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양과 남친의 연애는, 산소 호흡기를 차고 있는 관계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고시생인 S양의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는 의식이 없는 이 상태가 계속 될 것이 확실하며, 시험이 끝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험이 끝나기 전에 이 연애가 먼저 끝나게 될 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사연을 주신 S양도 이미 이 점을 피부로 느끼고 계신 듯
"다음에 연애를 할 때는, 어떤 점을 주의하면 좋을지 짚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말씀을 하시기에, 그 부분을 중점으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1. 고시공부와 연애.
자신만의 엄격한 규율을 세워 지키지 않는다면, 고시생활은 조급한 마음과 책임회피로 점철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거 저거 하다가 틀려버렸네. 내일은 열심히 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미루기만 한 까닭에, '내일'엔 할 일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 순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친척 언니 결혼식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공부해야 할 분량을 문제없이 소화했다면, 길어도 세 시간 정도인 토요일 결혼식에 참석하는 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공부가 안 되니까 쉬고, 내일은 방청소부터 해야 할 것 같아서 공부를 미루며, 수요일엔 형광펜과 노트 등 수험생활에 필요한 걸 재정비 한다는 핑계로 역시 공부를 미루면, 금요일쯤 가서는 결국 조급한 마음이 듭니다. 때문에
'친척언니 결혼식보다 내 인생이 더 중요한 거잖아?'
'왜 하필 지금 결혼하는 거지? 지금은 나한텐 정말 중요한 시기인데.'
'내 사정 아니까, 내가 결혼식에 참석 못 하는 것도 이해할 거야.'
'엄마 아빠는 딸이 지금 고시 준비 중인데, 무슨 결혼식에 데려가려는 거지?'
하는 생각들을 하며 괜히 분노하거나, 자신을 합리화 하는 것에 공을 들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방법으로 결혼식에 불참하더라도, 남는 시간엔 집중이 잘 안 된다는 핑계로 머리 식힌다며 미드 같은 걸 다운 받아서 볼 수 있고 말입니다.
더불어 고시공부를 할 땐, 대개 자신이 '잉여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공부하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고시생의 생활패턴은 백수와 꼭 닮아있는 까닭에, 남들은 다 제자리를 찾아 잘 살고 있는데 나만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또, 합격에 대한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 곁엔 늘 불안함이 있게 되고, 불합격 할 경우 주변 사람들이 혀를 차진 않을지에 대한 공포도 늘 존재합니다.
때문에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피처로의 '연애'를 택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오늘 공부가 안 된다고 얘기하면 상대가 내일 하면 된다며 위로해주고, 또 서로의 감정을 속삭일 때에는 고시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느낌이 드니, 자꾸 상대에게 기대려 들거나 위로를 받으려 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S양의 이번 연애가, 위에서 이야기 한 부분들 중 '좋지 않은 부분'들의 교집합이 되고 말았다고 생각합니다. 연애가 도피처의 기능을 발휘해 S양의 불안을 덜어주긴 했지만, 한편으론 연애에 할애되고 있는 시간이 S양을 합격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갈팡질팡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는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2. 미안한데, 다음에 보자?
S양과 남친의 대화를 잠시 보겠습니다.
1.
남친 - 오늘 우리 만나는 거지?
S양 - 너 피곤할 거 같은데
(잠시 침묵)
S양 - 괜찮겠어?
남친 - 난 괜찮은데
남친 - 넌 어때?
(역시 잠시 침묵)
S양 - 몇 시에 돼?
2.
S양 - 정말 미안한데, 나 오늘 몸 상태가 조금 안 좋은 것 같아.
S양 - 다음 주에 보면 안 될까?
(이후 S양 몸 상태에 대한 이야기 생략)
남친 - 그렇구나. 너 보려고 지금 가는 중이었는데 아쉽다.
S양 - 그러니까 내가 더 미안해 ㅠ.ㅠ 저녁때라도 시간 내서 잠시 볼까?
S양 - 나 때문에 무리해서 오는 거였는데.
남친 - 아냐. 아픈데 쉬어.
S양 - 정말 미안해서 어쩌지 ㅠ.ㅠ
3.
S양 - 정말 미안한데 우리 다음 주에 보면 안 될까?
S양 - 어제 얘기를 했어야 하는 건데 미안해 ㅠ.ㅠ
남친 - 다음주….
남친 - 왜?
(이후 한참 연락 없음.)
S양은 이런 부분들에 대해
"약속을 자주 취소하거나 변경한 것. 이 점은 제가 잘못한 겁니다."
라고 하셨는데, 이건 '이 점은'이라는 말 정도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몇 번씩이나 이랬다저랬다 하면, 그걸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만나기로 한 날 아침에, 또는 만나러 가는 와중에 "다음에 보면 안 될까?"라는 말을 들으면, 호구와트 졸업생이 아닌 이상 어떤 남자라도
'얘에게 나는 뭔가?'
'얘는 나와의 약속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가?'
'얘에겐 나와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변명같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고시공부를 하다보면 정말 어떤 날은 저도 감정이 오락가락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남자친구를 보면 더 힘들어질 것 같기도 하고 해서, 혼자 그냥 머리를 식힐 겸 약속을 미룬 적도 있습니다. 부모님 눈치가 보여 그런 적도 있고요."
어떤 사정이 있든, 무책임한 건 무책임한 겁니다. S양이 고시에 합격해 직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어느 날은 출근하면 더 힘들어질 것 같다고, 또 어느 날은 오늘 출근하면 월요병 같은 것에 시달려 능률도 안 오를 것 같다고 회사에 결근을 통보하면, 직장을 바로 잃게 되지 않겠습니까? 더도 말고, 딱 타인에게 지키는 예의만큼만 연인에게 지켜도 꽤 많은 문제들을 막을 수 있다는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3. 뭐뭐 해줬으면 좋겠어.
S양은 좀 이상한 방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남친에게 펜을 선물 받고 난 후 S양이 한 말을 보겠습니다.
"네가 준 펜으로 공부하니까 정말 공부 잘 된다. ㅋ 담에 또 사줘~"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경우라면,
"네가 준 펜으로 공부하니까 정말 공부 잘 된다. ㅋ 고마워~"
라는 멘트가 등장할 것입니다. 그런데 S양은 감사의 인사를 생략하고 어리광을 부리는 까닭에, 타인의 시각에서 보면 뻔뻔하고 이기적인 여자로 보입니다. 남친과의 대화에 나오는, S양의 말들을 몇 개 더 보겠습니다.
"재미있는 얘기 해줘~ 나 빨리 괜찮아지게!"
"자기야 열 시에 전화해 줄래? 나 자기 목소리 듣고 싶어."
"아침에 간단하게 굿모닝이라두 해줬으면 좋겠어."
저게 연인 사이에서 못 할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S양은 본인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약속을 변경하거나 취소하지 않습니까? 그런 와중에 바라는 것까지 많은 여자가 되어 버리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남친 입장에서 한번 이 연애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S양에게 빚을 지거나 죄를 진 것도 아닌데, S양의 남자친구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모진 고난을 겪어야 하지 않습니까? 고시생인 S양의 시간만 소중한 거 아니고, 고시생인 S양만 바라는 게 있는 건 아닌데 말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 S양이 한 말을 보겠습니다.
"분명한 건, 제가 슬프고 힘들었다는 겁니다. 구걸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싫었습니다. 저 혼자만 연애하는 것 같아서요. 저도 나름대로 이겨보려고 노력을 해봤지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원인제공을 한 건 S양입니다. 연애를 떠나서, S양을 만나러 오는 친구를 세 번 돌려보내면, 그 친구는 S양이 주말에 보자고 말해도 이제 믿지 않으며 무덤덤하게 반응할 것입니다. 약속을 해도 S양 기분에 따라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 있으니,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아무 기대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로 상처를 입은 친구라면, S양의 태도를 똑같이 흉내 내어 언제 한 번은 친구 쪽에서 약속을 취소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연과 카톡대화를 다 읽은 저는, 현재 S양의 남친에게 이 연애에 대한 기대나 애정이 전혀 없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S양의 태도 때문에 남친의 감정이 급속히 식어가는 중에도, S양은
S양 - 오늘 무슨 날이게?
남친 - 오늘?
남친 - 오늘…. 글쎄.
S양 - 나 시험 100일 남은 날이야.
S양 - 그냥 그렇다고 ㅎㅎㅎ
남친 - ㅋㅋㅋ 금방이네.
위와 같은 대화들을 이어갈 뿐이었습니다. 역시나 이 연애에 남친을 위한 자리는 없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는 대화 같지 않습니까?
"제가 며칠 전에는 남친에게 서운하다고, 저 힘들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남친은 어제 저녁에 일이 있다며 만나자는 약속을 미루기까지 했네요."
S양 본인이 그럴 땐 잘 몰랐지만 당해보니 짜증나지 않습니까? 바로 그 감정들을, 지금까지 남친은 계속 느껴왔던 겁니다.
둘의 대화 중에는, 남친이 S양을 떠보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서, S양은 실망스러운 대답을 하고 맙니다.
S양 - 오늘 자기 말이 없네~ 자기 보고 싶다~
남친 - 그럼 나 보러 올래?
S양 - ㅋㅋㅋ 가고 싶기는 하지만 못 가니 아쉽네.
S양 - 그 뜻은 아니고, 카톡이 없어서 그랬어 ㅠ.ㅠ
비겁한 변명입니다.(응?) 가서 만날 생각은 없으면서, 상대에게 연락 충실히 하라는 걸 요구하기 위해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건 연인 역할극일 뿐입니다. 남친 또한 이젠 그 역할극에 질려 "그래그래." 정도의 영혼 없는 대답만을 반복하고 있는데, 둘 다에게 시간과 감정의 낭비일 뿐인 이 연애는 얼른 그만두시길 저는 권하고 싶습니다.
"무한님은 남자친구와의 연락은 어디까지가 최소한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최소한 최대한 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적어도 상대에게 예고 없이 손편지 하나 쓸 정도의 마음은 있어야 그게 연인인 거고 연애인 것입니다. 그 마음이 있다면 '어디까지가 최소한' 같은 건 자연히 고민하지 않게 될 것이고 말입니다.
이 매뉴얼을 읽고 S양 마음의 변화가 있다면, 본인은 남친을 방치해두고 있으면서 남친 보고는 충성을 다하라고 했던 점에 대해 사과하시길 권합니다. 저는 이 관계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관계의 밭을 잘 일궈두면, 나중에 또 무엇을 심기에 적합한 형태가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에 시험 합격하시길 저는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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