정성부터 의심한다거나, 내 가치관과는 좀 다른 얘기를 했다고 해서 순식간에 표정관리를 못 해버리는 것도 문제다.
사람이 깜빡할 수도 있는 거고, 또 긴장한 나머지 뭐라도 묻다 보니 전에 물었던 걸 다시 물을 수도 있으며, 그냥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별 의미 없이 농담을 한다거나, 보통의 경우 좀 친해지다 보면 자신의 시각이나 기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걸 전부 ‘내 기준’으로 재가며 거기서 벗어난 부분들에 실망하거나 표정을 굳혀버리면, 교과서 같은 상대가 모범답안 같은 대답을 하지 않는 이상, 세상 사람 대부분이 그저 ‘바르지 못한 사람’으로만 보이진 않을지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한다. 대화할 때마다 턱턱 걸리는 게 많은 건, 무조건 상대가 모나서 그런 게 아니라, 이쪽이 자꾸 각진 마음으로만 받아들여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2. 대화에 형식적인 질문, 의무적인 리액션만 있는 건 아닌가?
이건 내가 매뉴얼을 통해
-우와 진짜요?/정말요?/대박/이욜/대단한데요?
등의 추임새를 활용하라고 말한 적 있는 건 맞는데, 그러니까 그걸 좀 적절하고 적당하게 사용해야지, 그냥 그것만으로 대화를 이어가 버리거나 해서는 안 된다.
남자 – 나는 이제 집 도착 ㅎㅎ
여자 – 아 진짜요?
남자 – 낼 새벽에 나가니 얼른 씻고 잘 준비해야지 ㅎ
여자 – 아 ㅋㅋㅋ 네 얼른 주무실 준비 하세요 ㅋㅋ
남자 – 넌 뭐하고 있어?
여자 – 아 ㅋㅋㅋ 그냥 티비봐요 ㅋㅋㅋ
남자 – 뭐 보는데?
여자 – 아 ㅋㅋㅋ 나 혼자 산다요. 혹시 이거 보세요?
남자 – 응 어쩌다 한 번씩 보긴 해 ㅎㅎ 전현무랑 걔 누구야 걔랑 어쩌고….
여자 – 아 맞아요 ㅋㅋㅋ 걔네 둘이 어쩌고….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자꾸 ‘아 ㅋㅋㅋ’로 시동을 걸어야만 나아갈 수 있는 걸까. 예의 바르게 대해야 한다는 강박과 상대의 말에 리액션도 충실해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저런 형태로만 대화를 이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네’라는 대답만 해도 그냥 ‘네~’라고 해도 되는 걸, 너무 성의 없을까봐 물결표시를 가능한 한 많이 붙여가며 “네~~~~”라고 답하거나, 그것도 혹 이쪽이 호의적인 표정으로 하는 대답이라는 걸 전달하지 못할까봐 “네~~~~ ㅋㅋㅋ”또는 “네~~~ ^^”, 아니면 “네네~~~~!”라고 마무리를 해야만 마음이 놓이는 대원들. 그렇게 물결표시와 웃음표시와 느낌표와 ‘ㅋ’나 ‘ㅎ’를 있는 대로 끌어 쓰는 것보다, 대화의 ‘내용’을 채워가는 게 중요한 것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막 그렇게 상대를 인터뷰 하듯, 또는 접대하듯 대하지 않아도 된다. 혹 말실수를 할까 봐 완전히 안전한 말들만 하려 하고 맹목적으로 호의적인 대답만 해주는 것이, 오히려 상대를 지루하게 만들며 그저 ‘대화를 위한 대화’를 계속해야 하는 느낌을 받게 만들 수 있다. 또, 같은 질문이어도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과 예의상 물어보곤 “오 ㅋㅋㅋ 재미있겠네요.” 등으로 끝내고 마는 형식적인 질문은 분명 그 질량이 다르니, 1차원적인 질문과 1차원적인 리액션만을 거듭하기보다는 진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도록 하자.
3. 상대 마음 확인은 나중에.
만나서 재미있게 대화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들어와선,
“그런데 상대가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했던 부분은 부정적인 것 같습니다. A라는 지점은 저를 이성으로 생각했다면 하지 않았을 질문일 수 있고, B라는 지점은 객관적인 저의 매력에 대해 낮은 점수를 매기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며 땅을 파고 들어갈 필요 없다. 중요한 건
-그 만남 이후로 둘은 계속 연락하며 화기애애하게 대화할 수 있고, 다음번에 또 만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요소는 현재 하나도 없다는 것.
이지, 만났을 때 상대와 좀 어색하게 떨어져 걸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이나 그가 “그래? 소개팅했어? 어땠는데?”라고 물었던 지점이 아니다. 지금 이 판의 대마가 살아 있는데, 구석에 집 하나 내준 것 신경 쓰다가 허리가 끊겨선 안 되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100%’가 아니었던 지점에 골몰하지 말고, 지금 가능하며 긍정적으로 해석해도 되는 부분을 보며 가자.
상대와의 대화에서 부정적인 부분을 찾아내 그걸 펼쳐두고 고민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상대에게 답을 듣고도 의심하거나 그걸 부정하려는 경우도 있다.
“자꾸 그 지역에 가는 걸 보니 혹시 그 지역에 썸녀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친구랑 얘기해보니, 친구 말로는 거짓말일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요즘 누가 썸녀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냐고 하더라고요. 무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혹시 친구가 신내림을 받았는가? 그런 게 아니라면, 상대에게 확인받은 답을 가지고 가 친구에게 점괘를 내 달라고 부탁하진 말자. 그 얘기를 한 친구는
“썸녀는 없겠지. 하지만 아직 썸을 안 탈 뿐, 만나는 여자사람이 없다고 한 건 아니지. 딱 봐. 지금 소름 돋지? 바로 이런 트릭이 숨어 있던 거야. 결론은, 썸녀는 없지만 그냥 만나는 여자사람은 몇 있다. 이렇게 또 내가 사건 하나 해결했군.”
이라 홀록 셤즈(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 친구에게 커피 사주며 친구의 추리를 듣는 것보다, 그냥 상대와 만나 커피 한 잔을 같이 하는 게 분명 도움 될 거라는 걸 잊지 말자.
연락 잘 되며, 답장도 충실히 오고, 또 만나는 것에도 아무 지장이 없는데,
“하지만 상대에게 선톡이 오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건 저에게 관심이 없다는 거겠죠.”
하고만 있지 말고, 상대 마음 확인은 다음 달에나 한다는 생각을 하며 일단은 좀 만나서 재미있게 놀며 친해지길 바란다.
여담이지만, 예의 바르고 조심성 많은 대원들의 사연신청서엔
“위에서 제가 적은 내용 중 이러이러한 부분에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적다 보니 사연이 길어졌는데, 너무 길게 보내 죄송합니다.”
“각색이 어렵겠지만 이 부분에 대한 각색요청 드리는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등의 문장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일단 사과부터 하거나 혹시나 자신이 잘못한 게 있을까 봐 양해를 구하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너무 그렇게 상대 발밑까지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런 태도는 썸남이나 썸녀를 대할 때에도 드러나 자신이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혹은 이러다 상대가 날 귀찮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곤 하는데, 호감 있고 하고 싶은 말 있으니 얘기 좀 하자는 건 나쁜 짓이 아니잖은가. 상대가 싫다는 데도 안 나오면 찾아가겠다느니 하는 얘기를 하는 건 민폐가 맞지만, 그게 아니라면 너무 막 혼자 자체검열을 하느라 ‘지금 말 걸면 민폐인가?’, ‘내가 혼자 억지로 대화를 이어가려 하는 것인가?’ 하며 대화조차 시작 못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그 큰 걱정과 염려는 내려놓고,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상대와의 대화를 즐겨보길 바란다.
자, 오늘 준비한 얘기는 여기까지다. 해보다가 또 막히는 지점이 있으면 언제든 내게 사연을 보내길 바라며, 비 오는 수요일엔 좋은 사람과 함께 해물파전에 막걸리로 달리는 게 진리이니, 달리시길! 빈대떡이나 녹두전, 모둠전도 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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