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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6)

신입인 여직원과 단둘이 일하는 중인데, 어떻게 풀어가죠?

by 무한 2018. 4. 26.

현수씨가 ‘분위기도 좋고 뭔가 기회가 온 것 같다’고 생각할 만 한 것 같다. 상대가 잘 웃고, 잘 따르고, 호응도 잘 하고, 잘 맞춰주고, 질문도 잘 하고, 말도 많고, 유쾌하고, 발랄하고, 싫은 소리를 해도 얼른 고치겠다며 헤헤 하는 놀라운 사람이라, 이 정도면 누구라도 그린라이트라고 생각할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그녀의 처세이자 타고난 성격이 그런 까닭에 그린라이트로 보이는 거지, 꼭 상대가 현수씨라서 그런 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녀는 옆 사무실 남자직원과는 이미 말 놓고 편한 사이로 지내는 중인데, 그런 걸 보면 그냥 그녀는 모두에게 쾌활하고 긍정적이며 귀여운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하튼 그래서 난, 어차피 그녀와 이번 6월 이후로 계속 일하게 될지 아닐지도 알 수 없는 지금, 현수씨의 ‘장기전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금사빠이자 쉽게 상대를 부담스럽게 만든 전적이 있는 현수씨는 이번엔 ‘아다지오(천천히, 매우 느리게)’로 다가가는 중인데, 그게 ‘알레그로(빠르게, 활발하게)’인 상대와 자꾸 어긋나는 지점을 만드는 것 같다. 거기에 더해 현수씨는 몇 가지 실수를 더 하고 있는 중인데, 이런 현수씨를 오늘 함께 도와보자.

 

 

1. 상사라는 마음은 반 접고, 파트너라 생각하자.

 

난 우선, 현수씨가 상대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도와줄 거라거나 하는, 그런 생각을 반쯤 접길 권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강할 경우 자칫

 

-네가 만든 도자기를 내가 눈앞에서 깨부순 건, 너의 눈의 띄워주기 위한 큰 그림이었다.

 

하는 판타지에 빠지게 될 수 있는데, 픽션에선 그게 멋있게 묘사되지만, 현실에선 그냥 상대에게 조카 크레파스가 18색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그레이색으로 말이다.

 

상대가 물어보면 명확하게 대답해주고, 가르쳐 줄 거면 되도록 일이 벌어지기 전에 가르쳐주자.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컨셉을 설명해줘야지

 

“우선은 주현씨가 해봐요. 주현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고, 그 다음에 결정하죠.”

 

해선 안 되며,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야

 

“상대방에게 패널티에 대한 대답을 받아 놨어야 하는데…. 앞으로는 받아두도록 하세요.”

 

하며 가르쳐주는 건 ‘가르침’보다는 ‘갈굼’에 더 가깝게 느껴질 수 있다.

 

카리스마 있는 상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현수씨가 맡은 일을 기가 막히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상대가 실수를 해 곤란해졌을 때 현수씨가 나서서 당황하지 말라며 패닉에 빠진 상대를 도와주거나,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 상대가 상상도 못 했던 아이디어를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카리스마가 느껴지니 말이다.

 

지금 현수씨에겐 너무 힘이 들어가 있다. 난 현수씨가 상대에게 “그래요.”, “해봐요.”, “1, 2, 3 해서 보여주세요.”라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며, ‘이거 딱딱한 선생님이 과외지도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을 했다. 현수씨는 그 업무에 통달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세요.’라는 식으로 얘기를 해 창의성 같은 걸 키워주는 거라 착각할 수 있는데, 현수씨는 상대의 교수님이 아니라 직장동료라는 걸 잊지 말자.

 

직장동료면 최전방에서 지겨운 밥벌이를 함께하는 아군이지, 포로수용소에서 현수씨는 교도관으로 상대는 포로로 있는 게 아니잖은가. 그러니 잔뜩 힘을 준 채 자꾸 교정교화 작업을 하려 하지 말고, 같이 일하는 파트너라 생각하며 파트너십을 발휘해 보길 권한다.

 

 

2. 내놓은 패를 다시 집어넣거나, 안 낸 척하면 곤란하다.

 

현수씨의 사연을 읽으며 내가 충격과 공포에 빠진 부분은, 바로

 

a.공연 티켓이 생겼다며 상대에게 같이 보러 가자고 말함.

b.말하면서 ‘뭐 바쁘면 안 가도 되고’라는 식으로 한 발 뺌.

c.상대가 일이 많아 어려울 것 같다며 거절하자 현수씨는 실망함.

d.무슨 생각인지, 상대 앞에서 다른 여자에게 전화를 해 보러가자고 함.

e.그 통화 내용을 들으며 상대의 표정은 썩음.

 

라는 지점이었다. 놀랍게도 현수씨는 이걸

 

-그녀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어서 같이 보러 가자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아주 단순히 제안한 것일 뿐임을 증명하려, 다른 여자에게 바로 전화를 건 것.

 

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상대가 받을 부담을 덜어주는 액션이 아니라, 그냥 상대에게 ‘모든 여자 다 찔러보는 찝쩍이로 보이는 방법’에 더 가깝다.

 

상황이 변하는 것에 따라 자신의 의도까지도 바꾸면 안 된다. 그러면 그저 비겁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으며, 분명 그런 의도에서 그런 거면서 아닌 척하는 건 상대에겐 기만으로 느껴질 수 있다. 거절을 당했는데 이렇다 할 리액션이 생각나진 않을 땐 차라리 머쓱하게 웃으며 돌아서는 게 낫지, ‘너한테 진지하게 물어본 거 아니었어’라는 태도로 별 것 아닌 척하거나 농담이었던 척하면 안 된다.

 

이전 사연들까지를 포함해 지금까지 내가 현수씨를 보며 느낀 건, 잘 되어갈 때 들떠선 즉흥적으로 제안했다가 망치는 일이 많다는 거다. 그리고 자신이 기대한 것만큼 상대의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현수씨는 ‘비뚤어질 테다’하며 이상한 행동을 하니, 잘 되어가는 것 같을수록 자꾸 ‘더 빨리, 더 많이’만 바라지 말고 차분해질 수 있게 마음을 다잡길 권한다.

 

 

3. 상대는 애가 아니며, 현수씨 밑에만 있진 않을 것이다.

 

현수씨가 대학교에 갓 들어갔을 때, 그때 바라보던 졸업반 누나들을 떠올려 보길 바란다. 당시엔 그 누나들이, 이미 어른이 된 지 한참 지난 존재들처럼 보이지 않았는가.

 

지금 현수씨가 마음을 두고 있는 상대는, ‘그 누나들’보다도 나이가 많다. 당장은 상대가 신입이니 거의 맹목적으로 수긍하고 따르며 헤헤거리기도 하겠지만, 그게 결코 어리고 생각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리고 상대도 친구가 있고, 지인이 있고, 직장생활을 하며 거래처 사람이든 근처 사무실에서 우연이 알게 된 사람이든 아니면 출퇴근 길에 만난 사람이든 ‘다른 이성’들과의 관계가 있을 수 있는 건데, 그걸 두고 현수씨가 그저 질투심에 불타며 상대에게 차갑게 굴거나 그 관계에까지 간섭해선 안 된다.

 

상대가 외톨이이며, 아는 남자도 없고, 남자들과 말도 제대로 못 하는데 현수씨와만 대화하고, 남자가 인사를 해도 받지 않고 차갑게만 굴며, 옆 사무실 사람이 간식을 주려 해도 됐다며 돌려보내는 사람일 순 없는 것 아닌가. 현수씨가 바라는 것들에 그녀가 모두 충족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사회부적응자이자 성격파탄자여야 하며 현수씨에게만 정상인이어야 하는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길 권한다.

 

또, 이건 소제목 1번에서 한 이야기와도 닿아있는 지점인데, 그녀가 현수씨와 일을 하는 건 아주 잠시일 뿐이라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몇몇 ‘좋은 선배병’ 또는 ‘좋은 사업주병’에 걸린 사람들은 퇴사하려는 후배나 직원에게

 

-너랑 같이 일하는 동안 너에게 큰 열정을 보진 못했다.

-돈 따라가지 마라. 네가 그 돈을 받을만한지 생각해 봐라.

-제대로 안 하려거든 아예 하질 마라. 그만두는 건 나약한 거다.

-이 일은 겨우 그 정도의 마음으로 해선 성공하기 힘들다.

 

등의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저런 말을 들은 상대는 불편한 상황을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수긍하는 척하는 것 일뿐, 속으로는 십중팔구

 

‘너나 잘하시고, 너나 많이 하세요.’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상대가 거기서만 입사일이 늦으니 후배였던 것이고 또 부하직원이니 네네 하며 숙여줬을 뿐인 거지, 나가서 이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공할 수 있으며 더 좋은 조건의 직장에서 훌륭한 복지를 누리며 다닐 수도 있다. 여기다 다 적으면 너무 특정되는 까닭에 현수씨와 상대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긴 어려운데, 여하튼 현수씨는 몇 주 내로 위와 같은 이야기를 상대에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적어둔다.

 

상대가 그 회사를 나갔을 때에도 현수씨가 좋은 오빠이자 좋은 옛 직장 선배로 느껴질 수 있는, 그런 관계를 구축하는 게 답이다. 그래서 난 일부러 막 더 애써가며 “그래요. 그렇게 하세요.”같은 이야기를 해가며 무게 잡기보다는 말을 놓길 권하고 싶으며, 그녀가 옆 사무실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에 질투가 나 ‘공사를 구분해라’라는 등의 지적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럴 거면 현수씨부터 공사를 구분해야 한다. 한두 번도 아니고, 현수씨는 퇴근 시간 이후에, 상대 쉬는 날에, 주말에, ‘공적인 업무’를 핑계로 상대에게 연락하지 않았는가. 그게 훨씬 잘못된 것이며 상대에게 점점 ‘끔찍한 상사’로 여겨지는 일이니, 업무 시간 외에는 공적인 얘기를 넣어두길 바란다. 이렇게 말하면 현수씨는 또 얼어붙어선 ‘연락을 하지 말라는 건가?’할 수 있는데, 사적인 얘기는 해도 된다. 단, 상대의 반응 봐 가면서.

 

 

이걸 막, 빌드 배워서 그 순서대로 뭘 어떻게 할 생각은 하지 말자. 현수씨는 내게

 

“함께 할 재미있는 일들을 만들어 볼까요? 사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상사와 후배가 연인이 된다면 겪을 수 있는 부작용은 뭐가 있을까요?”

“제가 나이가 더 많으니 특별히 어필해야 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라는며 질문들을 쏟아놓았는데, 그럴 것 없이 업무 시간에 둘이 대화하다가 ‘뭐가 맛있다더라’ 같은 얘기 나오면 끝나고 같이 먹으러 가면 된다. 다행히 그녀는 현수씨를 ‘재미있는 드립 많이 치는 상사’로 생각하며 같이 밥 먹거나 술 마시는 것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데, 그러니 같이 회사 근처 맛집 도장 깨기를 하거나 함께 치맥을 달리면 되겠다.

 

그러면서 자연히 말도 놓고, 학교 다닐 땐 어땠는지도 묻고, 아 근데 얘기하다보니 답답하네. 상대가 현수씨 주량도 묻고 자기 술 세다고도 하고 술 얘기를 하며 신호를 한 대여섯 번은 보낸 것 같은데, 현수씨는 아직 술 약속 한 번을 못 잡고! 현수씨 바보야 뭐야! 잡아야 할 술 약속은 안 잡고 왜 애만 잡으려고 그래! 상대가 '친해지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백개씩 뿌려주는데, 그걸 다 드립으로만 받아치곤 뒤에서 혼자 새 계획 같은 것만 짤 필요 없다. 너무 많은 생각으로 어려워하며 빙빙 돌아가지 말고, 질러가자. 술 약속 잡기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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