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화 된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활 속에서 관찰한 결과 고지식한 사람들의 외국어 습득 속도가 늦은 걸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또, 남을 많이 의식할수록 외국어로 말하는 것에 겁을 먹을 확률이 높은 것도 여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A라는 외국인이 있습니다. 그는 고지식하며 남을 많이 의식하는 타입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에게 문장을 하나 줍니다.
"그는 밤에 말을 타고 가며 밤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
원어민인 우리는 저 말을 아무 고민 없이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A는 저 문장을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 첫 번째 '밤'과 두 번째 '밤'의 의미가 다른 것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 '말' 역시 두 번 나오는데 그 의미가 다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 저녁을 상징하는 밤은 짧은 소리, 그리고 타는 말 역시 짧은 소리다. 먹는 밤은 길게 소리 내야 하고, 사람이 하는 말 역시 길게 소리 내야 한다. 그럼 내가 저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A의 고민을 들으니, 갑자기 우리까지 자신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저도 A와 같은 고민을 했던 게 생각납니다. 'go-went-gone'같은 건 모양이 다르게 변해서 알 수 있지만, 'hit-hit-hit'같은 건 다 똑같이 생겨서 대체 이게 문장에 나오면 과거인지 현재인지도 모르는 것 아니냐는 고민 말입니다. 당시 영어선생님께 질문했더니
"일단 그냥 외워. 하다보면 다 알아."
라는 대답을 하셨는데, 그땐 그게 참 성의 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하다보면 다 알아'라는 말은 참 짧고 간단한 진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생각이 너무 많아 썸도 타기 힘든 여자.
T양이 연애를 대하는 자세가, A라는 외국인이 한국어 배울 때의 자세와 비슷합니다. 가야 할 길이 천리 길인데, 이제 겨우 30미터 걸어와 놓고는
"정말 이 길을 걸어오는 게 너무 힘들었어."
라는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랄까요. 그게, T양이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이 잡듯이 훑으며 걸어가니까 힘든 겁니다. 지난달쯤 제가 어느 매뉴얼에서 이야기 한 적 있지 않습니까? 보통의 사람들은
- 1, 2, 3, 4, 5….
이렇게 사는데, 그것과 달리
- 1.1, 1.2, 1.3, 1.4, 1.5….
이렇게 사시는 분들이 있다고. T양이 그런 유형에 해당됩니다. T양은
"정말 이런 뻔한 연애의 루틴에 저는 해당 안 될 줄 알았는데…."
라고 하시는데,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그게 전부 특별하고 더 숭고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남들이 자유로에서 시속 90km로 달리는데, 나 혼자 시속 50km로 달린다고 해서 남들은 뻔하고 난 특별한 건 아니잖습니까?
예상과 짐작과 추측에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계신 게 아닌지를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T양 스스로도 이 부분을 알고 계신 듯,
"그에게 물어봐서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사실을 알기 두려워서 가만히 있는 거. 그게 지금 제 상태에요."
라고 하시는데, 그럼 이 사연은 제가 아니라 점쟁이에게 가야 합니다. 저는 할 말이 없지만, 점쟁이는
"지금은 안 좋고, 6월이 길하네. 근데 다른 여자가 하나 더 있어."
라는 이야기라도 해주지 않겠습니까? 같이 쉐도우 복싱할 파트너로는 점쟁이만한 사람이 없으니, 실체 없는 불안과 예상, 짐작, 추측을 나눌 목적이라면 점쟁이를 찾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면허를 따기 전, 우회전 하다 보도의 연석을 밟고 지나가는 운전자를 보며 운전을 참 못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보도와는 좀 떨어져서 틀어야 하는데, 자신의 바로 앞만 본 운전자는 우측 뒷바퀴가 보도 쪽으로 올라탈 거란 생각을 못 했던 겁니다. 그런데 제가 면허를 따기 위해 운전을 해보니, 공간지각이 문제가 아니라 주차는 말 할 것도 없고 도로에서 끼어들 타이밍도 못 잡는 것부터가 문제였습니다. 3차선으로 가서 우회전을 해야 하는데 뒤에서 차가 계속 와 그냥 직진만 한 적도 있습니다. 이렇듯 T양도, 아직 면허가 없는 상황에서 그저 '난 저 사람들보다 더 잘 할 수 있어.'라고 생각만 했던 건 아닌지 한 번 돌아보시길 권합니다. 그저 보며 상상하는 것과 직접 해보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니 말입니다.
삶을 촘촘하게 살든 띄엄띄엄 살든 그건 본인의 자유입니다만, 어떻게 살든간에 지금과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면 일단 차를 몰고 도로에 나와야 합니다. 그렇게 나와 도로에서 실제로 겪게 되는 문제에 그때그때 대응해야 하는 거지, 그저 이미지 트레이닝만 하며 '도로에서 겪게 되는 101가지 문제'를 상상해 보는 건 직접 차 몰고 신호등 하나 지나는 것보다도 의미 없는 일입니다.
전 얼마 전, 잃어버린 줄 알았던 '모니터 캘리브레이션 장비'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 장비를 그냥 쓸 수는 없고, 장비를 만든 회사에 전화해서 고유번호를 불러준 후 일련번호를 받아야 합니다. 예전에 그렇게 썼던 기억이 납니다. 일련번호가 원래 박스에 동봉되어 있는데, 현재 박스는 분실한 상태라 직접 회사에 전화해 받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그 회사에 전화하면, 그 회사에서 일련번호를 불러줄까요? 불러 줄 거라 어떻게 확신하죠? 안 불러주면 어떻게 하죠? 혹시 그동안 안 써서 기계가 고장 나진 않았을까요? 제가 전화했는데 그 회사가 이제 더는 운영하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제가 T양의 사연을 읽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를, 이제 좀 알 것 같지 않으십니까? 본인이 보낸 신청서를 다시 한 번 보며, 예상과 추측과 짐작인 부분에 빨간색을 입혀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80% 이상일 그 빨간색이, 50% 미만으로 떨어지길 전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2. 만나자고 하면 바쁘다는 그녀, 어떡하죠?
혹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런 곳에서 구박 받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검색만 해도 금방 알 수 있는 걸 찾아보지도 않고 묻는 사람입니다. 휴대폰 커뮤니티에 가입해
"SK 고객센터 전화번호 뭐죠?(냉무)"
따위의 글을 올리는 사람 말입니다. 저런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많은지, lmgtfy.com 이라는 웹사이트까지 만들어졌을 정도입니다. 저 사이트 주소는
- Let me google that for you.(내가 널 위해 구글 해주마!)
의 약자입니다. '내가 널 위해 대신 검색해주마!'라는 뜻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N군의 사연을 읽고 저는 힘이 쭉 빠졌습니다. 당장 최근 게시물에 있는 글 몇 개만 읽어도 본인의 문제를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그걸 전혀 읽지 않고 그냥 사연부터 보내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게다가 N군은 신청서 곳곳을 빈칸으로 두었고, '한 번', '모르겠음' 등의 단어로 참 성의 없이 신청서를 작성했습니다. 대충 막연하게 써서 보낸 까닭에 읽는 저 역시도 그냥 막연한 대답만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말입니다.
N군이 대충 칸을 채워 보낸 것 가지고 불평을 하려고 이런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런 얘기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건 참 아까운 일이라, 보통 그런 생각이 드는 사연은 그냥 '패스'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N군의 사연을 다루는 건, N군이 사연을 보내는 태도의 문제가, N군과 상대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N군 - 너 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아?
상대 - 아니, 나 약속 있는데 ㅠㅠ
N군 - 그럼 금요일이나 일요일은?
상대 - 글쎄. 이번 주말 지나봐야 알 것 같은데. 주말 지나고 말해줄게.
N군 - 응. 그래그래.
(주말이 지난 직후)
N군 - 주말 지나고 말해준다더니.. 계속 바빠?
상대 - 응 ㅠㅠ 바쁠 것 같아. 담에 봐야 할 듯 ㅠㅠ
N군 - 그럼 어쩔 수 없이 다음에 봐야지 뭐. ㅜㅜ
상대 - 미안해 ㅠㅠ
N군 - 아냐 미안하긴. 내가 좀 닦달하는 것 같았다는 기분이 들었다면 미안하구.
N군이 하는 말들은 '냉무(내용無)'인 겁니다. 연락을 그저 시간 있냐는 걸 묻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수학처럼 명확하게, 함수나 방정식처럼 값을 안다면 좋을 텐데 그게 안 되니 어렵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수학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다만, 달랑 답만 구하는 게 아니라 '풀이과정'이며 '증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N군은 그걸 모두 생략한 채
"2번에 x는 81 맞나요?"
라는 이야기만 하는 거고 말입니다. 위의 대화에서, 요즘 어떻게 지내냐느니, 상대가 좋아한다던 가수 신보가 나온 건 들어봤냐느니, 새로 만난 사람들은 잘 대해주냐느니, 하는 것들을 물을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N군은 그걸 모두 생략한 채, 오로지 자신의 목적만을 위한 대화를 했습니다.
토요일에 만날 수 있는가? -> 아니요.
금요일이나 일요일은? -> 다음 주 되어봐야 앎.
다음 주가 되었다. 만날 수 있는가? -> 아니요.
저건 단순 계산인 산수입니다. 산수가 아닌 수학이라 생각하며, 차근차근 풀어가 보시길 권합니다. 문제는 이미 앞에 놓여 있고, 지금은 풀이과정을 적어나가야 할 때니 말입니다.
오늘은 오후에 새 연재 글을 하나 더 올려야 하니 마중글은 생략하도록 하자. 지루하면서도 무서운 치과치료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를 한 번 건드리면 전체 치아가 재배열 되는지, 아래쪽 사랑니에도 통증이 시작되었다. 2015년이 내게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쉽지 않다. 쉽지 않아. 이거 자동차 십만 킬로 타면 부속 한 번 싹 갈아줘야 하는 것 같은, 뭐 그런 건가? 아무튼 노멀로그 독자 분들은 아프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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