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다닐 때의 일로 기억합니다. 학교에서 학생들 그림을 뽑아 시 단위인지 도 단위인지로 올려 보내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같은 반 여자애가 그린 그림이 미술선생님 눈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살짝 보완할 부분이 보였는지 선생님은 새로 그려보라며 몇 가지 주문을 했는데, 그 여자애는 따로 시간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시작을 못 한 채 어두운 얼굴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날 하루를 온전히 줬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애는 그림을 완성 못 했고, 다음 날까지 내주었음에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미술 선생님이 가서 좀 짜증 난 목소리로 말을 했을 때, 여자애가 눈물을 뚝뚝 흘리던 게 기억납니다. 그러면서 아마,
“이것보다 더…, 잘 그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라고 했을 겁니다.
그게, 당시 기타 코드 몇 개를 겨우 알 뿐이면서 축제 때 무대에 나가서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를 정도였던, 그렇게 겁 없이 대충 막 살던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아직 꼬꼬마니까 그냥 꼬꼬마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면 되는 건데, 그게 아닌 ‘내가 생각하는 완벽’과 비교만 할 뿐이라면 짓눌릴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어쨌든 그래서 이전 그림을 냈고 그 후로 별 소식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후 미술시간 마다 그 여자애는 최대한 뭔갈 잘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판화 같은 거 할 때, 2/3쯤만 하곤 미완으로 남겨둔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무한님이, 그 여자애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지켜보는 시나리오인가요?”
아뇨. 그때 전, 옆의 여중 다니는 예쁜 애한테 마주치게 되면 햄버거 먹으러 가자 하려고,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오천 원짜리 만지작거리며 다닐 때였습니다. 그림 잘 그리던 여자애는 제게, 그냥 그림을 참 잘 그리는 여자애였습니다. 안 배웠다는데 참 잘 그려.
연애 사연을 보냈더니 왜 추억팔이를 하고 있냐고 하실 수 있는데, 제가 본 혜진님의 모습이 바로 저 위의 ‘그림 잘 그리던 여자애’와 닮아 있었습니다. 썸남과의 관계가 너무나 좋으며 썸남이 거의 모든 면에서 혜진님의 이상형인데, 혜진님 스스로는 자신이 모자라다 생각하니 그가 과분하다 느껴져 선뜻 연애를 시작하기도 어렵다 하고, 사귀던 중 혜진님의 단점이 드러나 그에게 이별통보를 받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면서 말입니다.
연애를 너무 그렇게 막, 어렵게 생각하며 완벽해야 할 것처럼 여길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나보다 상대가 잘하는 게 있으면 만나며 배우면 되고, 특별히 날 좀 배려해줘야 할 부분이 있으면 말하고 도움을 요청해도 됩니다. 마음 맞는 친구랑 여행 가는데 친구가 소변을 자주 보는 타입이라면, 중간중간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도 가고 맛난 것도 사먹어가며 어울리는 것처럼, 연애도 그렇게 어울리면 되는 겁니다. 만약 친구가 ‘난 화장실을 자주 가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짜증내면 어쩌지? 그냥 여행 가지 말자고 해야겠다.’ 한다면, 늘 자신을 포장하며 각 잡고 있느라 스스로도 피곤하며 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은 확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더불어 연애, 또는 대인관계에 있는 기능인 ‘성숙과 변화’ 역시 혜진님에게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과 같이 지내다 보면 혜진님도 상대를 보며 닮게 될 수 있고, 그를 거울 삼아 혜진님들을 돌아보게 될 수도 있으며, 둘의 관계에서 갈등을 경험하고 그걸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좀 더 성장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섭다며 그냥 대부분을 가리고 피하기만 한다면, 한 뼘도 자라지 못한 채 ‘연애 역할극’만 하다 끝내게 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또, 혜진님이 막 A처럼 애교도 많아져야 하며, B처럼 리더십도 발휘해야 하고, C처럼 풍부한 상식도 지녀야 하며, D처럼 어느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사교성을 지녀야 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비교하며 주눅이 드는 건, 수리부엉이가 ‘난 오리처럼 헤엄을 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참새처럼 몸이 가벼운 것도 아니며, 뻐꾸기처럼 목청이 좋은 것도 아니고, 학처럼 도도하게 걷는 것도 아니다.’ 라며 비관에 빠져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밤하늘을 누비며 바위산과 숲을 지배하는, 자신에 대해선 잊은 채 말입니다. 아아 천연기념물 324호 수리부엉이여! 학명은 Bubo bubo.
“게다가 저는 이전 연애를 끝낸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아 심란하기도 합니다. 전남친은 제게 욕을 하고 막 대하던 사람이었어요.”
언젠가 제가 낚시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옆에서 두 아저씨가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낚시 마니아인 한 아저씨가 다른 아저씨를 데려온 것으로 보였는데, 장비는 모두 그 마니아 아저씨의 것인 것 같았습니다. 보통 꾼들은 ‘접대용 낚싯대’를 가지고 다니기 마련인데, 이미 초보 아저씨가 그걸 부러뜨려 먹었는지, 중급기 이상의 장비를 빌려 든 채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초보 아저씨가 빌려서 쓰던 낚싯대 세트 하나가, 제 두 개의 낚싯대 세트를 합친 것보다 비싼 물건이었을 겁니다. 가볍고 잘 감기고 탄성 좋고 뭐 그런.
그런데 낚시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며 그 물건이 얼마나 비싸고 좋은 건지도 모르는 그 아저씨는, 대를 막 턱턱 바닥에 던져 놓거나 바닥에 걸렸다며 우악스럽게 당겨댔습니다. 그게 꾼들에게는 컴퓨터 모니터에 볼펜으로 찍찍 그어가며 설명을 하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이며 가슴 아픈 일인데, 그러지 말라는 잔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대충 막 눕혀 놓고 질질 끌어가며 낚싯대를 사용했습니다. 이게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물건인 까닭에 좋은 비유가 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 가치를 잘 모르며 섬세하지도 않고 조심성도 없는 사람을 만나면 그냥 저렇게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얘기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못나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라는 이상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 그냥 뭐 밟은 거라 생각하셔도 된다는 얘깁니다.
카톡 대화를 보니, 제게 엄살을 피운 혜진님의 말과 달리 실전에선 대화도 잘하고 계시고, 또 상대 역시 리드하며 강하게 구애를 하고 있어, 어쩌면 이미 두 분은 연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건, 두 사람이 소개를 받은 지 한 달이 넘도록 그냥 좀 지지부진하며, 그 와중에 혜진님이 상대의 구애를 살짝 밀며 ‘시간이 좀 필요하고….’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그건 마치, 밥상이 다 차려졌는데도 수저를 드는 걸 계속 미루는 것과 같아서, 그러다간 잘 차려진 밥과 반찬들이 차게 식을 수 있다는 걸 기억해 두셨으면 합니다. 그만큼 마음이 없거나 이것저것 재느라 망설이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혜진님의 그 ‘속사정이 있어서 하고 있는 망설임’이 상대에겐 어장관리로 느껴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혼자서도 다 잘하는 철의 여인이 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상대가 채워줄 수 있는 허당인 부분이 있어야 상대도 채워줄 수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더욱 애정이 깊어 지기도 하는 법이니, 완벽해져야 한다는 생각은 그만 내려놓으셨으면 합니다. 피해도 안 주고 손해도 안 입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거리를 둔 채 얼어 있을 게 아니라, 날 이렇게나 위해준 상대에 대한 고마움을 서로 기억하며 평생 갚겠다는 마음으로 만나면 되는 거란 말씀을 드리며,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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