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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5)

상냥하고 친절한 의사를 짝사랑하게 된 여자 외 1편

by 무한 2015. 3. 25.

의사 얘기가 나오니 생각나는데, 내겐 올해 '역대급 불친절 의사'를 만나는 행운이 있었다. 불친절해서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불친절에 오히려 흥미가 느껴질 정도의 의사였다.

 

깔끔한 차림새와 단정한 외모 때문에 연세를 가늠하기 힘들긴 한데, 예순 전후이신 것 같았다. 보건소에서 근무하시는 분이셨고, 내가 진료실로 인사를 하며 들어가자

 

'또 왜 갑자기 환자가 와서 날 귀찮게 하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대답 없이 (내가 들고 있던 기록표를 받기 위해)손만 내미시는 게 인상 깊었다. 그 분은 내 기록표를 보시고는

 

"어렸을 때 안 맞았어요?"

 

하는 질문을 하셨다. 난 내과에 갔다가 우연히 B형 간염 항체가 없는 걸 발견하곤 보건소에 접종하러 갔던 것이었는데, 그 분은

 

'얘는 왜 어렸을 때 예방접종을 안 맞아서 오늘날 이 시점에 날 귀찮게 하나?'

 

하는 뉘앙스로 말씀을 하신 거였다. 그러고는 "항체 생성을 위해 3차 접종을 할 것이며, 1차와 2차는 한 달 간격으로 맞고 3차는 2차를 맞은 후 다섯 달 후에 맞게 될 것. 접종을 모두 마친다고 해서 무조건 항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 접종이 끝난 후 검사를 할 것."이라는 얘기를 거짓말 좀 보태 3초 만에 혼잣말처럼 해버리셨다. 난 당시 치과치료도 함께 받고 있어서 접종 당일에 사랑니를 빼도 괜찮은지를 여쭈어 봤는데, 그 분은

 

'얘가 또 날 말 한 마디 더 하게 만드네.'

 

라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네."라고 짧게 대답해 주셨다. 난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난 진료에 어리둥절해 머뭇거렸는데, 그러자 그 분은 어서 주사실로 가버리라는 듯 기록표를 내게 다시 주셨다. 그러면서

 

"2차는 언제?"

 

라고 기습질문을 하셨는데, 내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몰라 "네?"라고 하자.

 

"한 달 뒤에. 잘 알고 있는지 내가 테스트 해본 거."

 

라고 하셨다. 2차 접종 맞으러 갔을 땐 내 앞 사람이 여자였다. 그 여자 분과는 5분 넘게 대화하시는 것 같던데, 나랑은 2차 때도 15초 남짓의 대화를 했다. 뭐, 원래 남자끼리는 말 오래하고 그러는 거 아니니까.(응?) 이거 서두가 너무 길어졌다. 여기서 자르고 바로 출발해 보자.

 

 

1. 상냥하고 친절한 의사를 짝사랑하게 된 여자.

 

사실 이건 매뉴얼로 다루기 어려울 정도로 '아무 것도 없는' 사연이다. 비유하자면, 어느 방송 공개 방청 갔는데 녹화 끝나고 연예인이 싸인 해줬다며 "그 연예인이랑 잘 될 수 있는 방법 없을까요?" 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매뉴얼로 옮기는 건, 사연을 보낸 N양이 서른을 코앞에 둔 모태솔로이기 때문이라는 걸 밝힌다.

 

먼저, N양의 분석은 아무 의미 없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 다른 의사들은 약 처방만 하는데 이 의사는 친절히 상담해줬다.

- 비용문제로 걱정하자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 그가 개인병원을 추천해 준 건 좀 부정적인 모습이다.

- 급하게 퇴원을 해서 그가 좀 쌩해진 것 같은 느낌도 있다.

- 그의 미남계에 내가 홀린 것 같은데 이대로 잊긴 아쉽다.

 

짝사랑 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전형적인 쉐도우 복싱의 모습이다. 그 의사에게 N양은 '많은 환자, 또는 보호자들 중 한 사람'인데, N양은 자신이 상대를 생각하는 것처럼 상대 역시 N양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할 거라 살짝 착각하고 있다.

 

여기까진 뭐,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짝사랑 중에서도 '상상연애'로 변이가 일어나는 좀 위험한 경우들이 있는데, N양의 짝사랑이 바로 그 위험군에 속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내가 ~해서 그가 ~한 것 같다."

 

라며 짐작을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게 정말 '짐작' 정도로만 끝나면 다행이지만, 그러다 그걸 사실이라 믿으며 '다음 짐작'을 하는 이상한 모습으로 변하게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상대의 감정은 'N양과의 관계' 외의 수백 만 가지 이유들로 변할 수 있다. 그가 N양을 마주하기 전 진상이 환자가 그를 짜증나게 했으면 그는 N양과 관계없이 짜증이 나 있을 수 있고, 친구에게 좋은 소식을 들었으면 역시 N양과는 아무 관계없이 그냥 기쁠 수 있다. 그런데 '상상연애'를 시작하는 경우엔 상대의 감정변화가 모두 이쪽과 관련이 있을 거라 여기는 일이 벌어진다. 내게 도착하는 상상연애의 사연만 보더라도, 이쪽의 근거 없는 짐작을 사실이라 믿어버린 까닭에 상대가 알아듣지 못 할 소리를 이쪽에서 선문답처럼 하거나, 상대는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이쪽에선

 

"그것 때문에 지금 이런다는 거, 저도 알아요."

 

따위의 괴상한 말을 하는 사례들이 있다.

 

N양의 사연에서 저런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난 것도 아니고, 또 이게 보통의 사연들보다 짧은 사연이라 이건 그저 내가 '자라 보고 놀라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모습'일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부분들에 더해 '미남계에 홀린 것 같고'라는 부분 같은 걸 보면, '상상연애'를 하는 대원들이 "상대가 먼저 내게 여지를 남겼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아무래도 좀 비슷해 보인다. 타로점을 봤는데 좋은 점괘가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여하튼, 둘 중 어느 것이든 현실에 발 딛지 않고 짐작과 상상으로만 하는 것들일 뿐이니, 상대가 직접 본인 입으로 말을 하거나 문자로 남기는 것들이 아닌 이상 혼자서 큰 의미를 부여하진 말길 권한다.

 

이제 퇴원해서 만날 일 없는데 어쩌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전에 친절하게 상담해 준 것이 너무 고마워 빵을 좀 사왔다며 그렇게 빵 사들고 가면 된다는 답을 드리고 싶다. N양이 말한 '의학상담 요청'이나 '개인적으로 좀 알아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의 경우, 전자는 그냥 민폐가 될 수 있고 후자는 너무 다짜고짜일 수 있다. 고마워서 빵 사왔다고 하는데 "알았으니까 거기 두고 나가세요." 할 사람은 없으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시도해 보길 바란다. 난 개인적으로 피자치즈와 소시지가 들어간 빵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한다.

 

 

2. 다른 곳으로 발령 받아 심남이를 두고 떠나는데….

 

안녕 독희씨. 내가 '독희'씨라고 부르기로 한 건, 독희씨에게 약간의 독희병(도끼병)이 있기 때문이야. 독희씨에게 심남이가

 

"독희씨 정말 예뻐요."

 

같은 이야기를 한 적 없어서 독희씨는 시무룩해졌다고 했잖아. 음, 일단 복근에 힘 꽉 줘 봐봐. 힘 꽉 줬어? 그건 독희씨가 '정말 예쁘지'는 않기 때문이야. 그리고 상대에게 독희씨가 커피 마시러 놀라오라고 하자 상대가 매일 온다고 했는데, 그건 그냥 심심하던 차에 '수다 친구'가 생겨서 매일 오는 것일 수 있어. 독희씨도 상대 사무실 매일 찾아가서 얘기한다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독희씨에게 상처주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현재 독희씨의 기대치가 너무 높기 때문이야. 기대치가 높은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독희씨에겐 속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겉으로는 기다리기만 하는 단점이 있거든. 왜 속으로는 내심 바라면서 겉으로는 "에이, 아니야. 됐어. 괜찮아."하는 거 있잖아. 그러지 말고 그냥 눈앞에 놓여져 있는 기회를 매일 조금씩 차곡차곡 주워 담으면 되는 건데, 독희씨는 '나중에 저거 다 주울 수 있겠지?'하며 오히려 마음을 더 숨기고 있어.

 

"상대와 데이트 해 본 적은 없지만, 음, 데이트 한다면 밥은 네가 커피는 내가 뭐 이런 식으로 해야죠! ㅎㅎㅎ"

 

시간 되면 나중에 김칫국 레시피 좀 알려줘. 난 독희씨가 마시는 것만 봤는데도 참 시원할 것 같아. 그 김칫국. 이러면 안 되는 거거든. 지금까지 매일 얼굴 보며 더 가까워질 계기가 있었는데, 독희씨는 그 기회는 다 놓친 채 다른 곳으로 발령 받아 옮기게 되고 나서야 '한 방'을 날리려고 하잖아.

 

"오빠 정말 제 스타일이신 것 같아요. 계속 지켜봤는데 좋으신 분 같아요. 부담스럽지 않으시다면 전화번호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라는 살짝 무서운 고백을 하겠다면서 말이야. "지금까지 자네를 쭉 지켜봐왔네. 자네, 내 남자친구 할 생각 없는가?"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상황을 딱 봐봐. 상대가 커피 좋아하지? 집에서 커피 내려 마실 정도로 마니아지? 그러면 독희씨도 앞으로 집에서 커피 내려 마시고 싶다고 일단 말을 꺼내. 그럼 그 분야가 상대 관심사니까 당연히 관심을 보일 거잖아. 거기까지 끌어냈으면, 그 다음엔 상대에게 독희씨가 봐 둔 분쇄기랑 커피메이커가 있다고 말을 해. 그리고 그 제품들 사진을 카톡으로 보낼 테니 좀 봐줄 수 있냐고 물어보고. 이러면 상대 연락처는 바로 손에 들어온 거잖아. 그러고 나서 상대가 독희씨가 보낸 것들에 대해 조언을 해주면, 감사하니까 초코케이크 사겠다고 하면서 만나는 거야. 어때? 이게 "지금까지 자네를 쭉 지켜봐왔네."보다 나을 것 같지 않아?

 

그런데 독희씨가 이런 방법을 사용할 경우, 문제가 하나 생길 수 있긴 해. 독희씨는 상대의 마음을 얼른 알아보고 싶은 생각에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 없으세요? 혹시 저희 회사 A직원을…."

 

같은 이야기를 해 상황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거든. 상대 마음 떠보려다가 오히려 치명상을 입는 거야. 그러니 그간 매뉴얼로 몇 번 이야기 했듯 '연애'나 '다른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싹 접어두고, 그 외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 후기는 메일로 보내줘!

 

 

오늘은 이상하게 축축 늘어지는 날이라 배웅 글은 생략할까 한다. 사실 난 조금 전까지 오늘이 목요일인 줄 알고 내일 불금을 맞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갑자기 혼자 있고 싶어진다. 치킨으로 충전해야겠다. 즐거운 수요일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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