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저는 이게, 썸이 아니라, ‘매일 보던 동료’로서의 관계가 이어지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이제 더는 안 보게 되었을 때 점점 멀어지는 것이라든가, 굳이 애써 약속을 잡거나 큰 리액션을 해주진 않는 것이 모두 설명됩니다. 매일 얼굴 볼 때에야 같이 으쌰으쌰하며 치맥도 먹으러 가지만, 멀어지고 나면 일 년에 한두 번 볼까말까 하는 사이가 되는, 뭐 그런 거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 주변에서는 그와의 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하고, 그와 저를 둘 다 아는 지인 역시 응원해주었으며, 지금도 몇몇 지인들은 가능성이 있으니 한 발 물러서서 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요?”
저도 제 지인들에게 종종 그런 말을 해주곤 합니다. 지인이 그 관계에 대해 긍정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제가 나서서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으니 말입니다. ‘어느 쪽에 돈이나 술을 걸겠냐’고 하면 바른대로 말하긴 하지만(응?), 그게 아니라면 그냥 잘 들어주며 응원을 해주곤 합니다.
만남이나 연락의 빈도, 둘이 공유한 이야기, 서로에 대해 아는 부분, 둘의 관계와 각자의 생활의 무게 차이 등 어느 방면으로 보든 이건 썸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P양은
-그가 자기 속 이야기를 내게 한 일.
-나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하며 응원해준 일.
-언젠가 만나선, 자주 약속 미뤄 미안하다며 사과한 일.
등을 근거로 그 관계를 ‘썸’이라 하신 것 같은데, 거기엔 살짝 오해가 있을 수 있을 수 있습니다. P양이 진심으로 그렇게 대했기에 상대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거나, 상대는 에누리를 붙여서 한 이야기들을 P양은 전부 그의 진심일 거라 생각한다거나 했을 수 있습니다.
제게 도착하는 사연들을 보면, 이런 오해를 하는 대원들에겐 특징이 있는데 그 특징은
-사람이, 그냥 투명하며 착함.
-이성과 공적 교류는 꽤 있지만, 사적 교류는 많지 않음.
-서른하나, 서른셋, 서른여섯이 되어서도 스물한 살 때처럼 이성을 대함.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원들은 좁고 깊게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의 관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렇기에 그 반대인 ‘넓고 얕게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을 만날 경우 그도 이쪽과 같을 거라 오해하곤 하며, 이쪽의 말 한마디와 상대의 말 한마디가 같은 무게를 지녔을 거라 쉽게 믿어버리고 맙니다.
때문에 이런 대원을 만나서 제가
“잘 들어줘서 그런가? 같이 대화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런 이야기들까지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라는 이야기를 하면, 순식간에 그 대원도 우리 관계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저게 제게는 그냥 대인관계에서 사용하는 레퍼토리이며, 그만큼 잘 들어주는 것에 대한 감사표현일 뿐이라도 말입니다. 뭐 그러면서 연락과 만남의 빈도도 는다면 긍정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냥 ‘지인’이나 ‘동료’로서의 좋은 관계를 맺는 것 정도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조언을 해준 건요? 그 조언이 저에겐 힘이 됐고, 사실 사귀거나 그런 게 아니더라도 전 계속 이렇게 좋은 관계로 지냈으면 했는데요.”
제가 저 위에 적은 공통점 중 ‘이성과 공적 교류는 꽤 있지만, 사적 교류는 많지 않음’이라는 항목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이성과 사적인 교류를 맺고 지내다 보면 ‘조언’ 정도를 해줄 이성은 꽤 될 수 있습니다. 진로 조언이나 연애 조언, 나아가 인생 조언까지를 해주며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둘의 관계를 평생 끈끈하게 가지고 가고 싶다거나 변함없이 마음 써가며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믿기 어렵다면, 공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이성 셋에게 뜬금없이 작은 고민 하나를 털어놓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적어도 그중 둘은, ‘왜 내게 이런 얘기를 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충실히 대답해 주려 노력하는 걸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십 대가 꺾이면서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성을 대하는 처세술’을 몇 개씩 습득하는 까닭에,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조언 및 응원을 해주는 것을 꼬꼬마 때처럼 부끄러워하거나 큰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했다면 P양 역시 이번 상대의 조언에 계란 하나 정도의 의미만을 부여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까닭에 쌀 한 가마니가 넘는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고 만 것 같습니다.
또, 그런 관계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서로의 상황과 사정이 바뀌면서 자연히 흐지부지될 수 있습니다. 공적인 일 때문에 매일 보던 사이었는데 이제 한 쪽이 그만두어 못 보게 된 거라면 멀어질 수 있고, 둘 중 하나가 연애를 시작해도 둘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으며, 한쪽이 대인관계에 대한 동력을 다른 곳에 쏟을 경우에도 둘의 사이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P양이 뭔가를 잘못했다거나 아니면 상대가 P양의 어떤 모습에 실망해서가 아니라, 그냥 제가 낚시 시즌이 시작되고는 탁구장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거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P양의 이 사연을 두고 ‘썸이 아닌 이유’를 더 말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고, 전 P양이 다시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면
70씩 3회 말고, 30씩 7회 하기.
-의미를 담아 말하거나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대화하기.
-되도록이면 말 놓기.
-조언이나 응원, 위로는 한두 번만 구하고 나머진 긍정적인 얘기하기.
-혼자 이랬다 저랬다 하며 약속 취소하거나, 반응 보려 하지 말기.
등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게 사적인 영역으로 접어들려면 서로를 대하는 태도나 사용하는 말 등이 먼저 좀 편해져야 하는데, P양의 경우 공적인 영역에 서서 가까워지길 바라니 영양가 없는 안부인사나 의미 없는 리액션 같은 것만 하게 됩니다. “뭐로 결정하셨어요?/잘하셨어요~” 같은 이야기만, 해가 바뀌도록 반복하는 것 말입니다.
더불어 개인적으로 꼭 말 높이는 걸 선호하시는 게 아니라면, 같은 나이임에도 굳이 열심히 말을 높여가며 계속 거리감을 두진 않는 게 좋을 수 있습니다. 또, 먼저 말을 꺼내 상대로부터 조언이나 응원, 위로를 받으면 기분이 좋을 수 있지만, 그게 너무 잦을 경우 이쪽이 그냥 ‘징징이’로 보일 위험이 있습니다. 연락이 오면 기분 좋고 힘이 되기보다는, 기 빨리는 느낌이 들며 대답해주고 토닥여줘야 할 짐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말입니다.(이럴 경우, 상대는 점점 ‘안읽씹’ 모드로 이쪽을 대하게 됩니다.)
우물쭈물할 것 없이 그냥 훅 들어가도 됩니다. 상대와 P양을 둘 다 아는 지인의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으니 그걸 바라거나 기대하진 마시고, 뭐 좀 해보려 하다가 주변에서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고 해서 전부 없던 일로 한 채 상대 반응만 살피지도 마셨으면 합니다. 리스크를 최소화하려 길가다 본 고양이 얘기 같은 것만 하고 또 얼마간 침묵하고 있으면, 그냥 그러다가 흐지부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이제 남남이 된 거구나’ 싶어 하던 중, 고양이 본 얘기를 또 해서 답장이 왔다고 희망이 무럭무럭 자라난 것도 결코 아니고 말입니다.
이거 지금 막 이렇게 아무 각도 보이지 않는 관계를 두고 1년 넘게 각만 재고 있으면 그러다 세월 다 갈 수 있으니, 각도기는 내려놓고 상대에게 ‘도우 끝이 페스츄리(페이스트리)인 피자 먹어봤나?’ 하며 만나서 피자 먹는 걸 목표로 한다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제게 다시 사연을 주시기 바라며, 이 관계도 굳이 ‘사귈 거 아니면 인연 끊기’를 택하기보다는 일단 ‘좋은 동료이자 친구’라는 카테고리에 넣어두셨으면 합니다. 꼭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서 쳐낼 게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려 거리 별로 두어도 괜찮다는 말씀을 드리며,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불금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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