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성훈씨를 까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성훈씨의 시각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먼저 적어둘게. 사실 이건 두 번째로 다시 쓰는 매뉴얼인데, 첫 매뉴얼에선 내가
“당신은 한국의 하루키입니까?”
라고 시작했거든. 근데 그렇게 시작하면 예민하고 여린 성훈씨가 ‘그저 날 놀리는 건가?’라고 생각할 수 있기에 고양이자세 두 세트 하고 와서 다시 쓰는 거야. 요즘 칼을 하도 갈았더니 어깨랑 목이랑 허리가 너무 아파서.
“뭔갈 준비하고 계신가 봐요? 칼을 가는 마음으로 준비하신다는 표현이죠?”
아냐, 진짜 칼을 가는 거야. 180방, 320방, 1000방, 4000방 순으로 숫돌을 준비해서 집에 있는 모든 칼을 다 갈고 있어. 잡은 고기 회 뜰 때 칼이 안 들어서 시작한 건데, 하다 보니까 소확행이 느껴져서 열심히 갈고 있어. 칼 가는 건 갈면서 배우는 거라서고 해서 일단 무작정 시작했다가, 왼손 검지와 중지 지문이 다 벗겨져 나갔지만 말이야. 숫돌에 손가락까지 대고 갈다 보면 시나브로 닳아서 빨갛게 지문 아래 살이 드러나니까 성훈씨도 조심해. 여하튼 늦기 전에 오늘은 중식 칼도 갈아야 하니까, 바로 시작해 볼게.
성훈씨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 가장 이상적인 연애를 바라는 것.
이라고 할 수 있어. 뭐 한 것도 없으면서 다 되어 있는 상황을 바라기만 한달까. 이 관계를 위해 성훈씨가 한 거라고는 ‘머릿속으로 생각하기’가 대표적이며, 그것 이외의 것들이라곤 또 ‘닥친 상황에 대해 혼자 의미부여 하기’ 말곤 뭐 없잖아. 앞선 거라고는 기대뿐이며, 나머지 대부분은 뒤에서 곱씹거나 안타까워하는 것뿐이야.
이러다 보니 성훈씨의 세계에선, 상대가 주연이고 성훈씨는 조연, 아니 조연도 아니고 그냥 관찰하는 어떤 사람에 지나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말아. 내 호감과 관심의 주인이 되어 뭔갈 하진 못 하고, 그저 구경하고 마는 거지.
내가 이 얘기를 했는지 아니면 쓰다가 접어놓은 매뉴얼에만 적었는지 모르겠는데, 어느 인터넷 낚시 카페에 들어가면 ‘장어 질문’만 수두룩하게 하는 사람이 있어. 장어 언제 잡을 수 있냐, 어디서 잘 낚이냐, 미끼는 뭐 써야 하냐, 물때는 언제 가야 하냐, 바늘은 몇 호 써야 하냐, 방파제 외항이 낫냐 내항이 낫냐, 낮에 잘 나오냐 밤에 잘 나오냐, 염장꽁치가 낫냐 염장고등어가 낫냐 등 진짜 장어에 미친 사람인 것처럼 열심히 질문하거든? 근데 그 사람한테 최근에 대답해준 사람이 아래와 같은 댓글을 적어놨더라고.
“아직도 장어 낚시 안 가신 건가요? 매번 비슷한 질문이 보여서 제가 답글 달아드렸는데, 오늘 검색해보니 3년 전부터 질문만 하셨네요. ㅋㅋㅋ 3년 전에도 제가 똑같은 댓글 달아드렸어요. ㅋㅋㅋㅋ 일단 한 번 가서 시작해 보세요. 하면서 배우는 것도 있으니까요.”
성훈씨의 질문들을 보는 내 마음이 딱 저래. 철저한 준비도 좋고, 온 마음 다해 계획하는 것도 좋고, 잘 될 수 있게 노하우와 팁들을 듣는 것도 좋고 뭐 다 좋은데, 그게 너무 심하면 일종의 ‘되면 한다’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 이제껏 낚시를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모든 걸 남의 경험을 통해서만 들은 후, 완벽한 상황에 완벽한 장소에서 완벽한 낚시를 하려는 느낌이야.
실제로 낚시를 해보면 얼마나 변수가 많은데. 비 오는 날 입맛만 다시고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고, 바람 불어도 못 하지, 파도 높아도 못 하지, 날 좋아도 이미 포인트에 다른 사람 들어가 있으면 못 하지, 돌고래나 수달 나타나면 꽝 치지, 어탐기에 고기는 보이는데 내 미끼 안 물어주면 못 잡지, 인터넷으로 배운 채비가 현지 채비 못 따라가지, 밑밥 쉼 없이 던져도 고기 떼 빠지면 안 물지, 랜턴이랑 케미 안 챙겨 갔으면 해 질 때 집에 와야 하지, 대 부러졌는데 예비대 없으면 접어야지, 산 넘어 포인트 진입했는데 물하고 음식 없으면 철수해야지…. 이런 거 보고 완전무장하고 모든 걸 다 실어간다 해도, 갯바위 통해 포인트 진입하다가 넘어져 따개비에 손 찢어지면 낚시고 뭐고 바로 병원 가야 해.
그러니까 기대는 최소화한 채, 일단 경험 삼아 가본다 생각하며 한 번 해보는 게 나아. 모자란 게 있으면 나중에 채우면 되는 거고, 낚시가 꼭 내 상상 속에서처럼 ‘물고기 몇십 마리를 잡는 것’일 필요도 없는 거잖아.
호감 가는 이성과의 관계나 연애도 마찬가지야. 일단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해. 성훈씨 사연 보면 상대에게 제안했을 때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 넘쳤는데, 안타깝게도 성훈씨는
-상대의 마음도 내 마음과 꼭 맞으며, 진정한 사랑을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것만 바라거든. 늘 얘기하지만, 그러는 순간 그 관계는 현실에서 두둥실 떠버리며, 상대는 그냥 이쪽의 종교 같은 게 될 확률이 높아. 그 전까진 그냥 만나서 밥 먹고 영화 보고 일상도 공유할 수 있던 관계였는데, 그런 기대를 품는 것과 동시에 상대를 여신 같은 존재로 생각하며 이쪽은 상대의 카톡 남김말 같은 것에 담긴 의미 같은 걸 찾으려 하지.
더불어 그러다 보면,
-혼자 열심히 기를 오랫동안 모아, 헛소리하고 마는 것.
이라는 문제도 자연히 뒤따르곤 해. 현실과는 동떨어진 상상의 세계에서 상대를 바라보고, 나아가 상대가 모든 말이나 행동에 혼자 의미를 부여하다가, 나중에 그걸 압축해서
“내가 널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그때부터 널 좋아했던 것 같다. 넌 나에게 이러이러한 존재이며, 네가 이러이러한 행동을 했을 때 난 이러이러한 감정이 들었다. 넌 내가 싫을 수 있고, 짜증날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나는 멍청한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용기를 내 너에게 고백하지 못한 건 블라블라블라….”
따위의 얘기를 해버리고 마는 거야. 거기서 더 심해지면 막
“널 사랑하게 된 이후 난 달라졌다. 내가 고백이라도 한다면, 우리는 남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너를 생각하는 걸까, 나를 생각하는 걸까. 너를 많이 좋아했다는 것만이라도 전하고 싶다. 슬픈 결말이 예상되긴 하지만 용기를 낸다. 언젠가 너도 내 생각이 난다면 블라블라블라….”
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해. 물론 그런 얘기를 듣는 상대나, 그런 사연을 접하는 나나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할 뿐이지.
다시 봐봐. 저 위에 보면, 현실에서 혼자 두둥실 떠오르기 전까진 괜찮고 무난했지? 그럼 그 길로 더 갔어야 하는데, 성훈씨는 안드로메다행을 택하고 만 거야. 거기서부터는 음악과 문학과 영화, 만화와 드라마의 영역인데 말야. 거기로 계속 가다간
“네 곁에 있는 좋은 사람들, 왜 나는 너에게…. 언젠가 나에게도 기회가 오길…. 그럴 기회가 없는 거라면, 차라리 더는 사랑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난 너에게 부족하고 모자란….”
하면서 보이저호 뒤를 따르게 돼.
성훈씨도 상대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또 상대랑 가까워지는데 무슨 자격심사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근데 왜 자꾸 혼자 자학하면서 상대가 그걸 부정해주기만 바라고 있어? 같이 명륜진사갈비 가서 “리필 고기 목전지 말고 갈비로 주세요.” 하면서 울끈불끈한 팔근육으로 갈비 굽고 자르는 거 보여줄 수 있는 시간에 말이야.
“저 고기 잘 못 굽는데요.”
아니 누군 날 때부터 집게랑 가위 들고 태어났나? 믿기 어렵겠지만 나도 귀하게 자라서, 고기 자르거나 구워본 적 없어. 근데 지금은 다 해. 왜? 평생 누가 대신 해줄 애처럼 살 것도 아니고, 또 내가 잘해주고 싶은 사람에게 잘해주는 방법도 ‘모르면 배우고 익혀가야’ 하는 거잖아.
나가서, 만나서, 부딪히면서 배워. 안 배우면 이 추운데 막 ‘너 걷는 거 좋아하지? 나도.’ 이러면서 상대 발가락 동상 걸리는 것도 모르고 걸으려 하거나, 핫팩 하나 사서 쥐어줄 줄도 모르거나, 어디 가서 뭘 먹어야 할지도 잘 모르니 맨날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거나, 노량진 새벽시장 가서 방어 사다가 해체쇼도 못 보여주게 돼. 방어 해체쇼는 좀 이상하니 생략하기로 하고, 아무튼 내가 상대에게 뭘 해줄 수 있는지, 또는 같이 뭘 할 건지도 전부 머릿속에만 막연하게 둔 채 ‘진정한 사랑’, ‘운명 같은 사랑’ 만이 시작되길 바랄 수 있으니, 그런 건 내년 연말쯤 한다 생각하며 다 접어두곤 좋은 친구랑 만나서 놀 듯 함께해 봐.
첫 연애, 첫사랑, 짝사랑, 기회, 영원, 운명 그런 거 다 내려놔. 상대와 닮은 누군가가 지금 눈에 띄어 어쩌고 하는 소리도 하지 마. 꿩에게 아무것도 못 한 걸 왜 치킨한테 대신하려 그래. 그러다 막 두 마리 치킨의 레벨까지 간 선배대원들도 있는데, 병이 다시 도져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너와 닮은 사람에 대한 내 아픈 기억이 있어서, 그래서 사실 너에게 다가갔던 거라고. 하지만 네가 그 사람이 아니듯, 내 마음도 다른 것 같다고. 그러곤 돌아와 확인해보니 차단 당했네요. 하지만 뒤늦게 알았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건 이 사람이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까지 있었어. 그러지 말고, 일단 현실에 발 딛고 지금 연락 가능하며 만날 수 있는 사람과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가꿔가. 혼자만의 생각과 의미부여 하느라 허송세월하거나 있던 기회마저 다 지나 보낸 건 지금까지로 충분하니, 폰 밖에서 잃어버렸을 때만큼이라도 밖에 나가 절실한 마음으로 뭔갈 해보자고. 그 정도의 행동력과 용기는 있어야 붕장어를 잡을 수 있는 거라는 걸 잊지 말길 바라며(응?), 오늘은 여기까지.
▼ 칼이 사고 싶어진다. 사시미, 데바…. 무쇠칼, 도마 위에서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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