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쯤, 겨우 비빔면 따위로 끼니를 때우며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에 자존심이 상해 48시간쯤 절필을 했다. 그런데 어제 저녁 생각해보니, 그게 또 그렇게 자존심 상할 일은 아니라 기분 좋게 탕수육을 먹곤 다시 복귀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절망하고 다시 희망하는 사람이 작가라고 누가 그러던데, 이쯤 되면 나도 무늬는 작가와 좀 비슷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허튼 소리는 이쯤하고, 매뉴얼 출발해 보자.
1. 이별 통보 후 기회를 준다더니 방치해 두는 남친.
이런 남자와 연애할 시간에 차라리 붉은귀거북같은 걸 키우는 게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붉은귀거북은 한국 생태계를 파괴하는 교란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그래도 그 남자보다는 낫다. 붉은귀거북이 K양 몰래 만남어플 깔아가며 다른 여자 찾을 일 없을 거고, 여자 후배들에게 찝쩍대는 일 없을 것이며, 남자들끼리 놀러 가는 거라고 해놓곤 다른 여자 포함해 놀러가진 않을 테니 말이다.
미국 미시시피 계곡 부근에는
"붉은귀거북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
라는 속담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여하튼 또 뒤에서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는 남자와 만나면, 누구라도 집착의 늪에 빠지고 말 것이다. 특히 남자 중에서도 영악한 남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늘어놓는 궤변과 진실을 가장한 무책임에 걸려들면 십중팔구 바보가 되고 만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여자친구 있는 어떤 남자가, 남자끼리만 있다는 걸 증명하겠다며 시키지도 않은 동영상을 찍어 여자친구에게 보낸다. 그런데 그 동영상엔 분명 다른 여자 목소리도 포함되어 있다. 펜션 내에서 들리는 까닭에 지나가는 사람은 분명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걸 보니 같이 간 사람이다. 여자친구가 그걸 따지자, 그는
"내가 여기 여자가 있는데 미쳤다고 동영상을 찍어서 전송을 하겠냐. 불안해 할까봐 동영상까지 찍어서 보내줬는데도 넌 의심하는 거냐. 정말 지친다."
라고 대답한다. 사실 그 모임에는 여자도 둘 포함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이런 영악한 남자를 만나면, 눈 뜨고도 코를 베이게 된다. 훗날 남자의 친구 SNS를 돌아다니다 그 모임에 다른 여자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걸 발견해 내밀어도,
"걔는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나중에 잠깐 합류한 거다. 못 믿겠으면 같이 갔던 친구한테 전화해봐라."
라며 오리발만 내밀 것이다. 정말 확인하려 들면, 그 전화를 하는 순간 우린 끝이라느니, 이렇게 못 믿을 것 같으면 그냥 지금 끝내자느니 하는 이야기를 할 것이고 말이다.
이런 남자와 연애를 하며 '내가 의심병 환자인가? 정말 내가 못 믿어서 문제인 건가? 같이 있을 땐 그래도 그가 내게 잘 해주는데, 내가 망쳐가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이상한 게 아니니, K양은 너무 걱정 말길 바란다. K양 남친이 한 행동은 저것보다 수위가 살짝 낮기도 했고, 또 K양도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서 헤어질 것도 아니니 덮고 넘어갔지만, 그래봐야 오십 보 백 보이니 "제 남친이 저 정도까진 아니었는데요?"하며 헛된 희망을 갖진 말자.
더불어 K양 남친이 이별통보를 하며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난 지금 결혼할 생각 없는데, 결혼 할 나이인 너를 잡고 있을 수 없다. 또, 내가 지금 결혼하면 바람피울 것 같아서, 당장은 다른 여자들도 좀 만나보고 싶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그걸 '솔직한 모습'으로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저건 진실함과 솔직함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만 한 무책임일 뿐이다. 지금까진 K양이 저런 것도 그의 매력인 듯 생각하며 그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했지만, 이번엔
"그래. 그러는 게 나을 것 같다."
라며 덤덤하게 동의해줬으면 한다. 연애 극초반에 보인 남친의 태도를 보면 연애고 결혼이고 당장 '새로운 여자'가 필요한 사람 같았는데, K양도 그 모습을 보고 이별통보까지 했었지만 결국 그의 설득에 넘어가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중간 중간 위기의 순간에도 대부분 그가 설득하면 K양이 이해하며 넘어가는 모습들이 보이는데, '결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최소한의 긴장감도 없을 만큼 다 이해했던 건 아닌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길 권한다.
2. 똑똑한 그녀의 바보 같은 접근법.
남자를 짝사랑하게 되면 나이가 몇 살이든 새내기처럼 구는 사람들이 있다. 좀 더 강하게 비유하자면, 이제 막 교수가 된 남자에게 말을 거는 새내기 여대생처럼 구는 것이다. 상대가 하품을 해도 박수를 쳐주고, 둘 사이에 '넘사벽' 같은 게 존재하는 듯 필요 이상으로 고개를 숙이며, 칭찬 받을 만한 대답들을 하고, 유명인사를 인터뷰 하듯 질문을 한다.
주로 가방끈이 길고(오랜 기간 학교를 다녔고), 스스로에 대해 "대인관계가 좋은 편이다. 두루두루 친하다."라는 평가를 하는 대원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게 그녀들 나름의 '좋은 모습 보여주는 방법'인 것 같긴 한데,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어른들에게 이럴 경우 '똘똘하고 예의바른 아이'로 보이겠지만, 또래의 심남이에게 이래버리면 그의 오만을 살찌우거나 그냥 팬클럽으로 분류될 수 있다.
난 이런 태도의 원인을
- 얕고 넓은 대인관계를 맺는 것에 익숙해진 까닭에 깊은 관계를 맺기 어려워진 것.
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난 개인적으로 이런 대원들이 좋다. 그들은 예의 바르며, 듣기 좋은 말들을 해주고, 가끔씩 선물을 주기도 하며, 120%의 호의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 좋긴 한데, 거기서 더 친해지지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나눠도 '거래처 사람'의 느낌을 뿐 '동료' 정도로 가까워진 느낌은 안 든다고 할까. 서로 인간적인 면이 드러나는 대화도 좀 하고 어설프거나 편협한 모습도 공유했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대화가 교과서에 실어도 될만큼 바르며, 실수와 정정까지도 모범답안처럼 해버린다.
그들은, 내가 꼬꼬마시절 학교 선생님들의 눈에 들고 싶을 때 사용하던 방법을 사용한다. 사실 궁금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지만 질문을 만들어서라도 하며, 대답을 들으면 도를 깨우친 것처럼 과한 리액션을 하는 것이다. 내가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상대가 좋아할 걸 알기에 일부러 그 얘기를 꺼내기도 하고, 상대가 하는 이야기를 사실은 더 듣고 싶지 않음에도 더 해달라고 말한다. 이러면 어느 선까지는 금방 친해질 수 있지만, 마음 대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가 불가능하며, 늘 진심은 숨긴 채 가면을 쓰고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된다.
이 사연을 보낸 민희씨의 행동이 딱 저런데, 민희씨의 심남이인 상대도 만만찮다.
"넌 최고의 신붓감이다. 참 부지런하다. 대단하다. 너랑 얘기하면 재미있다. 넌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재능이 있다."
두 사람이 무슨 칭찬 배틀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로를 열심히 비행기 태워주며 마일리지만 적립하고 있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면 5월 1일의 카톡대화를 다시 한 번 보길 바란다. 20분 동안 민희씨는, 상대를 여섯 번 칭찬한다. 난 이게 '대화'보다는 '축사'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민희씨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민희씨는 여기서 더 가까워지지 않는 관계에 애를 태우며 '연락을 한 번 끊어보면 선톡이 올 것인가?'를 고민하는 중인데, 그건 아무 의미 없을 거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또, 민희씨는 얼마 후 심남이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지게 될 거라며 그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도 물었는데, 그것 역시 먼 것 보다는 낫겠지만 그게 저절로 마음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어주긴 어려울 거란 얘기도 해주고 싶다.
상대를 교수님이나 선생님같은 존재가 아닌, 그냥 같은 수업 듣는 동기라고 생각하자. 그럼 민희씨도 쩔쩔매며 상대의 강의나 설교 듣듯 "네, 맞습니다. 그럼요. 암요. 그렇지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하고 있을 일 없을 거고, 상대 역시 주례사 하듯 이러저러하게 살라고 열심히 얘기만 해주고 있진 않을 것이다. 마음 대 마음의 대화를 하기 위해선 먼저 동등한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되어야 하니, 민희씨가 신청서를 적은 것처럼 민희씨를 드러내고 민희씨의 감정들을 설명하며 대화하길 권한다. 지금 민희씨가 하는 행동들은 누굴 갖다 놔도 '모범답안'처럼 굴라고 주문하면 다 할 수 있는 것이니, 오늘부터는 가장 민희씨 다운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네 밤만 자고 나면 이제 유월도 끝이 난다. 그런데 아직 메일함 1페이지에는 읽지도 못한 사연들이 파란 제목을 단 채 개봉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부지런히 읽기도 바쁘니 마중글은 생략하자. 7월 전까지는 밤낮 구분 없이 최대한 많은 사연을 다루도록 하겠다. 그럼 다들 즐거운 금요일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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