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휴가를 마치고 어제 무사히 한국으로 복귀했다. 새벽 비행기로 들어온 까닭에 '잠을 안 잔 건 아니지만 잔 것 같지도 않은 몽롱한 상태' 속에 있긴 한데, 메일함을 열어보니 아우성 가득한 사연들이 줄을 서 있는 까닭에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왜 여행지에서 실시간으로 근황을 알려주지 않았냐고 물어 오시는 독자 분들이 계셨는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래 사진 한 장으로 대신할까 한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여행가자'였다. 여행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사진과 함께 풀어 놓기로 하고, 매뉴얼 시작해 보자.
1. 대부분의 커플이 겪는 변화.
사연의 주인공인 L양이 문제의 원인을
- 오빠가 아직 날 사랑하지만, 함께 현실을 헤쳐나갈 용기가 없어서.
라고 보는 것과 달리, 난 이 문제의 원인을
- 상대 입장에선 결혼을 '해줘야' 하는 거라서.
라고 본다.
둘의 연애 초반엔, 상대가 L양에 대해
- 절대 화도 안 내고, 항상 밝으며, 순종적이고, 착한 여자.
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건 연애 초반 누구나 상대에게 보여주게 되는 '최선의 친절과 호의'를 그가 'L양의 성격'으로 오해한 것이고, 연애의 기쁨에 들떠서 하는 말들이 전부 둘의 미래가 될 것 같은 착각이 작동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연인들이 그러하듯
"집은 이러이러하게 꾸미고, 아이는 이러이러하게 키우며, 우리는 여행 다니면서 살고…."
등의 이야기를 하며 막연한 기대에 젖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귀다 보니, L양은 '무욕의 여자'나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L양도 사람이니 감정과 욕심이 있는 게 당연한 건데, 그는 그런 모습들을 보며 L양 역시 '불만을 가질 수 있는 여자', '삐칠 수 있는 여자'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둘 다 기쁨에 들떠서 막연하게 구상했던 미래들이, 현실에선 뭐 하나 하기에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벽지는 뭐로 하고 가구는 뭐로 하자는 이야기들을 나눌 땐 좋았지만, 현실에서 통장을 보니 마이너스라 내 집 마련은커녕 당장 빚 갚기에도 벅찬 것이다. 이런 와중에 L양은 그가 했던 이야기들에 기대를 품은 채 "근데 우리 언제 결혼하는 거야?"라며 묻기 시작하니, 그로서는 그게 자신이 발행했던 수표들의 채무를 갚아야 할 시기가 온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오빠는 항상 제가 밝고 착해서, 배우자감임을 확신한다고 했어요."
상황이 좋을 때 서로 좋아하며 서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어려운 건 상황이 좋지 않을 때도 서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느냐는 건데, L양 커플은 그 지점에서 넘어지게 된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나아가 L양 남친이 과거 연애로 인해 가지게 된 트라우마도 이번 이별에 한 몫을 담당했다.
"다른 여자들이랑 달리 저는 완전 화도 안 내고 오빠 옆에서 묵묵히 있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결혼얘기가 오고 가면서 예전 여친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대요."
난 L양이 그의 저 말에, 너무 혼자 반성하지 않았으면 한다. 난 L양이 감정을 드러낸 게 원인이 아니라 생각한다. 원인을 따지자면, 그가 결혼 얘기를 하면서도 부모님께 인사 한 번 시킬 생각을 하지 않고, 혼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바람을 넣어 놓고는 함께 쓸 파리채 하나 함께 알아보지 않은 게 원인이다. 그가 금방 뭐라도 이루어질 것처럼 말만 번지르르 하게 해놓곤 실제로 아무 것도 안 하니 L양이 의문과 불만을 제기한 것이지, L양이 밝고 착한 사람이 아니어서 이 문제가 발생한 게 아니다.
내가 만약 L양의 친오빠고 그를 만난다면, 그에게
"뭐든 다 해줄 것처럼 공수표만 그렇게 발행해 놓고는, 직접 행동으로 증명해야 할 때가 되니 이젠 부담스러워 진 겁니까? 어느 누군가가, 실제로는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는 막연히 '밝고 착한 모습으로' 기약 없이 기다리라고 한다면, 누구든 지치고 힘들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그래놓고는 '내가 생각했던 밝고 착한 모습이 아니'라며 다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이건 '밝고 착한 모습'으로 못 기다린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말만 앞선 사람이 잘못이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라는 이야기를 했을 것 같다. 그의 말대로라면 연애를 더 지속할 수 없는 게 L양의 성격 때문이며, 결혼을 할 수 없는 게 현실 때문이라는 건데, 솔직히 난 부모님께 L양을 인사 한 번 시킨 적 없는 그의 태도에서 진심까지를 의심하게 된다. 만약 그게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말대로라면 이쪽이 아무 감정 없이 놓아둔 그 자리에 있는 '식물 같은 여자'나 '정물 같은 여자'여야 배우자로 적합하다는 얘기가 된다. 이 지점에 대해 L양도 곰곰이 생각해 보길 권한다.
2. 뿌리 내리지 못한 '우리'
다른 관점에서도 한번 보자. 난 그에겐 이 연애가, 점점 'L양을 돌봐줘야 하는 일'처럼 느껴졌기에 이별을 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L양은 그가 아직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거로
"헤어지고도 오빠는 제가 필요하다고 하면 달려왔어요. 제가 부르면 언제든 와서 말벗도 되어주고, 사랑한다는 말만 없을 뿐 연인처럼 일일이 보고하고 연락하고 챙겨주고 그랬어요. 제가 혼자 집에 있는 게 무섭다고 하면 와서 저 잘 때까지 있다가 집에 가기도 하고 그랬는데…."
라는 이야기를 꺼내 놓는데, 반대로는 어떠한가? L양도 그에게 위로와 위안이 되어주는 존재인가?
사연만 놓고 보자면, 상대에게 L양은 '돌봐줘야 하는' 존재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결혼까지 해줘야 하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두 사람이 데이트 할 때마다 만났던 장소, 그리고 데이트 비용을 보자. 거의 일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상대가 다 부담하지 않았는가?
L양에겐 그게 그의 성실함으로 느껴지며 그런 호의와 친절을 받는 게 행복했겠지만, 그러는 동안 그에겐 피로가 축적되었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가 그렇게 애써도 돌아오는 건 별로 없고 L양의 '다음 기대'들만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자연히 그에겐 이 만남이 의무처럼 느껴지고 만 것이다.
"오빠가 용기를 갖고 저랑 같이 살 생각을 하게 할 순 없을까요? 저는 돈이 없어도 오빠랑 결혼할 수 있는데, 남자는 그게 아닌 건가요?"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결혼하게 되면 앞으로 책임져야 할 몫의 8할 이상은 상대가 감당해야 한다. 두 사람이 뚜렷하게 결혼에 대해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니고, 서로의 벌이를 어느 정도씩 모아 무엇을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고, 현 상황이 이러이러하며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뭘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대화한 적 없다. 그저 만나면 좋으니까 계속 만나며 가장 친한 친구 보다 자주 봐서 가까워 진 것인데, 이처럼 막연한 상황에서 결혼까지 하게 되면 이후 겪어야 할 시행착오와 찾아올 갈등들이 빤히 보이는 것이다.
좀 다른 상황을 예로 들어 살펴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L양과 내가 친구라고 해보자. 우리는 몇 달 전부터
"우리 10월쯤 유럽여행 가자."
라는 이야기를 해왔다. 난 L양에게 유럽에 가면 로마 어디에 있는 아이스크림도 사주겠다고 했고, L양은 TV에서 본 그리스가 그렇게 예뻤다며 그리스 어디어디를 꼭 가볼 거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렇게 만나서 수다를 떨며 상상의 나래를 펼 때까진 참 좋았는데, 이제 9월이 되어 실제로 계획을 구체화해야 할 때가 되자 곤란을 겪게 되는 부분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우린 항공권 예약과 여행경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 없었다. 그냥 뭐 때가 되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만 했을 뿐 누가 얼마를 부담하고 어느 비행편을 예약할지에 대해 대화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는, 가서 얼마쯤 있다 올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지 않았고, 어딜 먼저 들를지, 또 가서 숙소를 어떻게 정할지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서 의사소통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것이다. L양은 그냥 내가 하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고, 나는 나중에 때가 되어 계획을 세우면 되겠거니 하며 지내다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런 와중에 L양은 내게
"로마 어디에 있는 아이스크림도 사준다며? 확실한 계획도 없으면서 그 얘기는 왜 한 거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우리 10월에 가는 거야, 안 가는 거야? 지금이라도 얼른 계획을 짜. 난 가서 호화롭게 여행 안 해도 괜찮으니까, 얼른 비행기 예매하고 준비할 거 준비해."
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럴 경우 난, 여행을 가고 싶을까, 아니면 가고 싶지 않을까?
'우리'라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이렇듯 한 쪽이 일방적으로 부담하거나 한 쪽이 다른 쪽을 모시는 모양으로 관계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연애 중 L양이나 남친 한 사람이라도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당장 뭘 계획하고 어떤 걸 준비해야 하는지 말을 꺼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두 사람 다 연애의 즐거움만을 누리며 아무 대비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이 연애 경영의 실패를 불러왔고, 때문에 준비 없이 시험을 맞이하게 된 사람들처럼 조급한 모습으로 서로를 탓하다 둘 다 지치게 된 거라 나는 생각한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게 왜 '단순히 기다린다고 해서 해결되진 않을 문제'인지를 알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또, 역시 '그에게 용기가 부족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으리라 생각한다.
L양이 재회의 가능성을 묻는 거라면, 난 상대가 이미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라며 모든 책임을 내려놓은 까닭에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답해야 할 것 같다. 결혼 얘기로 인해 처음 갈등이 생겼을 때 사연을 보내주었더라면 방법이 있었을 텐데, L양의 말대로 '들들 볶은' 시기가 길었던 까닭에 이제 그는 '결혼'이라는 단어만 봐도 덜컥 겁을 먹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혼은 어렵지만, 괜찮아 질 때까지 언제든 곁에서 뭐든 다 해주겠다."
라는 그의 친절과 호의를 받지 말길 난 권해주고 싶다. 그건 그가 발행했던 공수표를 이별 후의 친절과 호의로 지불해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일 뿐, 다시 나아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차라리 그가 L양을 잃었다는 것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L양이 홀로 서는 게 나을 테니, L양이야 말로 용기를 내 자신의 두 다리로 서길 권한다. 100%는 줄 수 없고 30% 정도 베풀 수 있다는 상대에게서 28~29%씩 받아가다 보면, 시간은 시간대로 흘러갈 뿐더러 상대가 베푸는 호의와 친절의 수치는 20%, 10%로 점점 낮아질 것이다. 그러니 우선 상대와 관련된 모든 것의 정지버튼을 누르길 권한다.
자 그럼, 즐거운 화요일 저녁 보내시고 우리는 내일 다시 만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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