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사연 몇 편을 열심히 읽었지만 결국 매뉴얼로는 발행할 수 없어, 이 글을 먼저 적을까 한다.
사연을 보낼 때에는 이렇게 생각하자. 교통사고가 난 거고, 현장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내게 의뢰한 거다. 그럼 내게 전달하거나 말해줘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면 아래 보기를 보고 생각해 보자.
① 사고 당시와 전후장면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
② 어린 시절부터 알던 친구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는 진술.
③ 사고가 나려고 했던 건지, 사고 전 날 꿈자리가 이상했었다는 진술.
④ 상대가 사고 직전 계속해서 위협운전을 했었다는 진술.
⑤ 사고로 인한 충격으로 아직까지 무섭고 온 몸이 아프다는 진술.
주입식 교육과 객관식 선택평가의 폐해로 인해 저 보기 중 정답 한두 개만을 고르려는 분들이 있을 텐데, 전부 다 정답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 이야기를 적는 동안 마음이 조금이라도 정돈되고 잔잔해질 수 있다면, 그 어떤 얘기라도 적어 보내주시면 된다.
그런데 ①번과 ④번 항목을 빼고 나머지 이야기들만 넘치도록 적어주시면, 나는
"아 그렇습니까? 참 힘드셨겠습니다."
라는 리액션 말고는 딱히 드릴 말씀이 없다. 바로 직전에 읽은 사연도 그 분량이 꽤 많았는데, 다 읽는 동안 둘의 실질적인 갈등에 대한 문장은
"남자친구가 더 이상은 힘들기 싫다면서 헤어지자는 통보를 했고…."
라는 문장이 전부였다. 그가 무엇이 어떻게 힘들다고 말한 건지, 이쪽이 생각하기엔 이쪽의 어떤 부분들 때문에 상대가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 같은지를 내게 말해줘야 하는 건데, 안타깝게도 사연을 주신 분께서는 "그동안은 정말 죽을 것 같았는데, 어제 남친 보내고 나는 꿈을 꾸고 났더니 거짓말처럼 지금은 덤덤해졌네요."라며 꿈 얘기를 적어주셨다. 그럼 난 또,
"아 그렇습니까? REM수면 좀 하셨나 봅니다."
라는 반응 말고는 해드릴 게 없는데 말이다. 겨우 그 정도만 말씀해 주시고선 "솔직히 전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요."라고 하시면, 나는…. 정성스레 적어주신 사연이라는 게 눈에 보이고, 또 노멀로그에 대한 애정도 가득하시다는 것 역시 느껴지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생략하신 까닭에 매뉴얼로 다룰 수 없다는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다.
서두가 너무 길어진 것 같다. 이쯤에서 자르고, 연휴 첫 날의 매뉴얼 출발해 보자.
1. 다가오는 썸남도 놓치고 마는 여자, 문제는?
지영씨 혹시 남산 살아? 철갑을 두르는 솜씨가 아주 그냥 남산 위의 저 소나무 급이네. 난 지영씨가 이 사연을 정말 궁금해서 보낸 건지, 아니면 자랑하려고 보낸 건지 잘 모르겠어.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내 조카도, 같은 반 남자애가
"너 고등학교 어디로 가? 거기 가도 학원 계속 이 동네로 다닐 거야?"
라는 질문을 하면 관심 있어서 묻는 거라는 거 바로 알거든.
그런데 지영씨는 상대랑 영화도 보고, 전시회도 보고, 또 놀이동산도 다녀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지영씨에게 마음이 있는 건지를 묻고 있어. 지영씨가 이 '고민'을 친구들에게 털어 놓았을 때 친구들이 짜증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야. 지영씨 친구들의 입장에선 자기들은 배고파 죽겠는데 지영씨가 소화 안 된다고 징징거리는 느낌일 테니까. 물론 지영씨는 지영씨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는 거겠지만,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더는 '배불러서 고민'이라는 걸 털어 놓지 말고, 지금부터 내가 권해주는 걸 해봐.
ⓐ 사준다고 할 때 받기.(받고서 이쪽도 선물로 보답하면 됨.)
ⓑ 어느 쪽으로 가자고 할 때 상대 옷소매라도 잡아보기.
ⓒ 바래다준다고 하면 고맙다고 말하고, 커피라도 한 잔 사주기.
ⓓ 가방을 들어준다고 하면 사양 말고 가방 건네주기.
ⓔ 보답을 핑계로 먼저 만남 제안하기.(보답을 위해 만날 땐 예약이나 예매하기.)
상대의 친절이나 호의를 너무 거절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야. 그것도 "고맙지만, 괜찮습니다."라며 사양하는 게 아니라,
"이걸 나한테 왜 사주려고 해요? 왜? 됐어요. 이걸 오빠가 나한테 왜?"
라며 정색하고 거절하면 상대는 무안해지거나 시무룩해질 수 있어. 그러니 호의든 친절이든 선물이든 대접이든 일단 받아. 그거 받고 이쪽에서도 또 상대에게 주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뭔가가 오갈 때 사랑이 싹트는 거지, 지금의 지영씨처럼
"남자친구도 아닌데 오빠가 왜?"
라며 문부터 걸어 잠그면, 상대는 머쓱해져서 발걸음을 돌릴 수 있어.
그리고 너무 상대를 관찰만 하진 마. '이러이러할 땐 호감 있는 거 같더니 먼저 연락을 안 하네?', '같이 영화나 공연 보러 다니면서도 아무 스킨십이 없네?' 라는 생각만 하고 있지 말고, 먼저 좀 상대 옷소매도 잡고 그래. 같이 영화보러 갔을 땐 로보트처럼 내 팝콘 내 음료만 먹고 있지 말고, 상대에게 갈릭팝콘 먹어보라고 내밀거나 오징어도 좀 찢어주고 말이야.
상대가 지영씨에게
"일 년 간 내가 본 너는, 너무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아."
라는 말을 한 건, 지영씨가 이것도 사양하고 저것도 사양하기 때문이야. 상대가 지영씨를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한 건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데, 지영씨는 '지금 이 사람이 날 데려다 주면 왔다갔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라는 판단을 하곤 어떻게든 거절하거든.
그러지 말고 그가 보호본능을 발휘하고 싶어 할 때는 발휘하도록 좀 그냥 둬. 이렇게 생각해 봐. 지영씨가 이번 설 연휴 끝나고 부모님 전신 안마를 받게 해드리려고 했어. 그래서 예약까지 다 해놨는데, 지영씨 어머니께서 "됐다. 난 그런 거 필요 없다. 너 받아라. 그런 거 하느라 돈 쓰지 마라. 난 괜찮다."라며 극구 거절을 하셨어. 그럼 지영씨는 돈이 굳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까, 아니면 어머니의 세찬 거절이 좀 씁쓸하고 안타깝게 느껴질까?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울 거잖아. 그러니까 그가 뭘 한다고 하면, 예의상 한 번 정도 살짝만 거절하고 그 다음부터는 하게 둬. 감사 인사나 감사의 표시를 하면 되는 거야. 지금처럼 됐으니까 가라고 떠밀 게 아니라.
끝으로 하나 더. 지영씨는 "남자가 여자 가방 들고 다니는 게 제일 꼴 보기 싫어서…."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 그게 너무 싫어서 그에게 가방을 안 주려 했던 거라면, 그럴 땐 '다른 것'으로 부탁하며 주의를 돌려봐. "가방은 정말 하나도 안 무거워. 괜찮아. 대신 나 아이스크림 사줘."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를 머쓱하게 만들지 않고도 거절할 수 있을 거야. 썸을 타며 발생하는 모든 일을 너무 고지식하게 생각하거나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그가 보여주려 하는 세계도 한 번 경험해 본다는 생각으로 임해봐. 그럼 잘 될 거야.
2. 여행가이드와의 불같은 썸, 일주일 후 연락두절.
캡쳐한 카톡화면을 하나하나 가로로 된 A4용지에 네 개씩 붙여 주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노고를 생각해 저도 파일 전부 다운 받고 하나씩 열어가며 모두 읽었습니다. 파일 개수 보고 닫으려고 했다가, 그래도 이렇게 정성들여 붙이셨을 걸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컴퓨터에는 '파일 압축'이라는 좋은 기능이 있다는 걸 먼저 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자체 내장되어 있기도 하고, 많이들 쓰는 '알집'이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해서도 압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수십 개의 파일을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J양이 파일을 보내실 때에는 그냥 전부 선택한 뒤 드래그를 하면 되었겠지만, 그걸 제가 받고 나면 '대용량 첨부파일'에 딱 걸려버립니다. 그럼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한꺼번에 내려 받기'가 안 되고 파일을 하나하나 클릭해서 내려 받아야 합니다. 메일서비스를 왜 이따위로 만들어 두었는진 모르겠는데, 여하튼 파일 수십 개를 하나하나 클릭해 저장해야 하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차라리 개별 이미지로 전부 보내주셨으면 마우스 휠을 돌려가며 차례로 볼 수 있었을 텐데, 그걸 또 J양 역시 고생하며 워드파일에 붙여두신 까닭에, 저 역시 캡쳐 대화 네 개 읽곤 다음 창 열어 확인하고 또 그 다음 창 열어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J양을 탓하려는 건 아니고, 나중에 또 이렇게 사연을 보내시거나 아니면 사연을 보내려는 다른 분들이 이렇게 보내실까봐 적어두는 거니 심려치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사연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해외 여행지에서의 후광이 한국에 돌아와 벗겨지는 것은, 둘 모두 다 한국에 돌아와 만났을 때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J양의 경우처럼 한 사람만 귀국했을 때가 아니라 말입니다. J양은
"그런 감정이 한국에 돌아와도 사라지지 않았기에,
전 그래서 더 이 사람과 길게 만나볼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라고 하셨는데, 둘의 만남에 장애가 되는 물리적인 한계는 감정의 촉매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저희 동네에 맥도널드가 없는 까닭에 제가 빅맥 런치세트를 더 먹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응?) 이전에 살던 곳엔 바로 앞에 맥도널드가 있었는데, 그땐 런치세트를 애용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동네에 없던 버거킹 와퍼를 먹고 싶어 했습니다. 여하튼 전, J양이 귀국할 때 상대도 같이 귀국했다면 J양의 감정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 그가 J양에게 베풀었던 것들은, 그게 그의 '업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J양은 같이 여행 간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가 유독 J양에게만 그랬다는 말로 부정하려 하실 텐데,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여행객의 90%가 아저씨 아주머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일단 그 분들을 제외하면, 두세 명 정도의 '또래'가 남습니다. 그러면 상대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제일 곁을 많이 주는 사람, 또는 계속 근처에 있게 되는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유적지에 갔을 때 저 멀리까지 다니며 구경하는 사람이 아닌, 바로 옆에서 대화를 하게 되는 사람의 사진을 더 찍어주게 되는 당연한 일이고 말입니다.
허용된 지면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빙빙 돌지 않고 좀 더 질러가도 괜찮겠습니까? 이 관계는 100% J양의 판타지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카톡대화를 봐도 그는 자신의 일과를 조금 말해주거나, 스트레스 받은 일을 말해주거나, J양이 애정표현을 하면 고맙다는 반응 정도를 했을 뿐입니다. 상대에게서 로미오가 줄리엣의 집 벽을 타고 올라갈 때 보였던 그런 열정이 드러난다면 저도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꾼 것 같다고 말했을 겁니다. 그런데 둘의 대화에선 전혀 그런 열정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J양 혼자서만 하얗게 불태웠을 뿐이기에, 전 J양이 혼자 '줄리엣 놀이'를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 갑자기 그가 잠수를 탔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둘의 대화가 대부분 'J양의 애정표현'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J양 역시 그 사람을 겨우 이틀 만나보고 이야기를 제게 전하는 거라 우린 그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도 확실히 모르지 않습니까? 상상하자면, 연락이 자유롭지 않은 것과 그가 날짜에 집착했던 것으로 보아 혹 현지에 가정이 있거나 아니면 사귀는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 J양이 진짜로 그 부근으로 가서 직장을 잡을 생각을 하자 그가 말리는 것을 보면, 그는 이 관계를 가볍게 생각하는데 J양이 의미를 부여하고 일을 크게 벌이려는 것 같아 겁이 났을 수도 있고 말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만을 하고 있자면 끝이 없을 테니, J양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이 관계는 그만 내려놓으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엔 J양에게 연애와 관련해 걸림돌이 될 만한 모습들이 좀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다음 썸이나 연애에서도 반드시 문제가 될 테니 그때 다시 한 번 사연을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원래 오늘 세 편의 사연을 다루려고 했는데, 세 번째 사연으로 매뉴얼을 쓰다가 수위가 너무 높은 것 같아서 일단 다른 곳에 저장해 두었다. 이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공개하도록 하자.
연휴 첫 날이다. 내 계획은 연휴와 관계없이 밀린 사연들을 다루는 것인데, 블로그 스킨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지 않아서 계속 웹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배우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연휴 중 또 블로그 스킨에 손을 대 레이아웃이 깨지거나 블로그가 먹통이 될 수 있는데, 그래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마시고 이상이 있을 경우 내게 살짝 톡 하나만 보내주시길 부탁드린다.
자 그럼, 다들 즐거운 연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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